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록도, 사람들①] 소록도, 그곳에 사람이 산다

입력 2016-05-03 05: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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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득량만을 바라보며 선 소록도 마을 풍경. 왼쪽 소록대교를 건너면 당도하는 소록도엔 가운데 녹생리처럼 7개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2. 소록도에 상주하며 의료 서비스에 나선 간호사의 모습.-3. 녹생리사무소에 생기 푸른 소나무가 벽화로 서 있다.-4. 몸이 불편한 섬 사람들은 전동차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다. 마을 앞에 봄날의 매화가 세상 모르는 척 피어 있다. 소록도(고흥)|김종원 기자 won@donga.com

■ 1.소록도 사람들

누구는 ‘천형의 땅’이라고 했다. 또 누구는 ‘아픔의 섬’이라고 말한다. 천형처럼 내려앉은 아픔과 설움의 흔적이 여전하기 때문일까. 전남 고흥군 도양읍 소록도. 마치 “어린 사슴의 모양을 닮아”(小鹿島, ‘소록도 80년사’·국립소록도병원 펴냄) 붙여진 이름은 그러나 한센병과 그 후유증 혹은 합병증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문둥병’이란 이름의 소외와 차별, 멸시의 아픔을 감당해낸 섬 사람들을 위로하지 못하는 듯하다. 1916년 일제가 나환자 격리 정책에 따라 이 곳에 자혜의원을 세운 지 100년. 소록도엔 여전히 그 오랜 세월 상처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그 섬에 사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 섬 사람들의 이야기를 네 차례에 걸쳐 싣는다.


79세 장 할머니, 16세 때 배 타고 들어와
녹동 바닷가 건너편서 우는 엄마 못 잊어
자살하면 지옥 간다는 목사님 말에 철렁
장로교 신자가 되고, 학교서 남편도 만나
남편은 한 번도 고향에 못 가보고 하늘로


1938년생 장경희(가명) 할머니는 오른손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뜨거운 주전자에 덴 화상의 흔적을 보듬었다. 상처는 오래 전 감각이 없어진 탓이다. 병의 합병증 때문이다. 그러지 않아도 짓뭉개진 손. 또 다른 손의 손가락도 채 펴지지 않는다. 힘겹게 쥔 손수건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는 모습은 영 불편해 보이기만 한다.

전남 고흥군 도양읍 신생리 독신사(獨身舍) 주택에서 이웃한 두 명의 할머니와 살아가는 장 할머니는 16살 때 이 곳에 스며들었다. 고향에서 내로라하는 부잣집의 막내딸이었다. 어느 날 느닷없이 찾아온 병마. 가족들은 쉬쉬했다.

“아부지가 몰래몰래 약을 사다 멕였어. 근디도 안 나서(안 나아).”

쥐약을 털어 넣었다. 부질없는 목숨이 있을까. 살아나 통곡했다. 병에 걸린 자신을 창피해 할까봐 “집안을 위해 죽겠다”는 그를 오빠는 말렸다. 대신 입원을 권했다. 아버지는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소록도를 택했다.


● “그래도 안 나을 거라 생각했다”

일제강점기 ‘전염성’을 우려한 일제가 불행한 병에 걸린 환자들을 세상으로부터 격리해 관리하려는 목적으로 원주민들을 내쫓고 병원을 세운 섬이었다. “울창한 송림 사이 용수가 풍부하고 땅이 기름져 농경에 적합”(소록도 80년사)했던 땅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없었다. 그래서일까. 인적 닿지 않은 자연의 역설적 아름다움을 품은 곳이었다. 그 풍광 안에서 사람들은 오랜 시간 강제노역과 배고픔, 강제 단종수술(정관수술), 시신 해부 등 차마 사람의 것이랄 수 없는 삶을 살아야 했다. 일부는 급한 조류의 바다로 뛰어들어 탈출을 시도했다. 작가 이청준은 “생명을 받고 살아있는 자의 마지막 자기 증거”이면서 “자신의 선택과 용기에 의지한 희망 찬 인간에의 모험을 택”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당신들의 천국)

아직 선착장이랄 것도 없는 녹동 바닷가의 한 구석(현 소록대교 녹동 방면)에서 병을 앓는 이들은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차단당한 채 섬 사람이 되었다.

