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안성 여행]너무나도 숨어있었다, 안성

입력 2015-09-25 14: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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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투어 제공

안성은 경기도 땅 마지막 라인에 충청도와 걸쳐있다. 때문에 음식과 말투 등이 충청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서울과 멀지 않은 이곳을 여행하다보면 놀랄 만큼 많은 역사와 볼거리에 다시금 ‘안성’이라는 이름 두 글자를 떠올리게 된다. ‘위태로움이 없고 편안하며 탈 없는 성곽’이란 뜻의 안성. 지면으로 다 싣지 못함이 안타깝다.

안성은 사실 여행지로써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안성은 어느 곳보다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곳이다. 남자로만 구성된 한국 최초의 유랑예인집단으로 기록되는 ‘남사당패’의 근거지였으며 연암 박지원의 ‘허생전’의 이야기가 시작된 곳도 안성시장이다. 시인 박두진의 고향이기도 하며 어사 박문수와 임꺽정 등도 이 안성 땅을 이야기할 때 절대 빠질 수 없는 사람들이다. 순교자 김대건 신부가 잠들어 있는 곳도 바로 이곳 안성이며 국내 유일의 염수정 추기경도 안성 출신이다. 그 유명한 신라의 자장율사도 이 빛나는 안성의 방명록에 굵직굵직한 이름을 올린다. 천주교 성지와 천년 고찰 그리고 폐허에 미를 더해 독특한 한국적인 폐허미를 보여주는 죽주산성. 마지막 방점은 몽환적인 새벽의 고삼호수와 산 위에 펼쳐져 있는 안성 농장이 될 것이다. 넉넉한 평야와 봉긋한 산들로 이루어진, 숨어있는 요새 같으면서도 또 그 요새에 문을 걸어 잠그지는 않은 안성. 서울 근교, 아니 한반도 남쪽에서 이만한 여행지가 또 어디 있으랴.

은하수 속의 별이 된 사람들, 미리내 성지
안성시 양성면 미산리에 있는 미리내 성지는 한국 천주교의 최대 성지이다. 은하수의 순 우리말인 미리내가 성지의 이름이 된 이유는 조선시대 말엽 신유박해와 기해박해의 종교 탄압을 피해 이곳으로 피신해 온 신자들에 의해서다. 밤마다 종교 활동을 위해 그들이 켜놓은 작은 불빛들이 달빛 아래 비치는 냇물과 어우러져 마치 은하수처럼 보였다고 해서 그런 아름다운 이름이 붙었다. 주차장을 지나 조용한 숲길을 따라 걸으면 한국 천주교 103위 시성을 기리기 위한 큰 규모의 성전을 만난다. 세계의 유수한 대성당들과 비교해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거룩함과 경건함이 대성전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있다. 전면의 스테인드글라스에는 한국인 93명과 10명의 외국인 순교자 등 103위 순교자들의 모습이 아로새겨져 있어 신성함을 더한다. 대성전을 나와 뒤편으로 옮기면 103위 순교자들 중 대표 성인으로 추대된 김대건 신부가 잠들어 있는 경당이 나온다. 한국의 천주교 신자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복음을 전파한 김대건 신부는 1846년 9월 16일 서울에서 순교했다. 당시 그 삼엄했던 경비를 뚫고 교우 중 스무 살도 안 된, 청년 이민식이 한강변 모래밭의 시신을 수습해 이곳으로 몰래 모셔와 안장하여 하늘로 인도했다고 한다. 경당 뒤편에 이민식과 김대건 신부의 어머니도 함께 모셔져 있다. 다시 주차장으로 나오면 낮은 언덕에 고풍스러운 모습의 성요셉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한국 땅에서 최초로 서품을 받은 강도영 마르코 신부와 미리내의 신자들이 많은 고생을 하며 일궈놓은, 미리내의 역사와도 같은 성당이다. 이밖에 천주성삼상과 무명 순교자 묘지 그리고 성체조배실과 겟세마니 동산 등 미리내 성지는 마음으로 담아야 할 곳이 너무나 많아 솔직히 하루라는 시간으로는 모자란 고귀하고 은혜로운 성역이다.

