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건영통신원의 네버엔딩스토리] 다저스 경기중계 64년, 역사의 현장엔 그 목소리 있다

입력 2013-08-28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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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다저스 전담 캐스터 빈 스컬리. 동아닷컴DB

■ 다저스의 목소리 빈 스컬리


24일(한국시간) 다저스타디움의 인터뷰실은 기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다저스의 목소리’로 불리는 빈 스컬리(86)가 특유의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스컬리는 “이렇게 기자회견까지 할 것은 아니지만, 내년 시즌에도 다저스 경기를 중계할 수 있게 돼 기쁘게 생각한다”며 “청년 시절부터 시작한 중계방송을 지금까지 계속해올 수 있는 것은 신의 가호가 없었으면 불가능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1950년 다저스 중계팀 결원…라디오중계 행운
1953년, 26세 최연소 월드시리즈 중계 기록도
다저스 1958년 LA로 연고 이전…스타덤 올라
노히터 25번·WS 25번·올스타전 12번 중계
올해 다저스 우승 자신의 목소리로 중계 꿈꿔


스컬리가 처음 다저스 경기의 중계를 맡은 것은 1950년. 한국에서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났던 바로 그 해, 20대 초반의 젊은 스컬리가 브루클린 다저스의 아나운서로 발탁된 것이다. 1927년 11월 29일 뉴욕 브롱크스에서 태어난 스컬리는 가난한 가정형편 탓에 온갖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학비를 스스로 충당했다. 틈만 나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풋볼 경기를 들으며 스포츠중계 캐스터의 꿈을 키워나간 그는 해군으로 2년간 복무한 뒤 뉴욕에 있는 포덤대학으로 진학했다. 포덤대학의 FM 라디오 방송국을 설립하는 데 크게 기여한 그는 스포츠 편집자로 활동하는 동시에 야구, 풋볼, 농구 경기의 중계방송을 전담했다.

졸업을 앞두고 스컬리를 스카우트하겠다는 편지가 무려 150통 넘게 왔다. 고심 끝에 CBS 라디오에서 마이크를 잡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에게 1년 만에 뜻하지 않은 기회가 찾아왔다. 브루클린 다저스의 중계방송팀에 결원이 생겨 1950년 시즌부터 라디오 중계를 맡게 된 것이다. 당시 간판 캐스터였던 레드 바버가 연봉 문제로 1953년 다저스를 떠나자, 스컬리가 메인 자리를 차지하게 됐고, 그 해 월드시리즈 중계까지 맡는 행운을 누렸다. 당시 26세였던 스컬리가 세운 최연소 월드시리즈 중계 기록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뉴욕 토박이인 스컬리는 1958년 다저스가 연고지를 옮김에 따라 LA로 거처를 옮겼다. 야구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캘리포니아에 다저스가 이사해오면서 스컬리도 스타덤에 올랐다. 처음에는 올림픽 메인스타디움인 메모리얼 콜리시엄이 다저스의 홈구장으로 사용됐는데, 트랜지스터라디오를 지참하고 경기를 관람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다. 야구전용구장이 아닌 데다, 10만 명을 수용하는 엄청난 규모였던 경기장에서 아직 야구 룰에 익숙하지 않은 관중은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스컬리의 명쾌한 설명을 들으며 다저스의 골수팬이 됐다.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자, 1964년 고향팀 뉴욕 양키스에서 영입 제의가 왔다. 그러나 스컬리는 정중히 거절하고 다저스 잔류를 선택했다.

지상파 TV의 중계를 겸하기 시작한 1975년부터 스컬리는 전국구 스타로 발돋움했다. 7년 동안 CBS에서 그는 메이저리그가 아닌 NFL(미국프로풋볼)의 캐스터로 발탁됐다. 또한 PGA(미국프로골프) 투어 경기도 맡아 첫 메이저대회인 마스터스를 중계하기도 했다. 그러나 라이벌 관계였던 팻 서머렐에 밀려 1982년 슈퍼볼 중계를 맡지 못하게 된 스컬리는 CBS와 결별을 선언하고 이듬해부터 NBC로 둥지를 옮겼다.

