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 그때 이런 일이] ‘1·4 후퇴’ 아픔 서린 현인의 ‘굳세어라…’

입력 2011-01-04 07:00:00
카카오톡 공유하기
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1951년 오늘, 정부는 서울을 다시 북한군과 중국군에게 내주었다. 12월 말부터 시작된 북한군과 중국군의 총공격은 한때 압록강 물을 마시자며 진격해가던 국군을 밀쳐내려왔다. 마침내 그 해 1월4일 정부는 부산을 향해 후퇴를 시작했다.

전쟁의 참혹한 포화와 함께 몰아치는 혹한은 목숨을 건 수십만의 피난민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생사를 넘나드는 피난길에서 자식과 부모, 형제와 오누이는 헤어졌고 부부는 생이별의 아픔을 감내해야 했다.

그 속에 저 아득해 보이는 흥남부두를 떠나온 금순이의 오빠도 있었다. 오빠는 ‘눈보라가 휘날리는/바람찬 흥남부두에’서 금순이를 ‘목을 놓아 불러봤다/찾아를봤다’. 금순이는 ‘어데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을 것이다. 오빠는 ‘피눈물을 흘리면서 1·4 이후’ 홀로 남으로, 남으로 꾸역꾸역 향했다. 그렇게 흘러들어간 곳이 바로 부산 국제시장이었다. 일제 강점기 이후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물건들을 내다팔던 이 곳은 어느새 피난민들의 가슴 아픈 정착지가 됐다.

‘일가친척 없는 몸’ 금순이를 찾아 헤매며 먹고 살 길을 찾은 오빠는 ‘국제시장 장사치’가 되어 억척스런 현실을 뚫어내야 했다. 가슴 한 켠에 채 잊지 못한 누이동생 금순이를 담아두고 ‘보고 싶구나/고향 꿈도 그리워진다/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며 울음을 삼켰다.

가수 현인이 1951년 8월 자신의 피난길이었던 대구의 오리엔트 레코드를 통해 내놓은 노래 ‘굳세어라 금순아’. 현인은 전란을 피해 흥남항을 등에 지고 남으로 향한 수십만의 피난민, 그들이 감당해야 했던 무너지는 이산의 슬픔, 그 속에서도 힘겨운 현실을 살아낼 수밖에 없는 또 다른 고통스러움을 노래했다.

노래는 그들의 가슴에 젖어들었고 이미 해방 직후 특유의 바이브레이션과 훤칠한 외모로 톱가수의 반열에 올랐던 현인도 그들과 아픔을 함께 했다.

경성제2고보 출신인 현인은 1935년 일본 우에노대 성악과에 입학했지만 중퇴하고 귀국한 뒤 다시 중국으로 향했다. 징용을 피하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중국 상하이에서 악단을 만들어 활동하기도 한 그는 1946년 해방 직후 제16차 송환선을 타고 귀국했다. 이후 ‘베사메 무초’ 등을 개사해 부르며 큰 인기를 모았다. 그리고 작곡가 박시춘을 만나 ‘신라의 달밤’을 대히트시켰다. 그는 ‘고향만리’, ‘서울야곡’ 등 히트곡을 잇따라 내놓았고 당대 최고의 톱가수가 되었다.

‘굳세어라 금순아’는 한때 가사의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승달만 외로이 떴다’는 내용이 ‘소련의 국기를 말하는 게 아니냐’는 엉뚱한 오해를 받아 금지곡으로 묶였다는 후문도 있다. 1962년 배우 최무룡, 구봉서, 이대엽 등이 주연한 영화로도 만들어진 ‘굳세어라 금순아’. 그 아픔은 언제쯤 가실 것인가.

윤여수 기자 tadada@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뉴스스탠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