생활이 자연이 되는 곳, 안성허브마을
삼죽면의 1만평 부지에 조성되어 있는 안성허브마을은 허브로 가득 찬 허브의 나라이다. 포천 허브아일랜드와 연천의 허브빌리지 등 전국에 허브 관련 명소들이 많지만 이곳은 사람들에게 건강한 휴식과 여유를 주는 것을 기치로 삼는 분명한 경영방침이 있다. 펜션과 스파, 레스토랑과 베이커리 그리고 허브용품 숍과 공방 등 많은 스폿들은 이 허브농장 역시 하루라는 시간 전체를 할애해도 충분한 공간으로 구성한다. 언덕 위의 시크릿가든과 핸드크림 만들기부터 양초와 비누 만들기 등의 각종 체험 프로그램도 이곳이 갖고 있는 여러 특징 중 하나이다. 특히 식용 허브를 사용해 음식을 내는 레스토랑의 내부는 스페인 남부의 어디쯤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화려하고 이국적이며, 허브 농장은 지중해 연안의 진한 허브향을 느낄 수 있는 힐링 플레이스로 허브마을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허브농장은 이미 안성을 대표하는 명소로 자리 잡았다.
한 편의 소설, 칠현산 칠장사
칠장사의 창건 연도는 636년으로 그 역사가 무려 1,400년에 가깝다. 오대산 월정사뿐만 아니라 양산의 통도사와 영월의 법흥사, 공주의 마곡사와 고창 문수사 등등 한국 불교 곳곳에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명망이 높았던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세웠다. 절 이름은 고려 말 칠장사에 머물다 입적한 고승 혜소국사972~1054가 이곳에 머물면서 일곱 명의 악인을 교화하여 현인으로 만들었다는 설화에서 유래한다.
칠장사는 산 속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지 않아 접근하기가 어렵지 않다. 일주문을 지나 은행나무 길을 거쳐 칠장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제중루가 눈에 띤다. 혜소국사의 칠장사 탄생 비화가 서려있는 누각으로 돌로 쌓은 축대 끝에 특별한 치장을 입히지 않고 고풍스럽게 서있다. 대웅전 왼편에는 보물인 고려 시대의 귀중한 석불 입상이 있지만 가건물 안에 따로 보관을 한 탓에 들여다 볼 수는 없었다. 경내 중앙에 있는 삼층석탑과 국내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탱화도 이 칠장사라는 고찰에 품격을 부여하는 보석들이다. 칠장사를 이야기할 때 어사 박문수도 빼놓을 수 없다. 천안 사람인 박문수가 과거시험을 보러 한양에 올라가는 길에 이곳 칠장사에서 하룻밤을 묵었고 지극정성으로 불공을 드린 나한이 꿈에 나타나 과거시험 문제 8줄 중 7줄을 가르쳐주어 과거에 합격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궁예가 10세까지 활쏘기를 하며 유년기를 보냈다는 활터의 흔적도 남아 있고, 임꺽정이 난을 일으켰을 때 관군들을 피해 머물던 곳이기도 하다. 전 시대를 아우르며 한반도 땅에 이렇게 많은 인물들이 스쳐간 지역이 또 어디 있으랴. 이 천년 고찰의 묵언은 한 편의 장편 소설로 남을 것이다.


폐허미, 죽주산성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면 그대로 그것이 되는 법이다. 폐허가 아름다울 수 있다는, 폐허미. 그것이 죽주산성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이다. 비봉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는, 삼국시대에 축조된 석성인 죽주산성은 고려 중기, 송문주 장군이 쳐들어온 몽고군을 물리친 전투지이며 그의 혁혁한 공을 기리기 위해 산성 안쪽에 따로 사당을 두고 있기도 하다. 이곳 죽주는 예전 청주와 충주가 갈라지는 중부 내륙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많은 부침이 있던 곳이었다. 실제 병자호란 때도 관군은 이곳에 진을 쳤었다. 산성의 외벽 둘레는 1,688미터이며 높이는 2.5미터에 이르고 보존 상태도 꽤 괜찮은 편이다. 동문에서 우측 성벽을 따라 올라가면 정상에 포루가 있다. 허허로운 산 정상에 외따로 서있는 포루는 안성의 풍광이 한 눈에 들어오는 명당에 자리하고 있지만 또 역설적으로 그래서 이곳에 있는 것이기도 하다.
포루는 스산하고 상처 입은 모습으로 오늘도 안성을 쓸쓸히 바라보고 있다. 스러진 돌 벽들 그리고 그 돌 틈에서 자란 들꽃과 벌판의 무궁화나무들. 그런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절벽 끝의 한 그루의 오동나무. 포루와 오동나무는 어쩌면 모두 다 떠나간 죽주산성을 지키고 있는 장수처럼 또 어쩌면 죽주산성의 폐허미를 가장 잘 나타내는 하나의 그림처럼 오늘도 서로 의지하며 해가 지는 반대편에서 죽주산성을 지키고 있다. 혹시 폐허가 지니는 폐허미를 보고 싶다면 죽주산성, 특히 포루의 끝에서 그 쓸쓸한 경험의 최대치를 느껴보시길.

