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이사람은왜] ‘청담보살’의 박예진

입력 2009-11-13 15: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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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에서 가장 청담동스러운 배우 '예진아씨'의 매력

 천명공주이자 예진아씨인 박예진이 영화 <청담보살>로 돌아왔다.(영화 스틸신) ☞ 사진 더 보기


박 보살이 떴다.

그것도 제대로 떴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박예진을 눈여겨봐온 사람들에게 그녀의 '등극'은 당연의 결과물이다. 스타(별)는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어느 날 갑자기 혜성처럼 나타나 빛을 발하는 별과 초저녁 보이는 듯 마는 듯해도 새벽이 깊을수록 존재감을 드러내는 별 말이다. 박예진은 전형적으로 후자에 속하는 별임이 분명하다. 데뷔 12년차.

1998년 '여고괴담2'에서 주요배역인 '효신'으로 스크린에 나타났다. 하지만 호러의 저주였을까? 우리나라 대표 학원 호러물인 여고괴담에는 징크스가 있었다. 홀수 편은 흥행에 성공하고 짝수 편은 저조하다는 것. 하필 박예진은 짝수인 '2'편에 등장한 것이다. (이 징크스는 올해 '여고괴담5'의 흥행이 부진한 결과 깨졌다고 본다.)

화려한 데뷔는 아니었지만 박예진은 꾸준히 영화와 드라마, 심지어 예능프로에까지 도전해왔다. 10년을 활동하도록 연예계에서 그녀의 존재감은 미미했다. 열 한 편의 드라마와 여섯 편의 영화에 출연하기까지 세상은 그녀를 알아주지 않았다.

꾸준한 활약에 비해 미약한 존재감

드라마 중에는 흥행작 '두사부일체'를 케이블TV 버전으로, 또 여성 주인공들로 패러디한 '여사부일체'처럼 대중에게 철저하게 가려진 작품도 있다. 영화는 어떨까? '희망이 없으면, 불안도 없다'라는 8분짜리 단편까지 포함한 기록이 여섯 편이다.

그녀는 마치 생계형 소녀가장처럼 호러, 액션, 멜로, 사극, 예능까지 영역을 가리지 않고 주어진 모든 배역을 그야말로 꾸역꾸역 소화해온 것이다. 그러나 성실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흥행대박이 난 작품이 거의 없었고, '대조영'처럼 이름난 드라마는 작품 규모가 커서 상대적으로 배역의 존재감이 미미했다.

박예진과 임창정은 의외로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 사진 더 보기


이런 추세가 더 길어졌다면 박예진은 이름 석 자를 시청자 뇌리에 남기지 못한 채 그저 낯익은 조역의 감초배우로 나이 들어갔을런지 모른다. 잠재된 재능을 꽃피우지 못한 채 시들어갈 수도 있었던 한 여배우를 대중에게 각인시킨 것은 엉뚱하게도 난생 처음 출연한 예능프로였다.

매주 일요일 저녁, 안방을 찾은 '패밀리가 떴다'에서 초기에는 국민요정 이효리의 보조역 정도로 등장하기 시작한 박예진은 튀지도 않으면서 덤덤하고 털털하게 시나브로 시청자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패떴'에서의 성공 이후 시청자들은 드라마 '미워도 다시 한 번 2009'에 출연한 박예진을 한 번 더 눈여겨보기 시작했고, 드디어 열세 번째 드라마인 '선덕여왕'에서 그녀는 천명공주로 굳건히 자리매김을 했다. '선덕여왕' 후반부 최고의 하이라이트가 미실의 죽음이라면, 전반부 최고의 장면은 천명공주의 죽음이었을 것이다.

처음 출연한 예능 '패떳'을 통해 캐릭터 알려

그리고…, 예능 '패떴'의 하차와 '선덕여왕'의 퇴장 이후 예진아씨가 브라운관에 남긴 여운에 사람들이 그녀 모습을 그리워할 때쯤 그녀는 박 보살로 다시 스크린에 떴다. 타이밍도 '딱'이고, 설정도 '딱'인 박예진 표 맞춤작품 '청담보살'이다.

