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마을①] 성 쌓으러 간 아버지…배 속 아들은 그새 열 살이 됐네

입력 2016-12-13 05: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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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왜구 침입을 막기 위해 선조들이 6년 동안 피와 땀을 흘려 쌓은 사도진성은 고흥의 역사를 상징한다는 의미에서 현재까지도 주민들에게 자부심을 안긴다. 고흥(전남)|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19 영남면 금사리 사도진성 설화

세밀한 생활사와 풍속사 혹은 세상의 어긋난 도리에 대한 풍자.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동안 윤색과 와전의 과정을 거치기도 하지만 그나마도 이야기를 낳은 공간에서 나고 자란 어르신들의 입이 아니라면 들을 수 없다. 콘텐츠로서 다양한 이야기가 넘쳐나는 시대, 본래의 설화를 들여다보는 까닭이다. 넘쳐나는 대신 그만큼 사라져가는 진정한 스토리텔링 콘텐츠로서 설화의 가치도 뛰어나기 때문이다. 특히 전남 고흥군은 땅과 바다가 어우러지는 반도의 토양 위에서 먼 옛날부터 이야기가 풍성했던 곳이다. 조선시대 류몽인이 이 곳에서 ‘어우야담’을 쓸 수 있었던 한 배경이기도 하다. 웹툰과 애니메이션, 영화와 드라마 등 다양한 대중문화 콘텐츠의 또 다른 원형일 수도 있을 고흥의 설화를, 스포츠동아가 격주 연재한다.


왜구 침입 막기 위해 쌓은 사도진성
축성 당시 전라도 각지 사람들 모여
임신한 아내 두고 구례에서 온 남자
홀로 아버지 찾아온 아들의 이야기


전남 고흥군 영남면 금사리 사도마을은 바다를 낀 어촌마을이다. 마을 앞바다에는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작은 섬이 여럿이다.

도로에서 마을까지 진입하려면 구불구불 이어진 좁은 2차선 도로를 10분쯤 달려야 한다. 굽이진 해안 길은 마을이 쌓아온 세월의 자취를 고스란히 전하는 듯하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사도마을은 ‘외딴’ 어촌이지만 조선시대에는 달랐다. 이 외진 마을까지 왜구의 침입은 빈번했다. 지대가 높은 마을을 둘러싸고 진성을 쌓은 까닭이다. 이름은 사도진성.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사도진성은 1485년(성종 16년)에 착공해 1491년 완성됐다. 축성에만 6년이 걸렸다.

역사의 기록으로 남아서일까. 사도마을 주민들은 사도진성에 대한 단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예부터 남해 일대에서 손꼽혀온 사도진성을 품고 살아온 사람들은 500년이 지난 지금도 역사가 만들어낸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사도진성…역사의 현장

사도마을은 고흥군이 지정한 마중길 제1코스에 자리하고 있다. 제주의 올레길 못지않게 수려한 풍광과 조망을 자랑하는 산책길이다. 사도진성은 마을 해안선을 중심으로 바다와 산을 잇는 방식으로 축성됐다. 이 곳은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영 산하의 4포(砲) 중 한 곳일 만큼 요충지로 꼽혔다.

마을의 곽충복(60) 이장은 지난 세월 탓에 지금은 많이 훼손돼 드문드문 그 흔적이 남은 사도진성의 위치를 정확히 짚어냈다. 500여 년 전 만들어진 곳이지만, 이를 보존하는 책임은 마을 주민들의 몫이다.

곽충복 이장은 “동네 사람들이 부역을 통해 진성 정비를 해왔다”며 “역사와 함께 하는 마을이라고 봐도 된다. 마을 뒷산에는 사도 봉화대가 있는데, 고흥 마곡산 봉화대와 함께 역사의 큰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고 말했다.

사도진성을 둘러싸고 내려오는 설화도 있다. 축성 당시 사도마을에는 고흥은 물론 인근 지역인 전라북도 순창 남원, 전라남도 구례, 광주의 사람들까지 모여들었다. 그만큼 규모가 컸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 가운데 구례에서 임신한 아내를 두고 고흥으로 온 한 남자가 있다. 사도진성 축조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그 사이 구례에 홀로 남은 아내는 아들을 낳았다. 아들이 훌쩍 자랄 때까지 아버지는 돌아오지 못했다.

아들은 10살이 되던 해, 혈혈단신 아버지를 찾아 고흥으로 왔다. 기록에는 6년간 축조한 것으로 남았지만 실제 사람들이 체감한 시간은 10년에 이른다는 의미다. 오랜 시간 쌓아올린 피와 땀의 결실이다.

곽충복 이장은 “사도마을이 주요 군사 요충지였다는 사실은 이런 현장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며 “다만 진성이 많이 유실된 이유는 50년 전쯤 인근 해창만 간척지를 만들 때 진성에 있던 큰 돌들을 빼 바다를 메웠기 때문”이라고 했다. 너도나도 어려웠던 시절이다.

남아있는 사도진성을 찾는 길은 역사의 한 줄기를 찾아가는 과정처럼 흥미롭다. 다도해의 비경을 마주하고 축성된 사도진성의 일부는 여전히 산 능선을 따라 바다까지 맞닿아 있다. 그 높이면 어림잡아 4미터는 족히 된다.


● 사도마을 옛 이름이 ‘사두마을’인 까닭

사도마을이 가진 설화는 또 다른 이야기로도 이어진다.

사도마을에서 태어나 지금껏 살아온 전영남(75)씨는 마을 설화에 관해서라면 누구보다 할 말이 많다. 그는 사도진성이 유실된 이유는 “해창만 간척지 사업 뿐 아니라 과거 마을에 큰 불이 났기 때문”이라고 했다. 당시 불을 두고 마을 사람들은 “하늘이 내린 불”이라고 부른다.

“옛날엔 사두마을이라고 불렀제. 뱀 사(蛇), 머리 두(頭) 자를 써서. 마을 지형이 꼭 뱀 머리를 닮았거든. 60년 전쯤 마을에 큰 불이 났어. 그땐 마을 사람들 전부 돼지를 키웠는데 불이 나서 그만 모두 타 죽었어. 한 도사가 나타나서는 뱀의 머리에서 돼지를 키우니까 화를 입었다 하더라고.”

그때부터 ‘사두’라는 지명을 사람들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 당시의 상황은 전남영씨의 기억 속에 여전히 생생하다. 돼지가 마을에서 사라진 것도 그때부터다.

지금 사도마을 사람들은 앞바다에서 파래를 키우고, 굴을 따 생계를 잇는다.



● CLIP 가는 길

남해고속도로 고흥 IC→고흥 방면→한천교차로에서 도양·고흥 방면→매곡교차로에서 당곡마을·신정마을 좌측방향→연봉교차로에서 동강·병동마을 방면으로 우측방향 고흥로→연봉교차로에서 점암·연봉리 좌측방향→점암삼거리에서 자연휴양림·도화·포두 방면 우측방향→천학삼거리에서 남열해수욕장·영남방면으로 좌측방향→만호삼거리에서 나도로·능정 방면으로 우회전→팔영로→사도진해안길

고흥(전남) | 이해리 기자 gofl1024@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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