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광기의 중년여성 환상을 토해내다

입력 2011-11-22 0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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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명의 밴드와 6명의 배우들, 록-컨트리-재즈 넘나들며 역동적인 무대 펼쳐
◇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 ★★★★☆

과거의 상실감에서 벗어나지 못해 환상 속에 사는 엄마(박칼린)와 “평범함 같은 것은 안 바라. 그 주변 어디만 돼도 견딜게”라는 딸의 이중 트랙을 통해 현대 여성의 무의식을 파고 든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 뮤지컬 해븐 제공

정신병에 걸린 주인공을 다뤘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연극 ‘에쿠우스’와 ‘신의 아그네스’의 계보를 잇는다. ‘에쿠우스’가 순수한 사춘기 소년, ‘신의 아그네스’가 순진무구한 처녀의 광기를 탐험했다면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브라이언 요키 작, 톰 킷 작곡)은 그런 아들과 딸을 둔 중산층 중년여성의 광기를 파고든다. 세상 풍파에 물든 아줌마의 정신세계가 소년 소녀의 정신세계보다 더 녹록하지 않은 법. 이를 연극도 아닌 뮤지컬로 소화해냈다는 것이 ‘평범함의 언저리’라는 제목을 지닌 이 작품의 비범함이다.

여주인공 다이애나의 가정은 겉보기엔 완벽하다. 헌신적인 건축설계사 남편 댄(남경주, 이정열)과 잘생기고 유머러스한 열여덟 아들 게이브(최재림, 한지상), 똑똑하고 야무진 열여섯 딸 나탈리(오소연). 문제는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다이애나가 철저히 무능한 존재라는 점이다. 그는 16년째 조울증과 과대망상증에 시달리는 여자다.

그래서 다이애나의 가정은 속으로 골병이 들었다. 남편은 호전됐다가 악화되기를 반복하는 아내의 병 때문에 지쳤고 외롭다. 딸은 정신병 치료를 위해 약쟁이가 된 엄마로 인해 애정결핍에 시달리다보니 욕설을 입에 달고 다니는 욕쟁이가 됐다. 오직 아들만이 엄마를 이해해주고 달래줄 줄도 아는 든든한 버팀목이다.

그러나 바로 거기에 함정이 숨어 있다. 지옥 같은 현실을 견디게 해주는 그 무엇은 환상이기 쉽다. 하지만 그 환상을 제거해버리는 순간 현실 전체가 무너져 내릴 수 있다. 그것이 다이애나가 봉착한 문제의 본질이다. 그가 겉으로나마 완벽한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억지로 먹어야 하는 약물은 반대로 현실을 이겨내기 위해 너무도 필요한 그 환상의 배설물이다. 환상에 취해 사는 한 약물은 필수불가결하다.

이 뮤지컬의 비범함은 환상의 그 대칭적 이중구조를 꿰뚫고 있다는 점이다. 1막이 그 환상의 달콤한 약효를 보여준다면 2막은 그 부산물로서 약물과 전기충격치료(ECT)의 쓰디쓴 후유증을 보여준다. 1막에서 표면적 갈등구조를 보여주는 주요 테마곡이 2막에선 그 갈등 아래 숨은 심층구조를 드러내주는 곡으로 변주된다.

주요 장면과 음악도 이렇게 겹겹이 구조화돼 있다. 다이애나를 중심으로 때론 남편과 아들, 때론 남편과 정신과 의사(최수형), 때론 아들과 딸의 겹겹의 대칭구조가 펼쳐진다. 엄마 아빠의 쓰라린 옛사랑도 딸 나탈리와 그 남자친구 헨리(이상민)의 가슴 시린 풋사랑과 대위법적으로 전개된다. 그래서 독창으로 시작한 노래는 이중창, 삼중창, 사중창, 육중창으로 확산된다.

높이 6.8m, 폭 17m, 깊이 4.3m의 철골구조물로 이뤄진 ‘넥스트 투 노멀’의 무대에 피라미드 대형으로 서서 노래를 부르는 6명의 배우들. 뮤지컬 해븐 제공

이를 통해 다이애나 가족의 문제는 미국 중산층의 보편적 문제로 공감대를 넓혀간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상실감과 죄의식을 감춘 채 남들처럼 살아가려 애쓰지만 그럴수록 서로에게 더 깊은 상처만 안겨주고 마는 사람들. 그렇게 미국 중산층 가정의 치유될 수 없는 상실감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로버트 레드퍼드가 감독한 영화 ‘보통사람들’(1980년)의 진정한 계승자다.

하지만 다이애나는 미국 중산층 여성만 대변하지 않는다. 진짜 현실은 외면한 채 드라마와 영화 속 ‘환상 속 그대’에만 취해 사는 이 땅의 수많은 여성들의 모습도 그에게 투영된다. 현빈과 원빈을 놓고 누가 더 좋다고 논하는 그들과, 프로작과 바륨 같은 신경안정제 중 하나를 고르는 다이애나와 무슨 차이가 있을까.

감사하게도 뮤지컬은 한국의 드라마와 달리 뻔한 해피 엔딩으로 달려가지 않는다. 다이애나는 약을 쓰레기통 속에 처박으면서 환상과 싸우기 위해 홀로서기를 할 줄 아는 용기를 지녔다.

작품은 또한 우울하지도 않다. 자기연민의 거품을 빼고 주인공들이 스스로를 풍자할 줄 아는 어른스러움을 갖췄기 때문이다. 록과 컨트리, 재즈를 넘나드는 강렬한 비트의 음악과 3층 높이(6.8m)에 960개의 조명을 장착한 독특한 철골구조물 무대도 현대적 감각을 물씬 풍긴다. 열두 개 공간으로 분할된 이 무대에 곳곳에 배치된 7명의 밴드와 6명의 배우가 유기적으로 빚어낸 역동성과 입체성은 이 작품의 비장의 무기다.

다이애나 역으로 처음 뮤지컬 주역에 데뷔한 박칼린 씨는 정확한 발성과 여유 넘치는 연기로 일반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같은 역을 맡은 일본 뮤지컬 전문극단 시키 출신의 베테랑 김지현 씨에게 결코 밀리지 않았다. 김지현의 다이애나가 가녀린 느낌이 강하다면 박칼린의 다이애나는 더 주체적인 여성으로 다가섰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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