예진아씨, 강남 청담동, 무속인을 지칭하는 '보살', 이 세 요소는 사실 거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조합이다. 그러나 표면상 명품녀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박예진의 외모는 청담동에 걸맞고, 엉뚱한 듯 청승맞을 것도 같은 그녀의 성격은 무속적 분위기와 묘하게 맞닿는다. 결국 박예진이 연기하는 오태랑이라는 캐릭터는 이질적 조합을 흥미진진하게 녹여 작품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작품을 논하기 전에 예단한다면 '청담보살'의 흥행은 보증되었다. 더하여 '중박'을 넘어 '대박'까지 간다면 이 작품과 박예진이 우리관객과 교감해 폭발할 요소가 바로 '이질적 이중성'에 있다.

처녀보살 오태랑이 내방객의 삶에 대해서는 독한 카리스마로 쾌도난마 신탁을 전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사랑에 대해선 한없이 나약해지는 이중성은 모든 인간이 지닌 정형성을 그럴싸하게 전달한다.

세련됐으면서 생활력 강한 그는 청담동스러움의 상징이다. ☞ 사진 더 보기


이에 더하여 영화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매력 포인트가 보석처럼 박혀 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남녀, 국가대표급 찌질남과 신 내린 무당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만남, 지긋지긋해서 무서울 정도인 운명론과 자유의지의 자기선택론 사이의 갈등, 보이지 않게 우리를 구속하는 관습 및 고정관념과 이를 벗어나고픈 욕망 간의 내면적 긴장, 진짜 수퍼내츄럴 무당과 가짜 사이비 역술인의 공생관계, 드라마 속에서 익숙한 럭셔리 라이프스타일과 가수 장기하의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란 노랫가락이 떠오르는 궁색한 옥탑방 등 우리사회의 뒤틀린 일상에서 흔히 겪게 되는 선택적 상황과 이미지가 공감을 자아낸다.

절묘한 타이밍에 등장한 '청담보살'

21세기에도 여전히 성업 중인 무속산업의 현대적 공간인 '사주카페'는 이러한 이야기를 풀어가기에 적절하다. 족집게 무당 태랑(박예진)과 부적을 남발하는 역술인 병수(김희원), 젊은 층에 인기 있는 타로카드 점성술사 지혜(서영희)와 이들의 매니저 주영(서유정)은 친구들로, 이들이 나누는 사랑에 대한 고민은 관객의 마음을 파고들기에 무리가 없다.

여기에 '운명적 사랑'으로 끼어드는 찌질남 승원(임창정)이 있다. 승원은 이미 '색즉시공'으로 익숙한 은식(임창정)의 캐릭터가 은효(하지원)도 만나지 못한 채 대학을 졸업하고 놀고 있다고 생각하면 꼭 맞는 인물이다. 태랑은 스물여덟 살을 넘기기 전에 운명의 남자를 만나야 하는데 그 사주팔자를 승원이 지니고 있었던 것. 태랑은 하필 이때 앞에 나타난 킹카 첫사랑 호준(이준혁)에게 마음 설레고, 운명이냐 의지냐 갈등하던 청담보살은 두 남자에게서 각각 반전을 맞이한다.

극중 대사인 "꿈과 결혼하고, 상상력과 사랑하면서 사는 거야"라는 말은 사랑과 결혼 문제로 고심하는 대한민국 여성들에게 파고들 것으로 보인다. 한편 온갖 허세는 다 떨면서도 결국 소심남이자, 돈 많고 예쁘면서도 순종적이기까지 한 여자를 원하는 마초 승원은 사실 대한민국 남성의 원형에 가깝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로또나 경마보다 확률이 낮아 보이는, 굴러 떨어지는 복덩이에 맞아도 용서가 되는 것은 요즘 보기 드문 순수성을 지닌 착한 남자라는 설정 때문이다. 적어도 그에겐 '진정성', 혹은 진심이 남아있는 것이다.

'청담보살'을 보는 동안 떠오르는 영화 두 편이 있었다. 두 남녀의 이야기 구조는 좋은 남자지만 숨겨진 일군 두식(김주혁)과 부잣집 딸이면서 의사인 혜진(엄정화)이 사랑을 엮는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반드시 나타난다, 홍반장'을 닮았다.