새벽의 풍경화, 고삼호수
안성은 의외로 호반의 도시다. 금광호수, 청룡호수, 미산호수 칠곡호수 등 약 10여개의 호수가 안성 전역에 있으며 규모가 작은 저수지도 용설, 덕산, 마둔 등 많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 중에서 몽환적인 분위기와 좌대가 만들어내는 독특함이 서린 풍경으로 유명한 고삼호수는 이 호반의 도시 안성 중에서도 가장 사람들이 많이 찾는 관광지가 되었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 ‘섬’의 촬영지로 알려진 후 고삼호수는 고기를 낚는 조사들과 사진을 찍는 출사자들에게 명소로 더욱 유명해졌다. 이른 새벽 네 시, 소의 인분 냄새가 안성 전체에 내려앉은 시골길을 달려 고삼호수에 도착했다. 이런 냄새를 안 맡을 이유가 없어 차 문을 활짝 열고 마음껏 차 안으로 들였다. 동이 트기 전 이 드넓은 고삼 호수에는 단 한 명의 강태공만이 새벽부터 고기를 낚고 있었다. 물안개가 피어오르면 이 고삼호수의 새벽 풍광에 몽환적인 연출을 더했을 테지만 아쉽게도 물안개는 피지 않았다. 고삼호수의 물안개는 봄, 여름보다는 기온차가 심한 가을, 겨울에 훨씬 더 많이 볼 수 있다고 하는데 그것도 50%정도만 이라고 한다. 물 위에 고요하게 떠 있는 좌대, 호수 기슭에 아무렇게나 비쭉 솟아오른 수초 그리고 아직 물에서 일어나지 않고 잠자고 있는 호수의 바람. 안성에서 딱 한 장의 사진을 남기라고 한다면 새벽의 고삼호수가 될 것이다. 사진이 풍경화가 될 수 있다면.

한국의 비에이, 안성목장
일본에 비에이びえい라는 곳이 있다. 벌판과 언덕, 꽃밭과 나무 몇 그루만으로 엄청난 감동을 주는 북해도의 한 마을이다. 안성목장은 그런 비에이의 풍광을 가장 비슷하게 볼 수 있는, 한국에서 몇 안 되는 곳이다. 안성에 이런 곳이 있다니 안성의 놀라움은 아직도 끝날 줄을 모른다. 시내에서 조금 외곽으로 빠져 야트막한 산 위로 올라가면 왜 이런 아름다움을 지니고 이런 곳에 숨어있나 묻고 싶을 정도로 온통 초록 밭의 공간이 나온다. 호밀밭 추수가 끝난 초원 위에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소들. 멀리 한 그루의 미루나무가 마치 산을 넘다 잠시 쉬려고 서있는 모습은 경계를 위해 쳐 놓은 하얀 철제 구조물마저 안성농장의 프레임으로 끌고 들어와 함께 완벽한 그림을 그린다. 초원지대는 가족형 놀이동산인 안성팜랜드에 속해있는 부지로 팜랜드는 아이들과 가족을 위한 다양하고 환경 친화적인 프로그램들을 갖춰 이 안성의 언덕 위에 한국의 비에이를 새겨놓았다. 동이 터버린 아침에 자전거 한 대가 이슬을 머금어 희뿌옇게 피어오르는 안성목장 사잇길로 달린다. 목초지는 마치 수평선처럼 언덕의 등성과 맞닿아 하늘과 만난다. 이곳에서 숨을 한 번 들이킨다면 안성의 모든 냄새들, 그러니까 허브의 향취와 고삼호수의 물비린내 그리고 죽주산성의 돌가루 냄새도 다시금 폐부 깊숙이 들어온다. 비로소 안성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시간. 이 드넓은 장면과 ‘안성’이라는 이름을 독차지하기 위해서는 고삼호수에서 새벽을 보내고 아무도 없는 아침 일찍 찾아오는 것이 좋다. 샐린저의 소설처럼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면.

제공 : 모두투어(www.modetour.com, 1544-5252), TRAVEL MAGAZINE GO ON

<동아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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