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환 부모 “돌부처요? 집에서는 애교덩어리”

입력 2014-01-01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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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프로야구 한신의 새 마무리투수로 새롭게 출발하는 ‘돌부처’ 오승환이 지난해 12월 모교인 경기고에서 야구 후배들을 위한 재능기부 행사를 연 뒤 아버지 오병옥 씨(오른쪽), 어머니 김형덕 씨(왼쪽)와 함께 새해 희망을 담은 포즈를 취했다. 이날 경기고는 눈으로 덮였다. 아들의 미래도 눈처럼 새하얗기를 부모는 간절히 바라고 있다. 박화용 기자 inphoto@donga.com 트위터 @seven7sola

■ 부모가 말하는 막내아들 오승환


엄마 앞에선 아직 ‘애기’…

안 떨린대요, ‘이겨야지’ 그 생각밖에 안 한대요
태몽은 저수지서 큰 흰색 잉어 끌어안고 나온 꿈
딸이었으면 해서 초등생
전까지 치마 입혀 키워

아버지 꾸중으로 탄생한 ‘돌부처’…

중학생 때 크게 혼난 뒤 마운드서 웃지 않더라
‘돌부처’ 별명 맘에 들어 달마대사 그림 걸어놔
안쓰러울 정도로 훈련…내 아들이지만 참 독해


새하얀 눈이 세상을 뒤덮은 2013년 12월 16일 오후 경기고 교정. 오승환(32·한신)은 모교인 도신초등학교와 경기고 후배들을 대상으로 재능기부 프로그램 ‘드림캠프’를 열었다. ‘제2의 오승환’을 꿈꾸는 후배들은 슈퍼스타의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였다. 부모님은 먼발치서 이런 아들을 흐뭇한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참, 여기 추억이 많은 곳이에요. 승환이만 아니라 승환이 엄마도, 나도…. 좋은 추억도 있지만, 잊지 못할 아픈 기억도 새겨져 있는 곳이죠. 그래도 우리 승환이가 힘든 시기를 꿋꿋하게 이겨내고 이렇게 커줘서 고마울 뿐이에요.”

오승환은 새해 일본프로야구 한신 유니폼을 입고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계약금 2억엔, 연봉 3억엔, 연간 인센티브 5000만엔 등 최대 9억엔(약 90억원)의 조건으로 한신에 입단했다. 역대 한국선수 중 최고 대우를 받고 대한해협을 건넌 그는 이제 ‘아시아의 끝판대장’이 되기 위해 갑오년 새로운 출발선상에 선다.

‘돌부처’를 낳아 기른 부모는 어떤 이들일까. 또 부모에게 오승환은 어떤 아들일까. 오승환의 아버지 오병옥(63) 씨와 어머니 김형덕(59) 씨를 만나 ‘인간 오승환’과 ‘야구선수 오승환’의 얘기를 들어봤다.

어머니는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오승환을 여자아이처럼 키웠지만, 남다른 승부욕을 숨기지는 못했다. 사진은 ‘단발머리’ 오승환이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다. 어릴 때부터 무대만 차려지면 ‘자원 등판’해 마이크를 잡았다. 사진제공|오승환



● 돌부처

무표정. 오승환을 대변하는 말이다. 그래서 별명도 ‘돌부처’다. 일본 언론도 벌써부터 ‘돌부처(石佛)’라는 별명을 소개하며 그의 ‘포커페이스’를 화제로 삼고 있다.

집에선 어떨까. ‘돌부처’라는 얘기가 나오자 어머니는 웃음부터 터뜨린다. “저도 한번은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마운드에 올라가면 안 떨리냐고. 하도 표정 변화가 없으니까. 그랬더니 안 떨린다고 하더라고요. 그냥 속으로 ‘이겨야지’, 그 생각밖에 안 한대요. 마운드 위에서만 돌부처지, 집에선 잘 웃어요. 얘기도 잘 하고, 엄마한테 애교 잘 부리는 막내아들이죠. 지금도 엄마 앞에선 애기예요.” 어머니에게는 3형제 중 막내아들로만 보이는 모양이다.

