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만의 ‘자전거 식객’] 서귀포 전복설렁탕 혀가 웃고 눈이 웃네

입력 2011-12-20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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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력도 좋지만 특히 중저음 보이스가 매력적인 배우 오광록이 허영만 화백에게 특유의 중후한 목소리로 자신이 지은 시를 낭송해주고 있다.

17. 제주도2

■ 서귀포 전복설렁탕 & 표선 멸치국



서귀포서 찾아낸 맛집 전복설렁탕
“아! 허 선생님 아니십니까?”
‘오광록 패거리’가 먼저 알아보고 인사

시 읊고, 북 치고, 춤사위 덩실덩실
예술인들 아지트서 점심시간 즉석공연

바닷가인 모슬포에서 안전한 야영지를 찾는 것은 어려웠다. 강한 바람을 피할 곳이 없어 텐트를 설치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어찌어찌 텐트를 쳤다 해도 밤새 붙잡고 있지 않는 다음에야 바람에 짜부라질 것이 뻔했다. 하는 수 없이 현지 주민 백문기 씨의 안내로 모슬포의 윗마을 무릉리로 올라가기로 한다. 바람 많은 제주인지라 농사를 짓는 마을에는 예외 없이 방풍림이 있기 때문이다. 한밤중에, 처음부터 끝까지 오르막인 15km 거리를, 그것도 맞바람을 뚫고 허우적대듯 페달링을 한 지 1시간 10분 만에 무릉리에 도착했다. 뜬금없는 저녁 운동으로 기진맥진해진 탓에 모두들 침낭에 몸을 밀어 넣자마자 코를 골며 쓰러졌다.

무릉리의 아침은 청아한 산새 소리로 깨어났다. 이 날은 마침 무릉리의 마을 축제. 제주 올레길이 지나는 무릉리는 마늘 농사를 주로 짓는데 마늘 수확이 끝나고 한가해지는 이즈음 마을 잔치를 여는 것이다. 잔치가 벌어진 초등학교 운동장엔 부녀회원들이 국수를 삶아 건져 헹궈내고, 국물을 끓이느라 분주하다. 오늘 하루 이곳을 지날 올레꾼들은 푸근한 인심으로 양념을 한 잔치국수를 맛보게 될 것이었다.


● 전복설렁탕집서 만난 오광록…그 신명나는 자리

잔치국수로 아침을 얻어먹은 뒤 자전거 나그네들은 또 다시 길을 떠난다. 산방산을 돌아 화순으로 진입하는데 이 구간은 해안도로가 자주 막혀있어 몇 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1132번 일주도로를 택해 달렸다.

관광지로 유명한 중문도 자전거를 타고 해안을 따라 달릴 수가 없게 되어있다. 올레길이 있지만 올레길은 도보여행코스로서 자전거는 통행금지. 자전거를 타고 2000여km를 달리다보니 우리 사회에 알게 모르게 자전거에 대한 차별이 아직은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곤 한다.

아침으로 먹은 잔치국수의 열량이 바닥나 허기가 느껴질 무렵, 서귀포 부근에서 군침이 도는 간판을 발견했다. 차가운 칼바람에 오한이 날 지경인 멤버들은 이심전심 식당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뽀얀 설렁탕 국물에 전복이 얹혀있고 그 위로 파가 웃기로 올라있는 전복설렁탕은 보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아! 허 선생님 아니십니까?”

한창 식사 중에 저음의 굵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뜻밖에도 영화배우 오광록. 알고 보니 이 전복설렁탕집은 오광록 뿐 아니라 현대 무용가, 화가, 연주자 등 예술인들의 일종의 아지트였다. 오광록 패거리들은 자리를 새로 마련해 우리를 초대했는데 이야기를 나누다 흥이 돋자 즉석 공연을 펼쳤다.

오광록은 눈을 지그시 감고 자작시(그는 시집을 낸 시인이기도 하다)를 낭송했고 그밖에도 춤을 추는 사람, 북을 치는 사람, 직접 작사 작곡한 노래를 불러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마치 엉성한 사당패의 공연을 보는 듯 기묘하고 정다운, 인간미 물씬 풍기는 저들의 공연에는 심장을 뛰게 하는 힘과 가슴을 울리는 감동이 있었다.

