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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건의 아날로그 베이스볼] “감독과의 불화로 고향팀 떠난 것 두고두고 후회”

입력 2012-09-13 07:00:00

한국 최고의 잠수함 투수, 빙그레를 이끌던 언더핸드 에이스 한희민이 지금은 오리고기 전문점을 운영하는 식당 사장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다. 계룡|김종원 기자 won@donga.com 트위터 @hong927

빙그레 창단멤버로 에이스 맹활약
이기면 노래반주기 싣고 심야 질주
스트레스 해소법 이해못한 사령탑
갈등 깊어지며 끝내 삼성으로 이적


대만서 2년 뛰다 돌아온 후 우울증
야생화·나무조각에 빠져 은둔생활
방황끝 뒤늦게 깨달은 교훈 한가지
“감독님과 잘지내는 게 롱런의 비결”


충남 계룡시 엄사면. 계룡역에서 자동차로 5분 거리에 시골 정취가 느껴지는 식당이 있다. 오리고기 전문점. 입구에 큰 간판이 보인다. 빙그레 유니폼을 입고 학처럼 마운드에 서 있던 그의 모습이 기억에 새롭다. 빙그레 창단 멤버인 그는 한국 최고의 잠수함 투수였다. 1993년 쫓기듯 삼성으로 떠났다. 2년간 대만에서 뛰었다. 한국프로야구 8년간 통산 80승51패24세이브, 방어율 3.25를 기록했다. 은퇴식도 없이 조용히 사라졌다. 한때 방황했다. 그리고 잠시 어린이 야구교실을 운영했다. 지도자 생활(한화·KIA)도 했다. 지금은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아내와 두 딸은 울산에서 따로 지낸다. 주말마다 만나는 가족이다. “100승을 하지 못한 것과 고향팀을 떠난 것이 두고두고 후회스럽다”는 한희민(50)이다.

○휘어진 오른손 중지, 투수로서 새 인생을 열어줬다!

세광고 1학년 때까지만 해도 특색 없는 정통파 투수였다. 선배들의 구타에 못 이겨 도망을 갔다. 경기도 안성의 중국집에서 20일간 일했다. 다시 야구를 하겠다고 학교를 찾아갔다. 김순성 감독이 새로 부임했다. “야, 밑으로 한번 던져봐라.” 그 한마디가 야구인생을 바꿨다. “1학년 때 1루 펑고를 받다가 오른손 중지를 다쳤다. 치료를 안 하고 그냥 뒀더니 손가락 끝이 휘어졌다. 일종의 장애지만 잠수함 투수가 공을 쥐고 던지는 데는 더 좋았다. 떠오르는 커브의 각이 커지고 예리해졌다.”

호리호리했던 자신의 체형과 맞아떨어진 피칭 스타일은 새로운 야구인생을 열어줬다. 선배 민문식과 함께 대붕기를 우승시켰다. 1982년 대학 진학 때 좌절했다. 연세대, 한양대 진학을 꿈꿨으나 답이 없었다. 결국 성균관대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았다. 먼저 입학했던 장채근이 공을 받았다. 이팔관 당시 감독이 장채근에게 가능성을 물었다. “그때 장채근이 OK했다. 인연이었나 보다. 나중에 한양대에서 입학하라고 연락이 왔지만, 주전이 보장된 성균관대에 다니기로 했다. 장채근은 덩치가 좋아 편하게 공을 던질 수 있었다. 포수가 원하는 곳에 공 반개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 컨트롤을 할 수 있었다.”

1985년 말 빙그레와 입단계약을 했다. 계약금 6200만원, 연봉 1200만원. “계약금을 현찰로 부모님에 드리려고 했다. 부피가 컸다. 수표 한장으로 바꿔서 아버지께 드렸더니 나중에 내 양말에 몰래 넣어두고 고향으로 가셨다.” 계약금으로 대전 변동에 51평 단독주택을 샀다. 5200만원이었다. “부모님이 단독주택을 원하셨다. 아파트나 다른 곳에 투자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세상일을 누가 알겠는가. 그곳에 부모님이 계속 살고 계신다.”

“야, 밑으로 한번 던져봐라.” 세광고 김순성 감독의 한마디가 그의 야구인생을 바꿨다. 빙그레 시절 한희민이 역동적인 폼으로 공을 뿌리고 있다. 스포츠동아DB



○아련한 빙그레의 추억

1986년 빙그레는 제7구단으로 프로야구에 뛰어들었다. 한희민은 이상군과 함께 에이스였다. 1986년 9승, 1987년 13승을 따냈다. “김우열, 장명부부터 어린 선수까지 구성이 다양했다. 훈련도 많았고 고생도 했지만 순수했다. 편 가르기가 없었다.” 1987시즌을 마친 뒤 배성서 창단 감독이 떠나고 김영덕 감독이 왔다. 빙그레도 강팀이 됐다. 1988년과 1989년 2년 연속 16승을 거뒀다. 한국시리즈에선 아쉽게 해태에 졌다.