아버지는 아들이 마운드 위에서 ‘돌부처’가 된 사연을 털어놓았다. “중학교 때 저한테 한번 크게 혼났어요. 저는 야구선수가 그라운드에서 웃고, 까불고, 그런 거 보기 싫더라고요. 아들이 경기 중에 웃는 모습을 보고 경기가 끝난 뒤에 혼냈더니, 그 뒤로는 마운드에서 웃지 않더군요.”

부모님은 아들의 별명이 마음에 든단다. 원래 교회도, 절도 다니지 않는 무신론자였지만, 아들이 ‘돌부처’로 불리기 시작하면서 집에 달마대사 그림도 걸어놓았다.

1. 오승환은 서울 도신초등학교 5학년 11월에 야구를 시작했지만 단숨에 에이스 자리를 꿰찼다. 6학년이던 1994년 제24회 회장기쟁탈전국국민학교야구대회 서울시 예선에서 역투하고 있다. 2. 초등학교 운동회 모습. 오승환은 달리기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다. 멀리던지기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며 야구선수가 됐다. 삼성 시절에도 오승환은 팀 내서 가장 빠른 선수였다. 3. 부모님은 집에 두 형이 있었기에 막내아들은 여자아이처럼 키우려고 했다. 그러나 오승환(왼쪽 2번째)은 어렸을 적부터 장난꾸러기에 골목대장이었다. 4. 경기고 시절 이동현(왼쪽·현 LG)은 에이스로 활약했지만, 오승환은 팔꿈치 부상으로 1번타자 겸 우익수로 뛰면서 2000년 황금사자기 우승을 합작했다. 그러나 ‘야수 오승환’은 프로의 지명을 받지 못했다. 5. 단국대 시절 피나는 재활훈련에 매달리면서 ‘몸짱’이 됐다. 트레이드마크인 ‘돌직구’는 훈련으로 다져진 몸에서 뿜어져 나온다. 현재의 몸은 이보다 훨씬 더 탄탄하다. 미소조차 흘리지 않는 ‘돌부처’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사진제공|오승환



동네 형한테 맞고 오면 꼭 복수…어릴 때부터 ‘끝판대장’


● 승부욕

오승환의 어린 시절이 궁금했다. 어머니의 얘기를 들어보니, 태몽부터 범상치 않았다. “형 둘은 별 다른 태몽을 꾸지 않았는데, 승환이는 생생해요. 집 옆에 저수지가 있었는데, 제가 큰 잉어를 끌어안고 나왔어요. 하얀색, 무지하게 컸어요. 승환이는 태어날 때부터 통뼈더라고요. 어릴 때부터 팔뚝에 근육도 있고, 제가 허벅지가 굵고 힘이 센데 저를 닮았나 봐요.”

하얀색 큰 잉어는 훗날 한국프로야구를 지배하는 마무리투수로 성장했다. 지금은 자랑스러운 아들이지만, 오승환이 태어났을 때 부모님은 실망했다고 한다. 위로 아들이 둘 있었기에 내심 딸을 원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막내아들을 딸처럼 키웠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는 치마를 입혀 키웠어요. 머리도 땋고, 유치원 때는 여자애처럼 단발머리를 하고…. 그런데 치마를 입혔지만, 사내 기질은 어쩔 수 없었나 봐요. 개구쟁이였어요. 동네 나가서 싸움도 많이 하고….”

어릴 때부터 ‘끝판대장’이었다.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었다. “대장 노릇은 다하고 다녔어요. 어쩌다 동네 형한테 맞고 오면 분이 풀리지 않는지 다시 집을 나갔어요. 복수하려고 저녁까지 그 집 앞에서 기다리고…. 형들은 순했는데 승환이는 어릴 때부터 승부욕이 남달랐던 것 같아요. 막내지만 어릴 때부터 우는 것을 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 두각

야구를 시작한 때는 초등학교 5학년 11월. 다소 늦은 시기에 야구에 입문했다. 오승환은 서울 신길동 대영초등학교에서 달리기를 하면 도맡아 1등을 하고, 멀리던지기에서도 괴력을 발휘했다.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야구부가 있는 도신초등학교로 전학했다. 야구를 시작하자마자 두각을 나타냈다. 투수로, 포수로, 내야수로, 외야수로, 어디를 맡겨도 척척 해냈다. 그러나 탄탄대로만 걸어온 것은 아니었다. 숱한 고비가 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매를 맞고 들어오는 운동부 생활에 놀라 아들에게 야구를 그만두라고 했다. 당시 오승환은 “프로선수들도 매 맞는대. 매 맞아도 상관없어”라며 야구를 계속하겠다고 우겼다고 한다.


