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마을 ①] 고독한 유배자의 땅, 고흥… 이제 그곳은 ‘지붕 없는 도예 박물관’

입력 2016-09-20 05: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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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대 규모의 분청사기 도요지였던 고흥군 두원면 운대리 일대 야산에서는 수백년된 도자기 파편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오른쪽 사진은 2013년 발굴이 이뤄진 운대리 도요지 2호 가마터. 고흥(전남)|김진환 기자 kwangshin00@donga.com

■13. 두원면 운대리 일대 ‘도요지’

세밀한 생활사와 풍속사 혹은 세상의 어긋난 도리에 대한 풍자.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동안 윤색과 와전의 과정을 거치기도 하지만 그나마도 이야기를 낳은 공간에서 나고 자란 어르신들의 입이 아니라면 들을 수 없다. 콘텐츠로서 다양한 이야기가 넘쳐나는 시대, 본래의 설화를 들여다보는 까닭이다. 넘쳐나는 대신 그만큼 사라져가는 진정한 스토리텔링 콘텐츠로서 설화의 가치도 뛰어나기 때문이다. 특히 전남 고흥군은 땅과 바다가 어우러지는 반도의 토양 위에서 먼 옛날부터 이야기가 풍성했던 곳이다. 조선시대 류몽인이 이 곳에서 ‘어우야담’을 쓸 수 있었던 한 배경이기도 하다. 웹툰과 애니메이션, 영화와 드라마 등 다양한 대중문화 콘텐츠의 또 다른 원형일 수도 있을 고흥의 설화를, 스포츠동아가 격주 연재한다.


정치적 거물이 귀양살이 살던 외진 땅
곳곳에는 고려청자·분청사기 가마터
일본인이 눈독 들인 아름다운 도자기
문화재 지정으로 부활한 도예의 고장


전라도 남쪽 해안에 매달린 고흥은 궁벽한 땅이었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그 외진 땅은 부속 섬이 많아 왕권에 맞서는 정적(政敵)이나 정치범들을 유배시키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고독의 땅 고흥은 15세기 무렵 도예산업이 성했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 고려청자와 분청사기를 굽던 수십곳의 가마터가 발견된 ‘도예의 고장’이다. 두원면 운대리의 상대마을과 중대마을 등 4개 마을에서만 30곳이 확인된다. 고려청자 도요지가 5곳, 조선시대 분청사기도요지가 25곳이다. 특히 분청사기를 만들던 가마로는 국내 최대 규모다. 운대리 일대 야산에 지천으로 널린 수백년 전의 도자기 파편이 아직도 쉽게 발견되는 것만으로도 그 규모를 짐작케 한다.

바깥사람들은 도자기로 유명한 운대리 일대를 ‘사구시’라 불렀다. 사기시(沙器市)가 와전된 표현으로, ‘사기(沙器)의 도시’란 의미다. 고흥에 읍(邑)이 하나도 없던 때, 사구시 사람들은 ‘우리는 읍보다 더 큰 시(市)에 산다’는 자랑을 우스갯소리로 했다.

외진 땅 고흥에서 도예산업이 흥했던 이유는 물론 흙이 좋아서였겠지만, 운대리 류금석 이장은 “추측컨대”라는 전제를 강조하며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고흥이 유배지였다는 점이다.

“정치적 거물들이 귀양 와서 특별히 하는 일이 없었으니 도예에 관심을 두지 않았겠소?”

운대리를 병풍처럼 두른 운람산의 서북쪽은 두원천과 운대천이 합류해 득량만으로 흘러가는 하천이 있어 옛날부터 수상교통이 편리했다.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고 물물교역이 이루어진 곳이라고 전해진다. 도자기 운송에 편리한 곳이었다.

운대리 곳곳의 명칭도 도요지의 흔적을 엿보게도 한다. ‘배다리’는 배(화물선)들이 많이 정박한 곳이며, ‘장밭’은 배다리에 인접한 평지로 배다리를 통해 들어온 물물(도자기 등)이 거래된 장터라고 전해진다. 또 운대리 중대마을과 석촌마을 사이 ‘둔부등’은 사구시의 입구이며, 옛날 도자기와 도공들을 보호하기 위해 군부대가 주둔한 곳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인접한 하천 건너편에 바위들이 늘어선 곳에는 ‘장군바위’가 있다. 둔부등 주둔 군대가 훈련장으로 이용했다는 곳이다. 둔부등 맞은편 산꼭대기의 ‘망봉’은 봉화를 피운 곳으로, 도자기를 탈취하려는 무리들의 동태를 살피는 망대였다. 중대마을 일대는 도자기와 도공들을 지키고 보호했던 최후 방어 요지였던 셈이다.

하지만 고흥에선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지나 배고픈 시대를 살면서 도예산업의 중요성이 잊혀져갔다. 먹을 것과 연료가 부족하던 시대, 나무뿌리를 파 땔감을 마련하고 농토를 확장하느라 산지를 개간하는 바람에 많은 도요지가 훼손됐다. 아이들은 지천에 널린 도자기를 깨는 일을 ‘놀이’ 삼았다. 농부들은 밭일을 하다 도자기가 나오면 둑 밖으로 던져버리기도 했다.

특히 안타까운 것은 고흥 도자기의 우수성을 일본인들이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일제강점기 일찍부터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에 눈을 뜬 일본인들이 고흥을 찾아와 도요지는 물론 무덤까지 파헤치며 도자기를 가져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사냥모자를 쓴 일본인들이 마을에 나타나 어린 아이들에겐 사탕으로 달래고, 어른들에겐 돈을 주며 도요지를 물었다. 동네 곳곳에 널브러져있던 고려청자나 분청사기가 문화재로서 큰 가치가 있는 것인지 자각하지 못했던 이들은 그 정보를 넘기고 말았다.

운대리 상대마을 회관에서 만난 정삼수(90) 할아버지는 “옛날엔 외지 사람들이 관광버스를 타고 와 도자기들을 많이 주워 갔다”고 했다.

1961년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고나서야 뒤늦게 고흥 운대리 도요지의 존재와 가치에 정부 당국이 주목하기 시작했다.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지휘로 1973년 가마터 발굴이 시작됐고, 1985년 문화재(전라남도 기념물 제80호)로 지정됐다.

그리고 오랜 옛날 유배자의 땅이 도예의 중심지가 됐고 세월의 풍화를 견뎌낸 끝에 고흥은 이제 다시 ‘지붕 없는 도예 박물관’으로 변모해가고 있다.


● TIP 설화란?


사람들 사이에 오랜 시간 구전(口傳)돼 내려오는 이야기. 신화와 전설, 민담을 포괄한다. 일정한 서사의 구조를 갖춰 민간의 생활사와 풍습, 권선징악의 가치 등을 담은 이야기다.



● TIP 가는길

남해고속도로 고흥 IC→고흥 방면→한천교차로에서 도양·고흥 방면→동강교차로에서 동강·보성·대서 방면 우측방향→우주항공로 따라 18.67km→운대교차로에서 두원·운대리·고흥만방조제 방면 우측방향→운대교차로에서 운대리 방면 좌회전→고흥로 따라 19.92km→고흥 운대리 도요지

고흥(전남)|김원겸 기자 gyummy@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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