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만 번의 트라이’ 영웅들 마침내 고국 땅에 트라이하다

입력 2016-10-14 05: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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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조고 럭비부의 전성기를 일군 오영길 감독이 26명의 선수들을 이끌고 제97회 전국체육대회에 출전했다. 성적은 이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사상 첫 ‘재일조선인 럭비 단일팀’을 만들어 고국을 찾은 자체에 의미가 있었다. 사진제공| 대한럭비협회

■ 재일조선인 럭비팀 첫 전국체전 참가

‘오사카조고 신화’ 주역 오영길 감독
소속 선수 출전 반대 팀 일일이 설득
럭비 발전 넘어 스포츠 교류 이바지


2014년 개봉한 ‘60만 번의 트라이’는 일본 오사카 재일조선인고등학교 오사카조선고급학교(오사카조고) 럭비부의 2010년 전국대회 도전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다. 아시아 최강을 자부하며 럭비에 살고 죽는 일본에서, 그것도 민족·이념적으로 묘한 관계에 놓인 조선인들이 가장 큰 규모의 대회에서 선전한다는 내용의 영화가 개봉됐다는 사실만으로도 대단한 화제를 낳았다.

오사카부터 순차 개봉된 영화는 도쿄, 요코하마, 고베, 나고야, 삿포로, 니가타 등 15개 주요 도시에서 연일 매진 행렬을 이뤘다. 고교 무상화라는 일본정부의 기조에 맞춰 각 지방자치단체가 북한의 핵 도발과 미사일 실험, 일본인 납북자 등 정치적 이유를 근거로 재일조선인학교들에 대한 보조금 지원 중단을 결정한 시점이라 의미를 더했다. 오사카조고 럭비부원들을 비롯한 학생들은 이에 반대하는 메시지를 전하는 등 각별한 활동을 펼쳤다.

그로부터 2년여가 흘렀다. 당시 영광의 주역들이 한국을 찾아 특별한 추억을 쌓았다. 오사카조고 럭비부의 전성기를 일군 오영길(48·사진) 감독과 26명의 제자들이 단일팀을 이뤄 충남 일원에서 펼쳐진 제97회 전국체육대회(7∼13일)에 출전했다. 관심은 그들의 성적이 아니었다. 사상 처음 ‘재일조선인 럭비 단일팀’을 만들어 가깝고도 먼 고국을 찾아온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들 26명의 면면은 각기 달랐다. 오사카조고에서 오 감독과 영광을 누린 제자들도 있지만 도쿄, 요코하마, 나고야의 조선학교 출신들도 제법 많았다. 대학에 진학해 럭비선수로 뛰는 16명 외의 나머지는 사회인이자 클럽 소속이다. 준비과정부터 수월하지 않았다. 24년 전부터 재일조선인들의 전국체전 참가 움직임은 계속됐으나, 민감한 국제기류와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생각할 때 선뜻 결단을 내리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시기도 걸림돌이었다. 전국체전이 개최되는 10월은 일본의 대학럭비리그와 일정이 정확히 겹친다. 많은 일본인들이 “좋은 실력의 조선 출신 선수들이 (럭비 인프라가 부족한) 한국을 찾기보다 대학리그에 전념하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며 만류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오 감독은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탁월한 지도력, 남다른 뚝심과 열정을 통해 일본럭비계가 인정하는 성공시대를 개척한 그다. 올해 초 일본의 유명 실업팀 NTT 도코모 스카우트로 자리를 옮긴 그는 2007년부터 지난해까지 오사카조고를 이끌었는데, 6년 연속(2009∼2014년) 지역리그를 평정하는 한편 꾸준히 오사카대표로 전국대회에 출전했다. 성과 또한 놀라웠다. 2009∼2010년 2년 연속 4강 진입에 성공한 데 이어 2013년과 2014년에도 연속으로 8강에 올랐다. “한국럭비의 인기와 인지도가 높다고 할 수 없지만, 반전의 계기가 필요하다 봤다. 새 지평을 여는 데 조금이나마 우리가 힘을 보태고 싶었다”는 것이 오 감독이 밝힌 이번 전국체전 출전 강행의 배경이다.

약 2개월 전 ‘체전 참가’로 가닥이 잡혔다. 팀 구성이 시급했다. 오 감독은 소속 선수들의 출전을 반대하는 이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머리를 숙였다. 대한체육회 일본지사 조정방 전무이사는 “(오 감독이) 직접 얼굴을 맞대고 진심을 전했다. 그토록 강경히 반대한 사람들의 마음이 서서히 열리고 있음을 느꼈다”고 회상했다. 지극한 정성이 통했다. 전부는 아니었어도 대학 1∼2학년 유망주들을 다수 데려올 수 있었다. 물론 간절히 한국 방문을 희망했음에도 오지 못한 학생들이 훨씬 많았지만, 이 정도면 첫 술로 나쁘지 않았다.

여기에 또 하나의 특별한 이유도 있었다. 어린 선수들에게 한국을 경험시키고, 다양한 문화와 분위기를 직접 느끼고 맛보게 해주고픈 스승의 마음이다. 오 감독은 “선수가 아닌, 인간으로서 성장이 최우선이다. 인간적 성숙함이 있어야 기술도 향상된다. 럭비는 화합과 협력의 스포츠다. 다양한 출신과 배경의 어린 친구들이 소중한 경험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재일조선인 럭비 단일팀은 올해를 계기로 매년 전국체전에 꾸준히 출전해 한국럭비, 더 나아가 한국스포츠와의 교류를 확대할 계획이다.

아산 | 남장현 기자 yoshike3@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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