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발리볼] 배구 선수의 은퇴, 그 후…

입력 2015-11-27 05: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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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카드 김상우 감독. 스포츠동아DB

김상우 감독, 선수 은퇴후 일자리 찾아 전전
김세진 감독 한때 영업, 강현수·유연수 모델
준비 안된 제2의 인생…충격·후유증 시달려


V리그 2015∼2016시즌을 앞두고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조기 은퇴한 이경수(36)의 아내가 최근 SNS에 올린 내용이다. 가족과 함께 귀중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경수가 가장 가고 싶은 곳을 쓰려는데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아 노트에 달랑 하나 ‘광장시장’이라는 글자만 썼다고 한다. 배구선수로 살아온 오랜 시간 동안 숙소와 훈련장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살아온 그에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시간이 주어졌지만, 막상 지금 무엇을 할지 막막한 모양이다.

선수는 누구나 은퇴한다. 숙명이다. 자발적으로 유니폼을 벗는 사람은 그나마 마음의 준비가 어느 정도는 돼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선수들에게 은퇴는 예기치 않은 교통사고보다 더 심한 충격과 후유증을 안긴다.


● 밖에서 눈비도 맞아봐야 한다고 했던 신치용 감독

우리카드 김상우 감독이 들려준 은퇴 이야기다. 2006∼2007시즌 챔피언 결정전에서 현대캐피탈에 패했던 삼성화재 신치용 감독은 물갈이를 결심했다. 김상우, 신진식, 방지섭 등 주전들을 은퇴시켰다. “다음 시즌을 앞두고 한창 훈련하던 중이었다. 오전 훈련을 끝냈는데, 감독실로 부른다는 연락을 받았다. 감독실에 들어가자마자 먼저 와 있는 베테랑들을 보는 순간 올 것이 왔다는 것을 깨알았다. 감독님은 ‘오후부터 훈련에 나오지 말라’는 한마디만 했다.” 그것이 은퇴 통보의 전부였다. 졸지에 유니폼을 벗은 3명은 오후 훈련에도 나가지 못하고 합숙소 부근 카페를 찾았다. 멍하니 앉아서 함께 미래를 걱정했다.

김 감독은 은퇴 후 여기저기 일자리를 찾아봤다. 한때는 외제차 딜러로 근무하려고 교육까지 받았지만, 원하는 직급을 주지 않아 그만뒀다. 그 뒤 모델도 했다. 행사에 나가 10만원을 받았던 것이 성인이 된 후 배구 말고 다른 일로 처음 번 돈이었다. 이후 김 감독은 신치용 감독을 찾아가 “살 길을 열어달라”고 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너희는 밖에서 눈비도 맞아봐야 한다”는 냉정한 이야기였다. 삼성화재 임도헌 감독도 은퇴 후 캐나다에서 연수를 받으며 고생했는데, 이런 과정을 “선수 물을 빼는 기간”이라고 했다.


● ‘은퇴의 조건’ 100만원 벌기와 커피숍 아르바이트생 곽유화

스타 출신들은 운동을 잘한 덕분에 항상 주위로부터 떠받들려 살아왔다. 운동은 힘들었겠지만, 일반인이 겪는 보통의 생활은 경험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항상 대접만 받고 사는 ‘갑의 인생’이다. 그러나 유니폼을 벗는 순간, 전혀 다른 현실이 찾아온다. 누구는 세상이 ‘정글보다 무서운 곳’이라고 했다. 진정한 삶을 체험한 선수 출신들은 선수 시절의 지옥훈련이 세상살이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다.

선수들은 이런 물이 빠지는 과정을 겪으면서 진짜 인생을 체감한다. 스타 출신들은 운동을 잘했기 때문에 운동을 못하는 사람들의 어려움을 모른다. 을과 병의 입장도 헤아려본 적이 없다. 이처럼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스타 출신은 지도자가 돼서도 오류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선수 물을 빼는 작업은 필수적이다. 김상우 감독도 그렇게 몇 달을 살면서 세상의 무서움을 알았다.

OK저축은행 김세진 감독은 신치용 감독의 만류를 뿌리치고 은퇴한 뒤 회사에 들어가 영업을 하면서 진짜 인생을 경험했다고 털어놓았다. 지도자 경험이 전무한 그가 감독으로 성공을 거둔 배경에는 이런 힘든 사회경험이 큰 바탕이 됐다.

김상우 감독은 “나도 선수를 은퇴시킬 때 신치용 감독님처럼 단호하게 할 것이다. 그래야 선수들이 빨리 현실을 안다. 당시는 신 감독님의 말이 서운했지만, 돌이켜보면 다 잘 되라고 했던 것이었다. 이제는 그 말에 담긴 뜻과 깊은 속내를 이해한다. 훈련이 힘들어서 운동을 포기하는 선수가 있으면, ‘나가서 네 힘으로 100만원을 벌어오면 은퇴시켜준다’고 한다. 배구 말고 다른 일을 해서 100만원을 벌기가 쉽지 않다. 대부분은 그런 용기조차 없다. 그 정도 용기를 가진 선수라면 운동을 하지 않아도 다른 일을 할 수 있다”고 밝혔다.

도핑 파문 때문에 뜻하지 않게 은퇴한 흥국생명 곽유화(22)는 지금 고향 진주의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대부분의 여자선수가 유니폼을 벗는 순간 택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정규직은 꿈같은 일이다. 대부분은 시급을 받는 비정규직이다.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 때문에 진짜 인생을 경험 중인 곽유화는 유니폼의 가치를 이제 안다.


● 자발적으로 새 인생을 개척하러 나간 강현수

OK저축은행은 올 시즌 팀의 ‘꽃미남 지수’가 눈에 띄게 떨어졌다는 농담을 듣는다. 이번 시즌을 앞두고 강현수(23)가 은퇴했고, 최근 배홍희(24)도 팀을 떠났기 때문이다. 충남대를 졸업하고 2014∼2015시즌 신고선수로 입단한 레프트 강현수는 지난 시즌 6경기 10세트에 출전해 5득점의 기록을 남겼다. 키 188cm의 늘씬한 강현수는 입단동기들에 치여 선수로서 더 이상 미래가 없다고 판단되자, 새로운 인생을 찾기로 했다. 모델로 제2의 인생을 개척하겠다며 팀을 떠났다. 몇몇 배구선수 출신들은 장신의 이점 덕분에 은퇴 후 모델로 변신을 꿈꾼다. 실업배구 SK의 센터 유연수는 은퇴 후 모델을 시작해 제1회 SBS 슈퍼모델대회 본선에 진출하기도 했다.

또 다른 꽃미남 배홍희는 최근 실업팀으로 이적했다. 배홍희는 올 시즌 팀의 엔트리에 들었지만 스스로 실업배구를 택했다. 신고선수로 입단한 신인 박기현 때문이었다. 그의 기량이 갈수록 좋아지자 구단은 엔트리 변경을 놓고 고민했다. 배홍희는 저간의 사정을 지켜본 뒤 박기현에게 자리를 마련해주려고 스스로 물러섰다. 구단은 그의 마음 씀씀이에 고마워하며 전별금을 주고 인연을 정리했다. 강현수, 배홍희가 비록 지금은 OK저축은행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면서 암울하고 어두운 미로 속에 있는 기분이겠지만, 진짜 인생을 경험한 뒤 어떤 모습으로 성공해 다시 나타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두 선수의 앞길에 행운이 있기를 바란다.

김종건 전문기자 marc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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