“배타고 가다 물에 빠져 죽으려 했거든.”

자그마한 쪽배 위에서 다시 죽음을 생각했다. 엄마와 오빠가 저 녹동에서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심은 그리 깊어 보이지 않았다. 배는 사람들로 빼곡했다. 뛰어들어도 금세 건져질 것 같았다.

“저 짝(쪽)에서 우리 엄마가 막 울고 있는 거야. 너무 가깝잖아. 다 보이잖아요. 엄마 가슴이 찢어지겠다 싶더라고.”


● 돈마저 격리된 삶

섬을 관리하는 병원 직원들은 들어오는 이들의 돈을 바꿔 주었다. 섬 안에서만 통용되는 돈이었다. “난 하나도 안 갖고 왔다고 했다”는 할머니는 “내가 그들을 의심을 한 거라”며 웃었다. 1950년대 쓰이던 1원짜리 지폐처럼 “희리끼리하게 생긴 게 여그서 만든” ‘소록도 화폐’였다. 돈 마저도 격리된 채 유통됐다.

할머니는 한 아이를 앞세워 섬 구경을 나섰다. 섬은 이미 직원(소록도병원 직원)지대와 병사(病舍)지대 사이 철조망으로 갈라져 있었다. 섬 사람들은 병사지대를 함부로 넘어설 수 없었다. 병을 돌보고 치유해야 할 직원들 역시 세상의 편견에 속박당하고 있었다. 마스크에 장갑을 끼고 치료에 나서는 의료진도 수없었다.

구경 삼아 나선 길에서 교회를 봤다. 우연히 목사의 설교를 들었다. “자살하면 큰 죄가 되고 지옥에 간다”는 말은 “가슴에 퍽” 닿았다.

“지옥? 무섭고 비참했지. 자살보따리를 늘 어깨에 메고 다녔어. 살아선 안돼. 근디 그날 그 말을 듣는 순간 보따리 팽개치는 느낌이 지금꺼정 역력해.”

그리고 ‘장로교’ 신자가 됐다. 노래를 잘 했던 할머니는 “특별예배 때 독창도 했”을 정도였다. “병을 치료하는 과정은 굉장히 아퍼요. 그런데도 생기가 나 하루하루 살았”던 것도 “그때 그 말씀” 덕분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1920년대 섬에 들어온 기독교는 섬 사람들 대부분의 삶을 위로했다. 뒤이어 천주교 역시 일부 섬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섬 안에 흩어진 무수한 예배소와 교회당은 그러한 사람들의 깊고도 애절한 기구의 표상”(당신들의 천국)이었다.


● 간장 한 종지, 양념 없는 김치

섬 생활은 춥고 배고팠다. 한 방에 7명가량이 생활하는 독신사에서 배급받은 식량은 늘 턱없었다. 반찬이라고는 간장이 전부였다. 배급받은 콩을 명절 때 쓸 것을 남기고 간장을 담가 먹었다. 무를 심고 배추를 가꿔 김장을 담그기도 했다.

“양념도 안하고 소금도 아끼기 위해서 바닷가에서 닦았어. 추워 죽겠어. 독에 넣고 소금 뿌려놓으면 그게 김장이여. 고춧가루도 없었어.”

너무 배가 고파 밥은 맛있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거의 점심을 먹지 않았다. 적은 식량이라도 절약해 그걸 팔아 일부 생필품을 샀다.

겨울에도 생활은 온전치 못했다. 방이 얼어도 불 한 번 온전히 때지 못했다.

“땔감을 너무 적게 주니 밥을 할 때만 썼지. 산에 가서 나무 하는 건 택도 없어. 그러다 걸리면 감금실 갔어. 산 감시하는 감독이 있응께. 총감독은 참 무섭게 생겼어요. 그덜한테 걸리면 큰일나.”

그나마 섬에서 만난 남녀끼리 가정을 꾸린 가정사에선 남자들이 몰래 나무를 해왔다. 그나마 “좀 따셨다”며 할머니는 웃는다.

그런 방에서 어떤 여인들은 아이를 낳았다. 몰래. 그리고 “3년 동안 이불이 없어갖고 옷으로 싸갖고 키웠”다. 미감아보육원엔 “숟가락 떠먹을 정도 되면 데려” 갔다.


● “결혼? 재미없어. 하하!”

