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체험 Whatever] 삶의 짐, 배낭에 꾸역꾸역 담아 자연 속에 부려놓다

입력 2014-07-08 06: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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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패킹은 고난에서 시작해 힐링으로 끝을 맺는다. 물을 건너고 산을 오르고 숲길을 걷고 난 뒤에야 비로소 젖과 꿀이 흐르는 안식처에 다다를 수 있다. 강원도 인제의 아침가리계곡은 원시적인 비경을 간직한 국내에서 손꼽히는 트레킹의 성지다. 인제(강원)|박화용 기자 inphoto@donga.com 트위터 @seven7sola

■ 강원도 인제 아침가리계곡 백패킹

일반등산용보다 묵직한 45리터 배낭 메고
방동약수터∼조경동다리 2시간 숨이 턱
허리까지 잠기는 계곡 밀림에 온듯 착각
총 15km 걸어 목적지 진동리마을 도착
오토캠핑에 싫증난 캠퍼들에게 강력추천


요즘은 백패킹이 붐이다. 캠핑장까지 자동차가 닿는 오토캠핑에 싫증이 난 캠퍼들이 빠르게 백패킹으로 이동하고 있다. 주말이면 가족단위 캠핑족들이 몰려들어 순식간에 시장통으로 변해 버리는 오토캠핑장에서는 더 이상 자연 속에서 고적한 나만의 시간을 보장받기 힘들어진 탓이다. 숯불에 고기 타는 연기, 아이들 방귀 뀌는 소리까지 다 들리는 텐트 밀집지대에서 벗어나 ‘진짜 캠핑’의 재미를 누리려는 캠퍼들이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더 깊이, 더 멀리 자연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이번 ‘생생체험 Whatever’의 테마는 백패킹이다. 배낭을 메고 온전히 두 다리에 의지해 걷고, 하룻밤을 지내는 캠핑이다. 문명의 도움을 최소한으로 받는, 때 묻지 않은 원초적 캠핑이다. 목적지는 강원도 인제군의 아침가리골이다. 여러 차례 방송을 탔고, 인기 예능프로그램 ‘1박2일’에 등장하면서 찾는 사람들이 늘었다. 과거에 비해 ‘나 만의 비경’이라는 맛은 떨어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국내 오지 중의 하나다.


● ‘완전군장’ 배낭 무게에 “헉”소리 절로

사진을 담당한 박화용 기자와 백패킹 전문가 김선준(47) 한국오라클유한회사 상무가 동행했다. 김 상무는 1980년대 후반 윈드서핑 국가대표를 지낸 만능 스포츠맨이다. 이번 백패킹 체험취재를 위해 가이드와 멘토링을 기꺼이 맡아 주었다.

방태산 자연휴양림 입구의 방동약수터를 출발지로 정했다. 방동약수는 국내 최고의 약수 중 하나로 꼽히는, 말 그대로 약이 되는 물이다. 보통 물과 달리 탄산이 많은 데다 철, 망간, 불소 성분으로 인해 독특한 맛이 난다. 녹이 슨 쇠파이프를 핥는 지독한 맛이다. 한 모금에 당장 얼굴이 구겨진다.

물통에 담아가려고 하니 김 상무가 만류한다. 시간이 지나면 더 마시기 힘들어진다고 했다.

백패킹을 위한 배낭은 일반 등산용 배낭에 비해 용량이 크다. 오토캠핑은 넉넉한 자동차 트렁크에 온갖 짐을 실을 수 있지만, 백패킹은 오로지 배낭의 공간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 가장 부피가 큰 짐은 역시 침낭과 텐트다. 텐트는 소형인 1∼2인용 텐트여야 한다. 마모트의 ‘드라콘45 배낭’을 준비했다. 45리터 대용량배낭이다. 침낭을 있는 힘을 다해 밟아 우겨넣었지만 공간은 절반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여기에 먹거리 등 공동의 짐을 나누어 넣고, 마지막으로 텐트를 묶는다. “과연 다 들어갈 수 있을까”싶었는데 신기하게도 꾸역꾸역 짐이 들어간다. “야아! 됐다”하며 좋아한 것은 딱 10초. 짐이 꽉 찬 배낭은 손으로 들 수가 없을 정도로 무겁다. 가까스로 배낭에 팔을 끼우고 일어섰다. “끙” 소리가 절로 난다.

