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호의 추남일기] 영건포수의 PS도전과 전혀 다른 볼 배합

입력 2016-10-12 0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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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A 한승택-LG 유강남(오른쪽). 스포츠동아DB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다. 2009년 10월 24일 잠실구장 SK와 KIA의 한국시리즈 7차전 종료 직후. SK 포수 정상호는 화장실에서 깊은 아쉬움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뒤따라 들어온 전력분석 코치는 정상호에게 “왜 슬라이더가 아닌 직구 사인을 냈나?”며 화를 냈다. 정상호는 불과 몇 분전 9회말 1사 나지완 타석 볼카운트 2B-2S에서 투수 채병용에게 직구 사인을 냈다. 시속 143km 공은 높았고, 역사적인 한국시리즈 끝내기 홈런이 됐다. 정상호는 훗날 “투수는 이미 체력적인 한계점을 넘은 상태였다. 슬라이더가 전혀 제구가 되지 않아 선택할 수 있는 공은 직구뿐이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SK는 주전포수 박경완이 부상으로 없었다. 코칭스태프는 결정적인 순간 볼 배합에 개입하지 않았다. 모든 책임은 포수가 져야했다.

LG와 KIA의 2016시즌 와일드카드 결정전은 젊은 포수들의 맞대결이다. 흥미진진한 부분은 신예 포수를 대하는 양 팀의 정반대 전략적 선택이다.

KIA는 고졸 4년차 한승택(22)이 주전 포수다. KIA 코치진은 볼 배합에 전혀 개입하지 않고 있다. 모든 판단은 1군 출장경기가 51경기뿐인 스물두 살 한승택이 책임지고 있다.

결과는 훌륭했다. 이순철 SBS스포츠해설위원은 와일드카드 결정전 1차전을 지켜보며 “한승택의 투수 리드가 굉장히 뛰어나다. 큰 경기에서도 흔들림 없이 경기를 풀어나갔다”고 평가했다. 이날 한승택이 사인을 낸 120개의 공 중 단 6개만 안타가 됐다. 허를 찌르는 로케이션도 훌륭했다. 투수가 포수의 사인을 보고 고개를 가로젓는 장면도 거의 없었다. 한승택은 처음 야구를 시작할 때부터 포수였다. 투수리드 만큼은 젊은 나이지만 매우 수준 높은 판단력을 인정받고 있다.

LG는 KIA와 다른 전략적 판단으로 포스트시즌을 치렀다. 1차전 LG 주전포수는 고졸 6년차 유강남(24)이다. 한승택보다 두 살 많은 유강남의 1군 출장 경기수는 242경기다. 볼 배합의 상당 부분은 김정민 배터리코치가 책임을 함께하고 있다.

장점은 분명하다. 프로에서만 16년을 뛴 최고의 베테랑 포수 출신 코치의 경험과 분석능력이 그대로 그라운드 안 포수에게 전달된다. 단점도 분명하다. 포수는 타자 바로 뒤에 앉아서 투수의 공을 직접 받는다. 특유의 감이 존재한다. 타자의 호흡, 발 위치, 시선, 표정을 보고 사인을 바꾸는 포수도 있다. 또한 실투는 포수가 도저히 지배할 수 없는 영역이다. 투수는 기계가 아니다.

국내 최고의 포수 전문가로 꼽히는 조범현 kt감독은 “투수가 실투가 있듯이 포수도 한 경기 130개 안팎의 사인을 내다보면 분명 실수가 나온다. 베테랑 포수도 마찬가지지만 그 실수가 적다. 수년간 호흡을 맞춘 투수가 마운드에 있고 수 없이 쌓인 경험과 데이터 분석을 갖고 사인을 내도 한 순간 서늘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여지없이 적시타 혹은 큰 거 한방이다”고 설명했다.

젊은 투수에게 볼 배합을 완전히 맡길 것인가. 아니면 경험 많은 배터리 코치가 함께 할 것인가. 정답은 없다. 오히려 전자보다 후자가 포수의 성장을 빨리 돕는다는 주장도 있다.

포수의 자존심을 누구보다 잘 알고 깊이 신뢰하는 조범현 감독도 올 시즌 초반 포수 김종민에게 배터리 코치가 사인을 전달하도록 했다. 아직 확고한 이론이 정립되지 않았을 경우 배터리코치의 판단을 직접 실전에 적용시키며 더 빨리 배우고 더 많이 느끼라는 속성 실전 훈련이다.

포수는 최고의 투수와 함께 있을 때 빨리 성장한다. 많은 포수들은 공통적으로 말한다. 자신의 사인을 낸 코스로 정확히 공이 들어와 삼진을 잡았을 때 느끼는 카타르시스는 홈런보다 더 짜릿하다고. 그런 의미에서 한승택, 유강남은 헥터 노에시, 데이비드 허프라는 최고의 투수와 전국적인 관심이 쏟아진 큰 경기를 치렀다. 당장 올 시즌 보다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두 팀 모두 가치를 환산할 수 없는 값진 경험을 현재이자 미래의 안방마님에게 선물했다.

이경호 기자 rush@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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