1. 허화백과 홍석민이 행복한 표정으로 전복을 들어보이고 있다.
2. 전국일주 시작 후 통틀어 10번째 펑크. 이제 수리에도 이골이 났다.
3. 표선 야영지로 찾아온 제주 산악인들과의 저녁 식사.
4.서귀포 토평동 삼거리의 한 켠에 자리잡은 오희준 추모비



제주 산악인 오희준 추모비 이르자
유명 달리한 박영석 일행 떠올라 뭉클
악우들과 술잔 기울이며 추억 곱씹어

다음날 아침 숙취 날릴 겸 간편 멸치국수
아니 이 깊은 국물 맛!…2500원이 맞아?

● 박영석 대장 추모라이딩 된 제주여행


오광록 사당패와 아쉬운 이별 후 다시 길을 나서 서귀포 오희준의 추모비를 찾았다. 오희준은 2007년 박영석 대장이 이끈 에베레스트 남서벽 원정대에 참가했다가 이현조와 함께 눈사태에 휩쓸려 안타깝게도 유명을 달리했다.

지금 오희준의 추모비 앞에 선 우리들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무겁다. 박영석 대장이 신동민 강기석 두 대원들과 함께 안나푸르나 남벽에 도전했다가 연락이 두절된 지 한달을 훌쩍 넘겨 이미 영결식까지 치른 상태였기 때문이다. 박영석 대장과 절친한 허영만 화백은 실종 소식을 접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안나푸르나 현지로 날아가기도 했지만, 거대한 자연의 위력 앞에서 한낱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사실 이번 제주 라이딩은 시작부터 박영석 추모라이딩이 될 것이 예상됐다. 제주대 산악부 출신인 오희준과 박영석 대장의 관계에서 비롯된 인연으로 제주도 산악인들이 박대장의 원정등반길에 동행한 경우가 많아 이래저래 인연의 날실과 씨실이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이날 저녁 야영지인 표선으로 제주도 산악인들이 저마다 먹을 것을 챙겨 우르르 몰려왔다. 우리가 제주도에 도착했을 때부터 지근거리에서 물심양면으로 서포트를 해준 이종량 선배(동국대 산악부 출신으로 박영석의 직계 선배다)는 물론 종범이는 낚시로 직접 잡은 한치를, 용수는 돼지고기를 가져왔고, 창백이는 요리를 했다. 박영석 수색대로 참가했던 강성규는 귤을 한보따리 들고 왔다.(그는 귤농사를 짓고 있다)

귤밭 옆에 모닥불을 피우고 떠나버린 악우(岳友)들을 기리며 소주를 마시는데 허화백의 지시에 따라 따로 석 잔의 술을 받아놓았다. 각각 박영석, 신동민, 강기석의 잔.

지난해 9월 강화도에서 자전거 전국일주를 시작한 이래 우리 팀은 음주와는 거리가 극도로 멀었다. 그것은 대장을 비롯해 멤버 대부분이 폭음을 버거워하는 체질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안전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번만은 예외다. 오희준, 박영석과의 추억을 곱씹으며 우리는 제법 많은 술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

표선 해변 인근의 춘자네 멸치국수. 숙취를 말끔히 날려버리는 깨끗하고 깊은 국물맛에서 30여 년 한 자리에서 국수를 팔아 온 내공을 엿볼 수 있었다. 허영만 화백(왼쪽)과 이진원(가운데)이 국수를 맛보고 있다.



● 표선 해변서 먹은 멸치국수, 30년 내공 깊은 맛

다음날 아침, 공기가 깨끗한 곳이어선지 간밤의 음주량에 비해 숙취의 흔적도 없이 상쾌하다. 덕분에 늦잠도 자지 않고 예정대로 일어나 제주도 일주 마지막 구간 라이딩에 나섰다.

아침식사를 위해 들른 곳은 표선해변 부근의 춘자네 멸치국수. 냄비에 가득 담아주는 멸치국수 값이 놀랍게도 보통이 2500원, 곱빼기가 3500원에 불과하다. 싼 게 비지떡일 수 있어 경계심을 갖고 국수를 한 젓가락 먹고 국물을 마셔보니, 이 가게가 이 자리에서만 30여 년 동안 변함없이 국수를 팔 수 있었던 저력이 엿보인다.

어제 아침을 모슬포 무릉리에서 국수로 먹었으니 이틀 연속으로 아침식사를 국수로 하는 셈인데도 전혀 거부감이 없는 깊은 맛이다. 성산, 김녕, 월정리, 함덕을 거쳐 제주시까지 56km는 만만한 거리여서 가벼웠다.

글·사진|송철웅 아웃도어 칼럼니스트 timbersmit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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