옆을 보니 김 상무와 박 기자도 형편은 마찬가지다. 설상가상 김 상무의 배낭은 100리터가 넘는 초대형 배낭이다. 45리터 배낭을 맨 기자가 민망하다.

방동약수터를 떠나 오르막길을 걸었다. 아침가리골 입구인 조경동다리까지는 두 시간 가까이 걸린다. 출발한 지 30분도 안 돼 숨이 턱턱 막혀 온다. 무겁다. 아, 무겁다. 군대시절 완전군장도 이보다는 가벼웠던 것 같다.


● 휴대폰조차 터지지 않는 완벽한 힐링 코스

조경동다리 아래로 내려가면 비로소 아침가리계곡이 시작된다. 지금까지의 길이 비포장도로였다면, 지금부터는 밀림과 허리까지 잠기는 물길이다. 숲길을 걷고, 바위를 넘고, 물을 건넌다.

새소리, 물소리, 바람에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 이것이 전부다. 고요와 적막의 신세계다. 휴대폰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아침가리에서는 휴대폰이 터지지 않기 때문이다.

몸의 짐은 무겁지만 마음의 짐은 가볍다. 도시생활의 때를 물소리에 씻고 바람에 말린다. 모든 게 자연의 마술이다. 몇 번이고 ‘오길 잘 했어’라고 되뇌게 된다.

그래도 최고의 시간은 휴식시간이다. 45리터 배낭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10분. 배낭이 몸에서 떨어지면 지구의 중력이 달라지는 기분이다. 해방감에 들떠있는 기자를 보며 김 상무가 “이 맛에 백패킹을 한다”며 물었다.

“백패킹을 할 때 캠퍼들이 왜 빨리 걷는지 알아요?”

“글쎄요. 모르겠는데요.”

“빨리 도착해서 배낭 내려놓으려고요.”

아침가리계곡 트레킹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물을 건너야 한다. 계곡물을 끼고 걷다가 길이 막히면 반대편으로 건너가야 길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수륙양용의 칸투칸 아쿠아트레킹화가 위력을 발휘했다. 울퉁불퉁한 돌길에서는 전문 등산화에 비해 발바닥에 충격이 다소 느껴졌지만 물길에서는 제 몫을 단단히 했다. 노스페이스 등산바지의 건조속도는 놀라울 정도였다. 물을 건너 걷다보면 10분도 안 돼 바지가 바삭하게 말랐다.

아침가리계곡은 전체 15km정도 된다. 평지를 걸어도 만만한 거리는 아니지만 난이도가 높은 길은 아니다. 짐만 없다면 샌들을 신은 아이들도 걸을 수 있다. 뭐니 뭐니 해도 옥빛의 소, 아담한 폭포, 퍼질러 눕고 싶은 넓은 바위들이 최고의 응원군이다. 힘이 들어도 ‘이쯤에서 그만두고 싶다’는 마음은 들지 않는다.

마침내 끝. 최종 목적지인 진동리 마을에 도착했다. 아침가리계곡은 올해 자연휴식년이라 야영을 할 수 없다. 캠핑은 진동리 마을회관 인근에서 하기로 했다.

백패킹은 숙소(텐트)도 각자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 마모트의 ‘라임라인트 텐트’를 준비해갔다. 백패킹용 텐트답게 설치가 쉽다. 초보캠퍼인 기자도 김 상무의 도움을 받아 뚝딱뚝딱 간단하게 잠자리를 마련했다. 침낭 역시 마모트 제품이다. 미국 브랜드인 마모트는 특히 침낭이 유명하다. ‘트레슬 15’ 침낭은 확실히 이름값을 했다. 포근하고 따뜻하다. 영하 9도에서도 거뜬히 버틸 수 있는 제품이다.

