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전드가 말하는 나의 AG] 하형주 “올림픽보다 AG 金 더 힘들다”

입력 2014-09-22 06: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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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부산아시안게임 때 ‘유도 영웅’ 하형주(오른쪽) 교수가 북한의 ‘유도 영웅’ 계순희와 함께 성화 최종점화자로 인사하고 있다. 하 교수는 이번 인천아시안게임에서 ‘유도 레전드’으로 배드민턴 박주봉 등과 함께 대회기를 들고 입장해 많은 박수를 받았다. 스포츠동아DB

1. 유도 하형주

1986서울AG, 내 생애 가장 힘들었던 훈련
2002년에는 부산AG 개최 위해 시의원까지
인천서 레전드 대회기 들어…“1회성 아쉽다”

19일 인천아시아드주경기장에서 열린 제17회 인천아시아경기대회 개회식. ‘유도 영웅’ 하형주 동아대 교수(52)는 ‘유도 레전드’ 자격으로 배드민턴 박주봉, 탁구 현정화, 역도 장미란 등과 함께 대회기를 들고 입장했다. 하 교수는 1984년 LA올림픽 유도 -95kg급에서 금메달을 따낸 유도 중량급의 전설적 존재다. 그러나 정작 하 교수는 “올림픽보다 아시안게임 금메달이 더 힘들었다”고 떠올렸다. 선수로 뛴 아시안게임은 서울 대회가 유일했지만 부산과 인천 대회까지 한국에서 열린 3차례의 아시안게임 모두와 각별한 사연을 지니고 있다.


●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의 추억

1984년 LA올림픽 금메달로 하형주는 한국 유도의 간판처럼 각인됐다. 하형주가 세계를 평정하자 유도 종주국 일본은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일본은 1985년부터 하형주의 저격수를 찾기 시작했고, 그 적임자로 쓰가이 히토시를 낙점했다. 쓰가이는 일본 국내에서도 1인자가 아니어서 거의 정보가 없었다. 미지의 상대에게 하형주는 세계선수권에서 패배해 우승을 내줬다.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인 하형주는 1년 후 서울아시안게임에서의 설욕을 위해 지옥훈련을 했다. 하 교수는 28년이 흐른 지금도 “내 유도 인생에서 가장 힘들게 훈련했던 시기”라고 떠올렸다. 그렇게 처절하게 준비했고 결국 결승에서 쓰가이를 잡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하 교수는 “올해로 LA올림픽 금메달 30주년이라서 지인들이 25일 부산에서 기념식을 열어준다. 그 자리에 쓰가이도 초청해 해후가 이뤄지게 됐다”고 말했다. 하 교수에게 서울아시안게임은 쓰가이를 쓰러뜨리고 집념을 실현했던 대회로 기억된다.


●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의 추억

하 교수는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지만 부산체고∼동아대를 거쳤다. 성균관대에서 스포츠심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모교인 동아대 교수를 맡고 있다. 말투에도 부산 사투리가 물씬 풍긴다. 이런 하 교수가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의 산파였던 사실은 이제는 희미한 기억이다. 하 교수는 “부산은 김영삼 대통령이 나오기 전까지 야권 성향의 도시였다. 그러다보니 지역 발전이 더뎠다. 부산을 발전시키려면 전국체전 수준을 넘어 아시아대회를 개최해야 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하 교수가 주도가 되어서 100만 시민운동을 전개했고, 시 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개최가 확정된 뒤 아시안게임 조직위 집행위원이 됐고, 개막식에서 최종 성화 봉송자로 선택됐다. 하 교수에게 부산 아시안게임은 자신을 길러준 고향을 향한 보은이었다.


●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에선 레전드로

개막식에서 하 교수는 역도 장미란, 탁구 현정화, 육상 백옥자, 하키 신정희, 배드민턴 박주봉, 핸드볼 윤경신, 체조 여홍철 등과 함께 대회기를 들고 인천아시아드주경기장을 수놓았다. 하 교수는 “레전드 8명에 내가 끼게 되어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잊지 않아준 국민들에게 고마운 마음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런 스포츠 영웅들을 1회성 이벤트로만 우대하는 것 같기도 해 씁쓸한 기분도 들었다. 특히 개막식 최종 성화 봉송자가 인천 출신 체육인이 아니라 한류스타였던 것도 못내 섭섭했다. 하 교수는 “한국의 스포츠역사가 이제 100년이다. 업적을 이룬 체육인들을 국가적 차원에서 관리해줄 시스템을 대한체육회 차원에서 생각해줬으면 좋겠다”고 주문했다.

인천|김영준 기자 gatzby@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 @matsri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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