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권재현] ‘표현의 자유’에 대한 재고찰

입력 2010-01-01 15: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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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계 대박상품에 서킷 브레이크제를…‘빵꾸똥꾸와 표현의 자유’

MBC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의 등장인물인 초등학생 해리의 '빵꾸똥꾸'란 표현의 적절성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 22일 해리가 이 같은 표현을 친구들뿐 아니라 웃어른들에게도 일삼는 것에 대해서 ‘권고조치’를 내린 것에 대한 반작용입니다. 소설가 이외수 씨가 같은 날 자신의 트위터에 “대한민국에서는 시간이 거꾸로 흐르고 있다. 이러다 통금도 부활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이를 비판한 것이 기름을 부은 격이 됐습니다.

대다수 여론은 방통심의위의 조치가 지나치다는 것입니다. 이를 유심히 지켜보면 그 비판은 '빵꾸똥꾸'란 표현의 자유를 심의기관이 억압하는 쪽으로 모아집니다. 어른들이 보기에 유치한 표현이라도 존중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비판은 전형적인 논점 변경의 오류입니다. 방통심의위의 권고조치는 ‘빵꾸똥꾸’라는 표현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같은 표현을 버릇없이 윗사람들에게 쓰는 것이 다른 어린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으니 자제해달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상업화된 표현의 자유…일그러진 집단병리현상

어쩌면 이에 대한 정당한 비판은 “철없는 어린이들이 빵꾸똥꾸 식의 표현을 어른들에게 버릇없이 구사하는 경우가 현실에서 흔한데 왜 현실을 왜곡하느냐”가 돼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비판은 이렇게 흐르지 않고 ‘빵꾸똥꾸’란 표현이 무슨 문제냐를 물고 늘어집니다. 현재 한국 사회가 처한 진짜 문제는 이처럼 ‘표현의 자유’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데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MBC ‘지붕 뚫고 하이킥’의 등장인물 초등학생 해리가 자주 쓰는 ‘빵꾸똥꾸’란 표현에 대해 권고조치를 내렸다. 사진출처=MBC


‘표현의 자유’는 한국사회가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 넘어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권위주의 정부 비판세력에게 권력비판의 창끝을 날카롭게 만들어주면서 그로 인한 정치적 탄압의 화살을 막아주는 방패 역할이 돼줬습니다. 문제는 민주화 이후에도 그런 타성에 젖어 이를 성역시한다는 데 있습니다.‘표현의 자유’가 정치적 비판의 자유를 넘어서 상업적 표현의 자유로 변질돼가고 있음에도 말이지요.

예를 들어 요즘 지상파 TV를 보면 앳된 얼굴의 10대 청소년들이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몸짓과 표현을 경쟁적으로 일삼고 있습니다. 연말 가요대상이란 프로그램을 한번 보십시오. 중고생밖에 안 된 청소년들이 학교와 가정에서라면 도저히 펼칠 수 없는 외설적인 내용을 가사와 춤으로 펼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말리는 이들이 없습니다. 오히려 “섹시하다”거나 “멋있다”면서 부추기는 게 대세입니다.

이런 아이돌 스타에 열광하는 것이 10대뿐 아니라 아저씨, 아줌마 세대까지 무차별적으로 확산된 것이야말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태가 이 지경인데 G드래곤이 개인 콘서트에서 외설시비에 휩싸일 만한 퍼포먼스를 펼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 아니겠습니까. 대한민국은 이제 어린 소녀, 소년이 공중파 방송에 나와서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선정적 춤을 추는 것을 보면서 즐기는 집단 관음증에 빠져 있습니다. 이런 증세가 어린이를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페도필리아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자극… 파격… ‘지붕 뚫고 하이킥’을 날리다

이는 과장이 아닙니다. 지상파 방송 오락프로그램에 출연한 어린이들에게 장기자랑 한번 보여 달라면 민망한 ‘섹시 웨이브 춤’을 못 춰서 난리입니다. 어른들은 또 그걸 보고 좋다고 박수치는 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우리나라 초등학생 대부분이 연예인을 목표로 하는 현실을 개탄하기에 앞서 그들이 어떤 현실에 노출돼 있는지를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영이 사건’과 같은 어린이 성폭력사건이 급증하는 것에 분노하면서 왜 그들을 잠재적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집단병리현상에 대해선 침묵하는 것입니까.

여기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우리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빵꾸똥꾸’의 사례에서 보듯 그것이 많은 어린이에게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의견을 표명한 것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권위주의적 ‘꼰대문화’로 비하되기 때문입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표현의 자유’를 성역시하던 민주화시대의 인식을 발전적으로 극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민주화시대 ‘표현의 자유’에는 사람과 사람의 차이를 존중하라는 배려가 숨쉬고 있었습니다. 권위주의 정부 시절 국민 전체를 등질화시키려는 ‘총화단결론’에 맞서 개개인의 개성 발현을 존중하자는 것이지요. 이에 반해 오늘날엔 ‘표현의 자유’를 내세우는 쪽이 오히려 국민을 등질화시키려 합니다. 그 대상이 성인이든 10대든 어린이든 누구나 자신들의 표현을 보고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논리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이를 규제해야한다는 측에선 연령과 시간, 장소, 매체의 파급력을 감안하는 차별화의 논리가 작동합니다.

성관계를 연상케 하는 퍼포먼스로 문제가 된 지드래곤 콘서트의 한 장면. '표현의 자유'가 상업화되면서 사회적으로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선정적인 경향이 갈수록 두드러진다.


