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 그때 이런 일이] ‘대마초파동’ 137명 연예인 줄줄이 덜미…누구?

입력 2010-12-06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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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계 ‘대마초 파동’|② 대마초 연예인 79년 활동 재개
1975년 말부터 1976년까지 대대적인 대마초 단속으로 137명의 연예인들이 활동을 규제받았다. 이들은 방송은 물론 일반 업소무대에도 서지 못해 다른 생계수단을 찾아나섰다. 무대에 설 수 없다는 것은 연예인에게는 ‘사회적 사형선고’였다. 코미디언 이상한처럼 그 충격으로 이민을 떠난 사람도 있었다.

활동 규제 해제 움직임은 그로부터 3년 뒤 시작됐다. 동료 연예인들은 문화공보부 등 당국에 ‘대마초 연예인’에 대한 활동 규제 해제를 탄원했다. 해당 연예인들은 군부대와 교도소, 불우이웃 돕기 자선무대 등을 열며 ‘자숙’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 결과 1978년 2월부터 방송을 제외한 야간업소 등 일반 무대 활동이 제한적으로 허용됐다.

1978년 12월27일 김대중, 시인 김지하 등 이른바 긴급조치 위반자 106명을 포함, 모두 5378명에 대한 대사면이 단행했지만 대마초 연예인들은 여전히 예외였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각계의 탄원도 끊이지 않았다.

1979년 오늘, 마침내 활동 규제가 전면 해제됐다. 한국연예협회 등은 3일 전, 문화공보부의 통보에 따라 137명 가운데 실형을 선고받은 14명의 무명 연예인을 제외하고 이날부터 활동을 전면 허용했다. 이들의 발이 묶였던 4년 사이에 가요계를 비롯한 연예계의 분위기는 바뀌어 있었다. 1970년대 초반 이후 청년문화를 상징하며 인기를 누렸던 이들은 더 이상 대중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다.

1970년대에 들어 권력의 대중문화, 특히 ‘퇴폐’와 ‘저속’ ‘무분별한 외래문화 추종’ 등의 이유를 내걸은 대중가요에 대한 탄압이 계속됐다. 이들은 트로트가 장악했던 가요계에서 미국식 팝과 포크의 영향을 강하게 받긴 했지만, 통기타로 상징되는 청년문화의 최전선을 형성하며 젊은층의 지지를 받았다. 젊은이들은 정치적 억압 속에서 분출구를 찾을 수 없었고 그런 그들의 감성에 좀 더 자유롭고, 좀 더 다양한 음악적 기운이야말로 자유에 대한 열망을 키워주는 정서적 자양분이 되었다.

정권의 눈에 이 같은 자양분은 뿌리 뽑아야 하는 가시였다. “국민총화”라는 허울로 독재에 맞서지 못하게 하고 비판의 싹을 제거하고 싶었던 권력의 시선에서 이들 연예인들은 그저 ‘불온과 퇴폐의 온상’에 불과했다. 대마초 파동은 그 싹을 자를 수 있는 최적의 계기였다.

4년이라는 긴 시간, 노래할 수도, 연기할 수도, 대중에게 다가갈 수도 없었던 사람들. 그들의 ‘불법적 행위’는 비판받아 마땅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추방과 단속의 밑바닥에 권력의 ‘불온한 시각’이 전제되어 있었다.

이들에게 새겨진 ‘주홍글씨’는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았다. 지금도 이들의 이름은 안타까운 대중문화사의 한 페이지에 또렷하게 기록되어 있다.

윤여수 기자 tadada@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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