CBS에서와는 달리 NBC에선 야구에만 전념한 스컬리는 월드시리즈(1984·1986·1988년)와 올스타전(1983·1985·1987·1989년) 중계를 맡았다. 이 기간 프레드 린의 올스타전 최초의 만루홈런(1983년), 시카고 컵스의 홈구장 리글리필드 최초의 야간경기(1988년), 1988년 월드시리즈 1차전 9회말 커크 깁슨의 끝내기홈런 등 지금도 야구팬들의 뇌리에 남아있는 역사적 장면들이 그의 목소리를 통해 전달됐다.

지상파 TV와 다저스 경기의 중계를 동시에 맡다 보니 많은 해프닝도 벌어졌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24시간 안에 다른 두 도시에서 23이닝이나 중계방송을 한 일을 꼽을 수 있다. 1989년 6월 3일 NBC의 ‘새터 나이트 베이스볼’로 편성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컵스의 경기는 연장 10회 끝났다. 바로 다음 날 다저스의 원정경기를 중계하기 위해 휴스턴으로 향한 스컬리는 호텔 대신 곧장 애스트로돔으로 직행해야 했다. 낮경기로 치러진 다저스와 애스트로스의 경기는 연장 13회에서야 승부가 갈렸다. 그의 마지막 지상파 TV 중계는 1989년 10월 9일 치러진 내셔널리그 챔피언십시리즈 5차전이었다. 이듬해부터 메이저리그 중계권이 CBS로 넘어가는 통에 어쩔 수 없이 NBC와 결별한 스컬리는 이후 다저스 경기 중계에만 전념했다.

64년째 중계방송을 진행하는 동안 퍼펙트게임 3차례, 노히터 25차례, 월드시리즈 25차례, 올스타전 12차례 등이 그의 목소리를 통해 팬들에게 전달됐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저스는 그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올 7월 그가 방송하는 모양을 따서 만든 버블헤드 인형을 다저스타디움을 찾은 팬들에게 나눠줬다.

그렇다면 스컬리의 연봉은 얼마나 될까. 다저스 구단은 2006년 2월 그와 2008년까지 계약연장을 발표하며 연봉을 300만달러라고 발표한 바 있다. 이후 고령으로 전 경기를 소화할 수 없게 된 스컬리는 한 시즌에 100경기 정도만 마이크를 잡고 있다. 그는 다저스타디움에서 열리는 홈경기와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소속팀들과의 원정경기만 커버하고 있다.

1999년 만들어진 영화 ‘For Love of the Game’에도 출연한 스컬리는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도 이름을 올렸다. 또 2001년부터 다저스 구단은 기자실을 ‘빈 스컬리 프레스룸’이라고 부르고 있다.

늘 온화하게 미소 짓는 스컬리에게도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1972년 당시 35세이던 아내가 의료 과실로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또 1994년에는 장남이 헬리콥터 추락사고로 운명을 달리했다. 당시 아들의 나이는 33세에 불과했다. 그 해 발생한 ‘노스리지 지진’의 여파로 누수가 생긴 송유관을 점검하려다 사고를 당한 것이다.

63년 전 스컬 리가 처음 중계를 맡았을 때 다저스는 월드시리즈 우승과 인연을 맺지 못했다. 브루클린 시절이던 1955년 구단 역사상 첫 우승을 차지한 뒤 LA로 연고를 옮겨 5차례(1959·1963·1965·1981·1988년) 챔피언에 등극했다. 80대 중반인 스컬리는 자신의 목소리로 팬들에게 다저스의 7번째 우승을 전하는 게 꿈이다.

시즌 초반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선두에 9.5경기차나 뒤졌던 다저스는 최근 거침없는 상승세 속에 포스트시즌 진출의 9부 능선을 넘어섰다. 1988년 이후 우승 가뭄에 시달리고 있는 다저스가 월드시리즈에 진출해 스컬리의 음성이 다저스타디움에 울려 퍼지기를 많은 팬들이 간절히 바라고 있다.

빈 스컬리의 버블헤드(왼쪽)와 액자. LA|손건영 통신원


LA|손건영 스포츠동아 미국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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