두 번째로 과거 ‘표현의 자유’를 위해 싸웠던 분들이 정치적 투쟁에 무게중심을 뒀다면 요즘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는 분들은 상업적 논리에 충실하다는 점을 감안해야 합니다. 이 분들은 시청률, 음반판매, 관객동원을 위해 더 자극적이고 더 파격적 표현을 찾는 한편으로 더 많은 소비자에게 접근하기 위해 ‘표현의 자유’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고 있습니다. 요즘 논란이 된 표현들이 대부분 욕설, 성, 폭력과 관련된 것임을 상기해보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표현의 자유’를 대중문화와 접목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인간은 모방의 동물이라는 점입니다. 자신의 내면을 자연스럽게 표출하는 것은 언제나 존중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불특정 다수에게 무차별적으로 전파되는 것에 대해선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현실에서 욕설이 많이 쓰인다고 이를 여과 없이 담은 영화나 드라마가 흥행에 크게 성공할 경우 예전엔 욕설을 하지 않던 사람들까지 대거 쌍욕을 하는 세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모방의 위험은 눈에 보이는 이런 현상차원에서만 머물지 않습니다. 인간은 단순히 행위만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모방합니다. 즉 내가 무언가를 강렬히 욕망하는 것은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그를 중개하고 부추기는 경쟁적 모방의 대상으로 인해 촉발되기 마련입니다. TV와 인터넷, 휴대전화가 중층으로 결합된 오늘날 같은 복합매체 대중문화시대에 그 모방의 대상은 연예인이 되기 쉽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경쟁적 모방욕망의 대상이 소수로 좁혀질수록 그 욕망은 기하급수적으로 증폭되고 그로 인한 경쟁적 갈등관계는 폭력적 양상으로 발전한다는 점입니다.

어린 아이가 어른에게 '빵꾸똥꾸'라는 말을 쓰며 버릇없이 행동하는 장면을 내보내 문제가 된 MBC '지붕 뚫고 하이킥'. 여론은 방통심의위의 조치에 지나치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이런 비판은 전형적인 논점 변경의 오류다.


▶문화적 서킷 브레이커가 필요한 이유

프랑스 문예평론가이자 문화인류학자인 르네 지라르는 인류역사에서 항상 모방욕망이 격화하면 한 사회의 갈등과 폭력 수위가 절정에 이르게 되고 결국 그 집단 전체의 폭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하는 희생양 메커니즘이 작동해왔다고 고발합니다. 즉 인류의 평화는 모방욕망에서 촉발된 갈등수위를 낮추기 위해 무고한 희생양에게 집단폭력을 행사한 뒤 그 죄책감을 통해 사회적 통합을 이뤄냈다는 것입니다.

이를 한국사회에 적용하면 왜 그렇게 많은 연예인들이 자살로 내몰리는지가 이해가 되실 겁니다. 그들은 무차별적 모방욕망의 노예가 된 한국사회의 희생양입니다. 그런 희생양을 만들지 않기 위해, 더 나아가 한국 사회에서 갈등과 폭력의 악순환 사이클이 점차 빨라지는 현상을 막기 위해서라도 이제는 ‘표현의 자유’를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이를 위해 ‘문화적 서킷 브레이커’를 도입할 것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서킷 브레이커(Circuit Breakers)란 주식시장에서 주가가 갑자기 급락하거나 급등하는 경우 시장에 미치는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주식매매를 일시 정지하는 제도를 말합니다. 원래 이 말은 전기 회로에서 과열된 회로를 차단하는 장치에서 따온 것입니다. 이를 대중문화에 적용해 문화상품이 단기간에 흥행에 크게 성공할 경우 그것이 초래할 모방욕망의 확산을 차단하기 위해 적절한 제어를 가하는 제도를 ‘문화적 서킷 브레이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제도는 문화적 다원성 확보를 위해 특정 문화상품에 대한 욕망이 단기간에 과열될 경우 모방효과의 부작용을 차단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다음과 같은 예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상파 방송 프로그램의 경우 시청률이 30%를 넘어서면 방송광고 숫자를 제한하거나 해당 채널의 공익프로그램 방영비율을 높이거나 방송문화발전기금을 추가 부담시키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영화의 경우 관객이 500만을 넘어설 경우 전국 스크린 숫자를 오히려 단계적으로 줄여나가게 하거나 추가수익 발생분에 대해 영화발전기금을 추가로 회수하는 방식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갈수록 ‘규모의 경제’가 중요해지는 문화산업적 논리에 반하는 조치라고 반대하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하지만 문화산업엔 산업의 논리만 작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화의 논리도 작용합니다. 문화는 다원성을 먹고 자랍니다. 현재 한국문화산업은 승자 독식체제가 강합니다. 요즘 같은 다원화시대에 시청률 40%, 관객 1000만은 문화적 폭력에 가깝습니다. 서킷 브레이커 제도는 그런 야만적 상황을 막으면서 거기서 발생하는 수익을 해당 문화산업에 재투자하는 선순환을 이룬다면 문화산업 전반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더더군다나 그들 문화상품이 장기간에 걸쳐 스테디셀러로 발전한다면 서킷브레이커가 작동할 필요조차 없어질 것입니다.

르네 지라르가 ‘문화의 기원’이란 저서에서 현대사회가 처한 위기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인용하면서 글을 마치겠습니다. 문화산업의 논리에 따른 ‘표현의 자유’가 어떻게 ‘나영이 사건’과 연결되고 수많은 연예인의 자살행렬과 연결되는지 한번 진지하게 음미해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이제 우리의 새로운 세상은 희생양이라는 거짓과 거기에서 나오는 희생제의가 더 이상 공동체를 화해시키지 못하는, 다시 말해 희생양이라는 거짓말이 통하지 않는 최초의 세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세상은 희생제의를 통한 보호책이 없는, 그래서 지금까지 보호책으로 막아놓고 있던 폭력의 둑을 손수 허물어버림으로써 자멸의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최초의 세상, 한마디로 묵시록적인 세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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