그런 5년의 세월이 지나 할머니는 21살의 나이에 남편을 맞았다. 부잣집 딸로 살았으면 고등교육을 받았을 할머니는 성실고등성경학교에서 청강했다. “한 학기 듣고 시험쳐서 기준점수에 들어가면 정식학생이 되니께” 그랬다.

“어느날 한 오빠가 나더러 남편한테 시집가라 하는 거여. 안 간다 했지. 하도 여러 번 그라길래 귀찮아서 ‘아! 몰라’ 그랬어. 아, 근디 그 말이 허락하는 말이라네요. 여선. 호호호!”

남편은 결혼을 하고 싶어 정관수술을 받았다. 그것이 섬의 ‘법’이었다. 유전의 염려라는 지독하고 터무니 없는 편견 혹은 선입견과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을 관리하기 힘겨워 한 당국의 조처 때문이었다. 일제강점기엔 감금실에 갇히기라도 하면 출소 즉시 강제 단종수술대에 올라야 했다.

여전히 할머니의 젊음에도 아이를 원한다면 퇴원을 시키던 시절이었다. 아니면 생명의 씨앗을 없애야 했다. 1950년대 후반까지는 강제로 그 비극적 삶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한동안 섬에서 아이는 비밀로 낳았고 키웠다.

“남자들은 정관수술 전에 결혼한다고 약속하면 여자를 막 만나려고 애를 써. 그러다 혹시 임신하면 쩜매 가지고 어느날 놔불더라고. 그람 그냥 키워. 그러다 보육원 데려가.”

1960년대 초중반 오마도 간척공사에 참여하기도 한 ‘건설대’ 출신인 할머니의 남편은 몇 년 전 세상을 떠났다. 거제도 출신인 남편은 섬에 들어온 뒤 단 한 번도 고향을 찾아가지 않았다. 남편은 먼저 간 수많은 섬사람들과 함께 잠들어 있다. 신생리 산허리에 세워진 납골당 ‘만령당’(萬靈堂) 뒤편 무덤에 합장된 것이다. 만령당은 섬에서 연고자를 찾지 못한 채 사망한 이들의 유해를 안장하는 곳. 화장터를 거쳐 이 곳에선 10년 단위로 유해를 빼내 뒤편 무덤에 합장한다.

“영감님을 밖에 모실 수 있지만 그럴 수 없어. 10년 동안 어쩌다 못 빼냈고 말았네. 고향 그립지 않은 사람이 어데 있어. 근디도 한 번도 못 갔어.”

섬 바깥 사람들의 시선을 견딜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할머니는 고향을 찾았다.

“밤 늦게 집에 들어갔다 다음날 새벽 같이 나왔어. 동네 사람들 볼까봐.”

그러다 용기를 냈다. 1986년 동네 사람들 앞에 “터놓고 가서 교회 나가라 했어. 반가라 하더라고”라며 할머니는 소녀처럼 웃었다.

“1980년대 들어서 연탄을 때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여름에 하나라도 아껴 겨울에 쓰려고 절약하는 데 박사가 됐다”는 할머니는 “식량과 연탄만 있으면 암 것도 부러워 않겄”던 시절을 그렇게 떠나보냈다. <10일자에 계속됩니다.>

전남 고흥군 도양읍 소록도. 100주년 기념관. 김종원기자 won@donga.com



● CLIP 한센병은?

과거 ‘나병’이라고도 했다. ‘문둥병’의 시선으로도 아팠다. 1871년 노르웨이 의사 아우메우에르 한센이 발견해 그의 이름을 따와 새롭게 불렸다. 피부나 호흡기를 통해 감염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균에 대한 저항력을 가지고 있어 감염되지 않는다. 지금은 대부분 생후 4주 전에 예방주사인 BCG주사를 접종한다. 과거 병에 걸린 환자들은 후유증으로 지체불구 등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소록도 주민자치회 강선봉 감사는 “2020년께 완전 퇴치될 질환이라는 보고도 있다”고 말했다.


※ 2월23일자부터 격주로 연재 중인 ‘고흥군과 함께하는 이야기가 있는 마을’은 5월 한 달 동안 ‘소록도, 사람들’ 4회 연재로 대체합니다.


소록도(고흥) | 윤여수 기자 tadada@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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