두 영화의 남자주인공들이 사회통념상 번듯하지 못한 직업이면서 주변사람들을 돕는 오지랖이 넓은 것이 그렇고, 도도한척 깍쟁이로 굴지만 사실은 마음여린 여주인공들이 그렇다. 하지만 초자연과 무속이라는 한국적 정서를 배경으로 한 것은 차승원과 장서희가 주연한 '귀신이 산다'와 맥락이 통한다고 볼 수 있겠다.

청담보살’은 청담동에서 유명한 점집 포춘살롱의 보살인 ‘청담보살’(박예진 분)이 운명의 짝을 찾기 위해 벌이는 로맨틱 코미디다. 스포츠동아 양회성 기자 ☞ 사진 더 보기


여전히 매력적인 찌질남 임창정

TV드라마 '순풍산부인과'를 연출했던 김진영 감독이 영화 데뷔작 '아기와 나' 이후 두 번째로 내놓은 이 작품은 매우 한국적인 정서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 작품이 만약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진다면 '프랙티컬 매직'이나 '호커스포커스' 같은 판타지 로맨틱 코미디나 오리엔털 매직이 배경이 되는 '프리키 프라이데이' 같은 코믹멜로가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우리에겐 무당의 초능력이 왜 판타지가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걸까?
그것은 전통적으로 이야기되는 한국적 '한'이 현대에도 여전히 우리네 파토스의 뿌리가 되고 있기 때문이고, 우리가 현대도시의 구석구석, 거리공간 뿐 아니라 온갖 종이신문과 잡지, 웹사이트에서까지 '처녀보살', '미래예언'의 간판과 산업을 스킨십하며 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영화에 대한 단 한 가지 우려라면 '청담보살'의 흥행에 힘입어 현실의 처녀보살들이 사업적으로 너무 탄력 받지 않았으면 하는 점이다(그녀들의 사랑이 탄력 받는 것은 프라이버시이므로 자유일 것이고). '청담보살'에서 무속과 역술은 극적 장치이며 주제는 운명론을 극복하는 의지적 사랑임이 확실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영화는 풍자적으로 웃기고, 캐릭터들이 재미있고, 로맨스가 해피엔딩인 즐거운 작품이다.

굳이 무속산업이 영화 한 작품 덕에 반짝 동반상승 된다 해도 기왕이면 '청담동'이 아니라 강북 '미아리'를 중심으로 잘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무속이 서민의 애환을 심리적으로나마 위로해줄 수 있는 마약이라면 대부분의 실제 무당들은 대다수 재래주택가나 낡은 상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청담보살'과는 완전히 다른 대척점에서 만들어진 무당에 관한 다큐멘터리영화 '영매'에서 박기복 감독은 한강 이남의 세습무(당골레)와 한강 이북의 강신무(만신)의 슬프고 열악한 삶을 생생하게 보여준 바 있다.

청담동과 어울리는 무속 그리고 예진아씨?

실제 무당의 세계에서까지 외모와 인테리어의 포장효과가 생계의 양극화를 만들어낸다면 그것은 초자연의 세계마저 시장화 하는 물신숭배의 서글픈 세상이 되는 것 아닐까? (무속 자체가 물신숭배와 아무 상관성이 없는 것은 또 아니지만 말이다.)

이렇게 말해놓고서도 11월 11일 개봉한 영화를 첫날 심야에 보고서 극장을 나서는 새벽, 찬바람이 휩쓰는 상가와 아파트촌 사이사이 수십 개의 빨간 네온십자가들이 눈에 들어왔고, 이성은 저항하지만 박예진이 앉아있는 보살 집에 남몰래 찾아가 내밀한 문제들을 상담 받고 싶은 마음을 부인할 수도 없었다.

여전히 무당파워가 강해지는 대한민국 연예판은 당분간 방송계는 무릎팍 도사가, 영화계는 청담보살이 분할통치하게 될 듯싶다. (어설픈 영화평론가의 예언(?)이라고 한다면 '청담보살'의 속편 제작이 충분히 가능해보인다는 뜻이다.) 청담보살 박예진의 재발견은 스타탄생이라기 보다는 진주발굴이라는 표현이 적절하겠다.

그녀는 오랜 기간 조금씩 다듬어지는 과정 속에서 스스로 빛을 발하게 되었기 때문에.

최영일 문화평론가 vincent201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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