훈련을 열심히 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늦잠도 많았다. 야행성이었다. 김영덕 감독의 눈 밖에 났다. 갈등이 오래갔다. “코치들은 동계훈련 때만 되면 내가 아프다고 한다면서 싫어했다. 나름대로 훈련은 했다. 웨이트트레이닝을 하면 더 아팠다. 고교 때 맞아서 생긴 허리통증이 고질이었다. 내가 필요한 운동은 많이 했다. 악력을 키우려고 악력기를 끼고 살았다. 엄지의 힘을 기르기 위해 맥주병 뚜껑을 구부리고 펴는 훈련도 했다. 손목의 힘을 기르는 훈련도 했다. 선수생활을 마칠 때까지 어깨나 팔꿈치는 싱싱했다.”

한창 때 한희민의 밤 생활은 길었다. 등판해서 이긴 날에는 새벽까지 놀았다. 노래를 좋아했다. 승용차에 노래반주기를 설치했다. 심야에 차를 몰고 다니며 노래를 불렀고 듣기도 했다. “1988년 50만원을 주고 설치했다. 스트레스를 많이 풀었다. 술도 먹었지만 노래기계 덕분에 자제했다. 등판 전에는 몸 조리도 잘했다. 아침은 대학 때부터 먹지 않았다. 야식을 먹고 늦게 잤다. 한번 깨면 다시 잠들기 힘들어 계속 아침을 건너뛰었다.” 김영덕 감독은 이런 생활태도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팀이 북일고 출신과 비북일고 출신으로 은연중 나뉘던 때였다. 점점 아웃사이더가 됐다.

○더 험한 세상이 기다렸다!

1992년 갈등은 한계를 넘어섰다. “어느 날 ‘감독하고 야구 못 한다’고 했던 말이 김 감독의 귀에도 들어갔다. 한동안 고민한 끝에 감독을 찾아갔다. 집에 가서 용서를 빌려고 했는데 거절당했다. 아파트 현관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빙그레와의 인연은 거기서 끝이었다. 1993년 삼성 유니폼을 입었다. 시즌 초반 4승1패3세이브를 기록하던 차에 우용득 감독이 선발에서 중간으로 보직을 바꾸려고 했다. 거부했다. 그길로 2군으로 갔다. 오른발 티눈 제거수술을 받고 시즌을 끝냈다.

1994년 탄생한지 얼마 되지 않은 대만프로야구에 진출했다. “처음에는 1년만 하고 돌아올 생각이었다. 잘못된 판단이었다. 그때 김영덕 감독하고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열었더라면, 그날 내 손만 잡아줬더라도 고향팀을 떠날 이유는 없었다. 내 야구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대목이다.” 대만에서의 생활은 악몽이었다. 소속팀 준궈 베어스에는 한국 선수가 5명 있었다. 대우는 에이스급이었다. 아파트도 따로 주고 연봉도 한국만큼 줬다. 문제는 승부도박이었다. “중요한 경기 때면 구단주가 오더를 내려보냈다. 타이베이에서 형제 엘리펀츠와 경기를 했다. 경기 전에 몸이 안 좋아 등판이 어려웠다. 한 타자만 상대하고 내려오려고 했는데 힘을 빼고 던지자 공이 좋았다. 2-0으로 이기던 차에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교체 당했다. 구단주가 바꾸라고 했다. 다음 투수가 역전패 당했다. 이런 식이었다.”

○은둔, 재기, 회한, 그리고 평화

한국에 돌아온 뒤 야구장에 돌아가지 않았다. 칩거했다. 집에서 TV만 보고 지냈다. 우울증 증세였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싫었다. 그런 아들을 일으켜 세운 사람은 아버지였다. “나가서 택시기사라도 해라”고 했다. 마음을 다잡았다. 누군가 나이트클럽 월급사장으로 오라고 했다. 가면 다시는 야구에 오지 못할 것 같아 거부했다. 유성에서 ET야구교실을 운영했다. 큰 손해를 봤다. 야생화 키우기와 나무 조각에 빠져 도인처럼 지냈다.

현역시절 성미가 급했기에 항상 자신의 마음을 추스르며 공을 던졌다. “나를 못 이기면 아무 소용이 없다. 중요한 경기 때는 공과 얘기도 했다. ‘야, 잘 들어가라’고 하면 공이 말을 들어줬다. 야구는 그날의 컨디션이 좌우한다. ‘자기 기술은 항상 있으니까, 심판을 잘 읽고 심판의 스트라이크존과 싸우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뒤늦게 알았다. 바로 감독과도 잘 지내는 것이다.

한희민?

▲생년월일=1962년 7월 19일
▲키·몸무게=188cm·77kg(우투우타)
▲출신교=세광고∼성균관대
▲프로 경력=1986년 빙그레∼1993년 삼성∼1994년 대만 준궈 베어스(1995시즌 후 은퇴) ※2003년 한화 투수코치∼2005년 KIA 2군 투수코치
▲한국프로야구 통산성적=204경기 80승51패24세이브(47완투·13완봉) 1124.2이닝 595탈삼진 방어율 3.25


전문기자 marco@dobga.com 트위터 @kimjongke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