● 눈물

우신중에 이어 한서고로 진학했다. 그런데 1학년 때 선수들이 단체로 숙소를 이탈해 도망을 간 사건이 발생했다.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 선배들이 ‘다 가자’고 하니까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더라고요. 그런데 얼마 못 가서 공주인가, 부여인가 거기서 붙잡혀 돌아왔어요. 그때 함께 도망간 동기로 채병용(SK)도 있었죠.” 아버지는 웃음을 지었다.

오승환은 2학년 때 경기고로 전학했다. 이듬해 개교 100주년을 맞는 경기고가 첫 우승을 위해 대대적으로 스카우트 작업을 벌일 때였다. 그런데 2학년 겨울, 동계훈련을 하면서 오승환은 팔꿈치 통증을 호소했다. 1번타자와 외야수를 맡았지만, 결국 프로 지명을 받지 못했다.

아버지는 당시를 회상하며 하늘을 쳐다봤다. 어머니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단국대 1학년 때 팔꿈치 인대접합수술을 하고 2년 동안 재활훈련만 하고 있으니까, 학교에서 코치를 통해 ‘이젠 야구선수로 가망 없으니까 일반학생으로 다녀라’고 했어요. 절망적이었죠. 학교 입장은 이해했어요. 운동선수 한 명 키우려면 숙소에서 재워주고 먹여주는 데만 1년에 5000만원씩은 든다고 하니까. 그래서 제가 야구부가 있는 천안캠퍼스까지 가서 울면서 매달렸어요. 4학년 때 승환이가 잘 던져서 우승하니까 나중에 코치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승환이 야구 그만뒀으면 어쩔 뻔했냐’고, ‘부모님 뵐 낯이 없다’고.”


● 감사

삼성 입단 이후 승승장구하던 아들은 2009년 어깨 부상으로 다시 한번 선수생명의 기로에 섰다. 그러나 아들은 대학 시절처럼 내색하지 않고 홀로 피나는 재활훈련에 매달렸다.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리다. “열심히 했어요. 내가 봐도 안타까울 정도로…. 스포츠센터에서 재활도 하고, 집에 와서도 계속 고무줄 잡아당기고…. 내 아들이지만 참 독한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아들은 한국 최고의 마무리투수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최고 대우로 일본에 진출했다. 부모는 모든 것이 감사할 따름이다. “삼성에서 보내주지 않았으면 일본에도 못 가는 거였잖아요. 사장님과 단장님께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야 하지만, 감사드린다는 말씀 꼭 전하고 싶네요. 승환이를 사랑해주신 팬들에게도 감사하고요. 한신도 최고 대우를 해줘 감사하고요.”

부모 입장에서 결혼하지 않은 막내아들이 낯선 일본에서 생활하는 게 마음에 걸린다. 한국에 있으면 마음 편히 운동할 수 있음에도 어려운 도전을 시작한 아들이 안쓰럽기도 하다. “비행기를 타면 오사카까지 1시간40분 정도 걸리니까 대구보다 빨리 갈 수 있잖아요. 엄마가 자주 왔다 갔다 해야죠. 한신에서 제공한 집도 괜찮나 보더라고요. 엄마가 오사카에 와보면 집도 마음에 들 거라고 하고…. 승환이가 잘 해야죠. 자신이 어떤 활약을 하느냐에 따라 한국야구 수준도 얘기될 수 있잖아요. 본인도 부담이 있을 텐데, 잘 하겠죠. 이젠 우리도 부모로서가 아니라 팬으로서 ‘야구선수 오승환’을 응원하겠습니다.”

이재국 기자 keystone@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 @keystone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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