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무비] 이창동의 ‘버닝’, 불친절해서 더 매력적이다 (리뷰)

입력 2018-05-23 07: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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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통회사 알바생 종수(유아인)가 어릴 적 동네 친구 해미(전종서)를 만나고, 그녀에게 정체불명의 남자 벤(스티븐 연)을 소개 받으면서 벌어지는 비밀스럽고도 강렬한 이야기]

영화 ‘버닝’에 대한 짤막한 줄거리다. ‘정체불명’ ‘비밀스럽다’는 표현이 이 작품이 얼마나 미스터리한 내용인지 가늠케 한다. 한국 영화 가운데 유일한 제71회 칸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작인 ‘버닝’은 국내 개봉일이자 칸 공식 상영일인 17일까지 철저히 베일에 싸여 있었다. 출국 기자회견에서도 이창동 감독은 “젊은이들과 그들이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고민을 담은 영화”라는 미스터리한 설명으로 더더욱 궁금증을 자극했다.

다만 영화에 대한 힌트를 미리 얻을 수 있는 작품이 있다. ‘버닝’의 원작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 ‘헛간을 태우다’. 고작 32페이지 분량의 단편 소설인데 이창동 감독은 오정미 작가와 함께 러닝타임 148분의 영화로 만들어냈다. 원작의 ‘나’, ‘그녀’, ‘그’가 영화에서는 종수, 해미, 벤으로 설정됐다. 크게 달라진 점은 소설 속 31살의 기혼 남성인 ‘나’가 영화에서는 20대 청춘의 ‘종수’로 설정됐다는 것. 해미와 벤은 원작의 ‘그녀’ 그리고 ‘그’와 흡사하다. ‘나’를 중심으로 한 시선과 전개도 원작과 같다. 주요한 대사와 캐릭터들의 기본적인 설정 또한 원작과 결을 함께한다.

‘원작을 뛰어넘은 재창작물’. ‘버닝’은 마치 홀수로만 나열된 빈틈을 짝수로 채워 넣은 듯 원작을 더욱 풍성하게 재창작했다. 캐릭터는 입체적으로 확장됐고 미스터리한 분위기도 증폭됐다. 1980년대의 소설에서 현 시대의 청춘을 생각해낸 것도 놀랍지만 그 어떤 작품보다 ‘한국스럽다’는 점도 감탄을 자아낸다. 원작이 해외 작품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일상적이고 친숙하기 때문이다.

원작 소설도 그러하지만 영화 ‘버닝’ 또한 많은 은유와 상징을 품고 있다. 그야말로 메타포(은유)의 화수분. 단서는 쏟아지지만 그 어떤 것도 보여주거나 설명해주지 않는다. 관객 스스로 해답을 찾아가게 만드는데 영화 ‘곡성’을 떠올리게 한다. 명확한 설명과 결말을 원하는 관객들에게는 ‘불친절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버닝’은 벤이 주기적으로 태운다는 ‘비닐하우스’(원작에서는 헛간)의 정체조차도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정황과 증거가 켜켜이 쌓이면서 영화 속 종수가 그러했듯 관객도 나름의 결말을 내릴 수밖에.

22일까지 약 37만 명이 ‘버닝’을 관람했다. 이 ‘불친절한’ 영화를 37만명의 관객 모두가 같은 해석으로 영화를 받아들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미 온라인상에서는 ‘곡성’ 개봉 당시처럼 혼란스러웠던 관객 각자의 해석이 나오고 있는 상황. ‘불친절함’이 낳은, 관객들의 흥미로운 놀이가 펼쳐지고 있다. 앞서 이창동 감독은 “‘버닝’은 다른 방식으로 관객들에게 말을 거는 영화”라고 설명했다. 관객들의 뜨거운 담론 또한 이창동 감독의 의도는 아니었을까.

P.S. 사담을 덧붙인다면 필자는 (이창동 감독의 의도와 무관하게) 벤과 해미 그리고 종수의 관계에서 키보드 워리어들과 연예인 그리고 기자의 관계를 느꼈다.

동아닷컴 정희연 기자 shine2562@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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