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지적장애인이 성관계 거부 안했어도 항거불능 상태” 인정

입력 2011-10-26 0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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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3급장애 15세 여학생 강간혐의 男2명 유죄 판결
“정신 장애로 저항 곤란”… 장애인 대상 성범죄 엄벌 의지

지적장애인에 대한 성폭행 사건에서 항거불능 상태를 폭넓게 인정하는 판결이 나왔다. 영화 ‘도가니’의 소재가 된 광주 인화학교 청각장애아 성폭행 사건에서 재판부가 장애아의 항거불능 상태를 인정하지 않아 무죄판결을 내렸던 것과 대비된다. 이번 판결은 법원이 장애아의 신체적·정신적 특성을 적극적으로 고려해 장애아에 대한 성범죄에 좀 더 엄중한 판단을 내리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9부(부장판사 배준현)는 인터넷 채팅을 통해 만난 3급 지적장애인 김모 양(15)을 성폭행한 혐의(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상 장애인에 대한 준강간)로 기소된 정모 씨(27)와 박모 씨(23)에게 “항거불능 상태를 이용해 성폭행한 점이 인정된다”며 징역 2년과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고 25일 밝혔다.

지능지수(IQ) 45로 사회연령 10.1세인 김 양은 인터넷 채팅을 통해 만난 여러 남자들과 특별한 거부 의사를 표시하지 않은 채 성관계를 가졌다. 박 씨는 올해 3월 가출한 김 양을 불러내 서울 금천구 가산동의 한 빌딩 남자화장실에서 성관계를 가졌다. 같은 날 밤 정 씨는 김 양을 경기 안양시 만안구의 한 모텔로 데리고 가 성관계를 갖고 이튿날 함께 지하철을 타고 가다 신도림역 부근에서 헤어졌다. 정 씨 측은 “김 양과 성관계 당시 정신장애로 인한 항거불능 상태에 있지 않았다”며 “인터넷 채팅을 할 때도 지적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정 씨 등은 김 양이 정신 장애로 인해 성관계를 거부하거나 저항하는 것이 현저히 곤란한 상태를 이용해 성폭행한 점이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김 양이 성관계를 요구받을 때 ‘하지 마, 싫어요’ 정도는 표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성적 요구를 받았을 때 느끼는 불안감과 스트레스를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점에서 기초적인 성에 대한 인식과 관념이 희박한 상태”라며 “이를 이용해 성관계를 가진 사실이 인정된다”고 설명했다.

이번 판결은 도가니 사건 당시 판결에서 법원이 보인 항거불능에 대한 판단 태도와 극명히 대비된다. 2008년 1월 도가니 사건 1심 판결 당시 광주지법 형사10부(부장판사 김태병)는 청각장애 2급 장애자로 말할 능력은 안 되고 간단한 수화로 의사를 표현할 수밖에 없던 신체장애인 박모 양(당시 13세)에 대한 성폭행 혐의를 판단하면서 “박 양이 항거불능 상태에 있었다고 볼 수 없다”며 공소사실 일부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 박 양은 화장실 안에서 김모 씨가 바지 지퍼를 내리려고 하자 싫은 표정을 지으며 수화로 “싫다”라고 말했다. 또 몸을 비틀어 저항하며 김 씨를 뿌리치고 화장실 밖으로 뛰쳐 나온 점 등을 인정하면서도 “반항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한 상태였다고 볼 수 없다”며 항거불능 상태를 인정하지 않았다.

법원 관계자는 “이번 판결은 단순히 저항할 수 있었느냐 문제에서 항거불능 상태를 판단한 것이 아니라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기 힘든 지적장애인의 상태를 항거불능 상태로 판단한 것”이라며 “지적장애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적극적으로 보호해준 판결”이라고 분석했다.

장관석 기자 jks@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신민기 기자 minki@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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