야외에서는 커피향이 더 짙어진다. 훈제오리와 삼겹살이 이글이글 익는다. 어둠이 깔리면서 후드득 후드득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타프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는 술을 부른다. 비장의 약초 막걸리가 떨어지자 박 기자가 계곡 물에 담가 두었던 소주를 들고 왔다. 평소 가족에게도 하기 힘들었던 속 이야기들이 하나 둘씩 꺼내져 나온다. 자연은 마음을 열어준다. 찢어진 일상의 상처를 기워준다.

백패킹이란 것은 결국 삶의 짐을 배낭 속에 꾸역꾸역 담아 와 자연 속에 부려놓고 가는 행위가 아닐까. 어깨에 벌건 줄이 새겨지고, 허리와 엉치뼈가 쑤셔도 다시 떠나고 싶어지는 이유는 그런 것이 아닐까.

비워진 배낭이 도시 일상의 짐으로 가득 채워질 때, 우리는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또 다시 떠날 것이다. 백패킹은 살기 위한, 살아내기 위한 너무도 인간적인 본능이니까.



■ 아침가리계곡은?

아침가리는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에 소재한 계곡이다. 정감록에 나오는 ‘3둔4가리’ 중 하나다. ‘둔’은 둔덕이고 ‘가리’는 겨우 밭을 갈아먹을 수 있을 정도로 좁은 골짜기의 땅을 뜻한다. 예로부터 난리를 피해 숨을 수 있는 피난처로 꼽혔을 정도로 오지다. 아침가리라는 독특한 지명은 ‘빛이 안 들어 아침나절에만 밭을 갈 수 있다’는 데에서 생겼다. 네 곳의 가리 중에서도 가장 길고 깊다. 한때는 여행가들이 ‘쉬쉬’하던 비밀의 장소였지만 언론에 보도되면서 찾는 사람들이 크게 늘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사람의 발이 닿지 않은 원시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전체 15km 정도의 길이지만 코스가 다양해 전부 다 걷지 않아도 된다. 아래로 갈수록 절경이 펼쳐진다. 맑은 물에는 열목어가 헤엄쳐 다니며 운이 좋으면 수달이 우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


■ 맛집|진동계곡식당 ‘두부전골’

아침가리계곡 끝의 진동계곡식당은 진동리 마을주민들이 운영하는 곳이다. 기린농협에서 생산한 ‘내린천두부’를 사용한 두부전골이 간판메뉴다. 고소하고 담백한 두부를 얼큰한 국물에 듬뿍 넣어 내온다. 더덕을 넣어 숙성시켰다는 막걸리와 함께 먹으면 트레킹으로 쌓인 피로가 땀과 함께 훌훌 날아간다. 두부전골로 부족하다면 감자전을 추가로 주문하는 것도 괜찮다.

메인음식이 한 수 접어줘야 할 정도로 반찬이 맛있다. 간장고추절임, 파김치의 순수한 맛은 따로 포장해 가고 싶을 정도다.

한 군데 더. 진동계곡 가는 길에 아홉싸리재(해발775m)에는 간판도 없는 올챙이국수집이 있다. 올챙이국수보다는 감자전이 맛있다. 한 눈에도 기인처럼 보이는 주인이 주문을 받으면 그제야 강판에 서걱서걱 감자를 갈기 시작한다. 메뉴판에도 없는 약초 막걸리(1만원)를 포장해 가는 사람들도 많다. 한 모금에 탄성이 나오는 절묘한 맛이다. 혀와 목구멍에 찹쌀떡처럼 들러붙는다. ‘안 마시면 손해’라는 한방약차도 인기가 높다. 약초 막걸리와 감자전을 맛보는 것은 운 때가 맞아야 한다. 주인이 약초를 캐기 위해 자리를 비우는 일이 왕왕 있기 때문이다.

인제군(강원)|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 @ranbi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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