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아침 편지] 마트서 기싸움했던 아줌마 알고보니 중학시절 선생님

입력 2009-11-20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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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과 특가 상품이란 단어에 민감한 저는 신문 사이에 끼워져 있는 상품전단지를 보고서 무작정 마트로 향했습니다.

오른손으로는 카트를 밀고, 왼손에는 전단지를 들고 어떤 상품이 싼가, 어떤 상품이 잘 나왔나 매장 곳곳을 둘러봤죠. 그렇게 가격표를 꼼꼼히 챙기며 다니던 도중 500원짜리 시금치 한 단이 제 눈에 띄었습니다.

빛의 속도로 달려가서 손을 쭉 뻗어 집어 들었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웬 아줌마가 제가 든 시금치를 같이 들고 계신 겁니다. 이게 어떻게 찾은 보물인데 싶어서 온 손가락에 힘을 주고 시금치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 분도 어찌나 기가 세던지 도무지 포기할 기미를 보이지 않더군요. 그렇게 한동안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내가 먼저 찜했거든요?’라는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신경전 끝에 눈썹을 한 번 올렸다가 내렸더니, 그 분은 도저히 안되겠다 싶었던지 금세 손을 떼고 다른 곳으로 옮겨 가시더라구요.

결국 영광의 시금치는 제 카트 안에 실렸고, 저는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다른 할인 상품을 찾아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런데 할인 상품 판매대를 돌아다닐 때마다 그 아줌마를 마주치는데 계속 찝찝하더군요. 분명 어디서 본 듯한 낯익은 얼굴이었는데 어떻게 알게 된 건지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다가 나란히 놓여있는 두부를 동시에 집어 든 순간 제 머릿속에 한 사람이 스쳐지나갔습니다. 오똑한 콧날에 붉은 입술, 그리고 입술 아래에 있는 점까지.

중학교 다닐 적에 동경의 대상으로 여겼던 도덕 선생님이셨습니다.

20년 전 저희 학교로 처음 부임해 오셨었는데 정말 예뻐서 대학교 가면 꼭 저렇게 하고 다녀야지 하면서 항상 눈여겨봤었습니다. 머리핀, 가디건, 스카프 등 모든 것이 제 동경의 대상이었죠.

한 번은 수업받기가 싫어서 노래 불러달라고 졸랐었는데, 마침 창문이 열려 있어서 들어오는 바람에 긴 생머리를 휘날리며 불러주셨던 ‘애심’은 그 날 이후로 줄곧 제 애창곡이 되었죠.

그렇게 좋아했던 선생님을 못 알아보고 기 싸움으로 물건을 사수했단 생각에 죄책감이 조금 들긴 합니다. 다음번에 뵈면 그 때는 저 기억하시냐고, 선생님께 노래 시켰던 그 키 작은 단발머리 여중생이라고 말하면서 하나 남은 할인 상품이라도 무조건 드릴 생각입니다.

오늘 따라 도덕선생님께서 불러주셨던 전영록의 ‘애심’이 듣고 싶네요.

From. 이숙현|대구광역시

행복한 아침, 왕영은 이상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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