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주 멈춘 ‘적토마’ 이병규 “한 평도 안 되는 타석, 많이 그리울 것”

입력 2016-12-23 0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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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토마’ 이병규. 지칠 줄 모르고 달리던 그가 질주를 멈췄다. 뒤돌아보니 어느덧 프로선수로서 20년을 버텼다. 환희와 좌절, 영광의 때가 묻은 줄무늬 유니폼을 벗고 평범한 옷차림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김진환 기자 kwangshin00@donga.com

신인왕, 안타왕, 잠실 첫 30-30 클럽
뜨거운 팬 사랑까지 내 야구는 성공
줄무늬 유니폼 한 벌로 끝나 행복해
마지막 경기 팬들 함성 잊을 수 없어
전설로 남은 프로 20년, 야구인생 30년
계획? 미국야구 시스템 배우고 싶다


“신인이라고 봐주지 말고 성의 있게 던져주세요.”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처럼, 당돌한 신인의 인터뷰에 모두들 아연실색했다. 1997년 4월15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해태-LG의 시즌 첫 맞대결. 해태 선발투수는 소문난 ‘LG 킬러’ 조계현이었다. 그 시절 LG는 ‘신바람 야구’로 인기몰이를 했지만, 조계현만 만나면 그 신바람도 시들해졌다. ‘싸움닭’이 등판하는 날, 점수를 뽑기는커녕 1경기에 안타 3~4개 때리기도 버거웠던 시절이다.

그런데 단국대를 갓 졸업한 신인타자가 천하의 조계현을 처음 만나 1회말 2루타에 이어 3회말 역전 2타점 2루타를 때리는 등 이날 1경기에서 4타수 3안타 3타점을 올리며 팀 승리에 앞장섰다. 그런데 경기 후 대선배를 향해 “신인이라고 봐주지 말고 성의 있게 던져주세요”라고 말하는 당돌함이란…. 좀 더 일찍, 좀 더 인상 깊게,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풋풋했던 프로 초년병 시절, 인터뷰 스킬도 없었고, 긴장한 나머지 자신도 어떻게 말했는지 모르게 내뱉은 말은 두고두고 회자됐다. 이제는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추억의 에피소드다. 그랬던 그도 이제 나이 마흔을 훌쩍 넘긴 아저씨가 됐다. 그 사이 하룻강아지는 프로야구를 휘젓는 슈퍼스타로 성장했고, 20년간의 프로 생활을 하며 수많은 기록과 전설을 남긴 뒤 무대 뒤로 물러났다. LG의 프랜차이즈 스타 이병규(42) 얘기다.

줄무늬 유니폼을 입고 잠실벌을 달리면서 팬들의 심장을 뛰게 만들 줄 알았던 ‘적토마’. 기도하면 팬들 앞에 한 방을 선물해줄 것만 같았던 ‘라뱅 스리런’. 이제 그라운드와 작별을 고했다. 시즌 후 하루에도 수십 번 은퇴와 현역 연장을 놓고 고민하다 결국 은퇴를 결심했다.

마음이 헛헛했을까. 11월25일 은퇴 발표 후, 그는 한동안 칩거에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훌쩍 여행을 다녀왔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세밑, 그를 세상 밖으로 불러냈다. 올해가 가기 전에 적토마의 야구와 인생을 다시 한번 돌이켜 보고 싶었다. 은퇴 후의 삶과 미래에 대해 그가 그리고 있는 그림은 무엇일까.

전 LG 이병규. 김진환 기자 kwangshin00@donga.com



● 육상선수에서 야구선수로


-은퇴를 결정하고 나니 어떤가.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냥 비시즌에 쉬는 느낌? 그런데 이맘때쯤부터 다음 시즌을 대비해 슬슬 운동을 시작해야하는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고 조금 멍하고 공허하고 그렇다.”


-뭘 하고 지내나.

“하루 종일 집에 있고, 가끔씩 아내하고 바람 쐬러 나가고…. 아, 요즘 골프를 친다. 선수 시절엔 골프 안 쳤는데, 취미로 배우고 있다. 뭔가 때리고 싶어 연습장 다니고 있다.”


-야구선수들 보면 골프 처음 접할 때 ‘날아오는 공도 치는데 가만히 있는 공을 왜 못치냐’면서 덤비더라.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골프는 가만히 있는 공 때리는 거니까 선구안도 필요 없지 않나 싶어 쉽게 생각했다. 근데 그게 아니더라. 기본이 안 돼 있으니까 안 맞는다(웃음). 뭐든 기본이 중요한 것 같다.”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자. 어떻게 야구를 시작했나.

“처음엔 육상을 했다. 800m 선수였다.”


-그때부터 ‘적토마’ 피가 흘렀나보다.

“어릴 때부터 달리는 게 좋았다(웃음). 초등학교 5학년 가을이었는데, 하루는 육상부 훈련이 끝나고 야구부 훈련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때 야구 감독님께서 ‘야구하고 싶냐’면서 권유를 하셨다. 지금도 청구초등학교 야구부 감독을 맡고 계시는 손용근 감독님이다. 때마침 그 시절 육상부도 없어져 쭉 야구를 하게 됐다. 그게 지금까지 이어졌다.”


-부모님의 반대는 없었나.

“반대가 심했다. 무엇보다 집안이 넉넉한 편이 아니었으니까. 그 시절 다 어려웠지만, 우리 집도 3남매 학교 다니는데, 야구를 하면 돈이 많이 드니까 부모님이 반대를 하셨다. 그런데 손용근 감독님이 야구 외에는 신경 안 쓰게 잘 해주셨다. 고마우신 분이다.”


-야구를 해서 성공한 셈인가.

“이만하면 성공한 거지. 내 집 있고, 결혼해서 애들 학교 다니고, 가족들 밥 먹이고….”


-안분지족인가. 요즘 FA(프리에이전트) 몸값 100억원 시대인데, 조금만 늦게 태어났어도 더 큰 돈을 만지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선배님들이 고생하셔서 우리가 혜택을 봤고, 점점 좋아지면서 지금 시대가 온 것이다. 나 정도면 행운아다. 적은 나이도 아니고 서른세 살에 일본도 다녀오고…. 우리 시대에 10억, 20억, 40억이 되더니, 지금 100억 시대가 온 것이다. 지금 선수들이 잘 하면 또 미래가 좋아진다. 메이저리그도 처음부터 시장이 컸던 건 아니지 않나.”


-고등학교 때까지 팀이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병규라는 선수는 주목받지 못했다.

“서대문중학교는 야구부가 아니라 지금 학교 자체가 없어졌다. 장충고는 요즘엔 야구를 잘하지만 내가 다니던 시절만 해도 약했다. 그렇지만 그게 나로선 오히려 더 좋은 점이 있었다. 늘 1학년 때부터 뛸 수 있었다. 장충고 시절 이종열 선배님이 LG에 입단하고 줄무늬 유니폼을 입고 학교에 오셨는데, 그때 내가 고2 때였나? 유니폼이 너무 멋있어서 LG에 입단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꿈이었다.”


-이병규라는 이름 석자가 크게 알려진 것은 단국대 시절이다. 2학년 때인 1994년 대학야구 봄철리그 경남대전에서 혼자서 11타점을 올렸다(당시 이병규는 만루홈런을 포함해 홈런 2방 등 5타수5안타 11타점을 기록했다. 이는 프로야구가 탄생하기 1년 전인 1981년 한국화장품의 김봉연이 한전을 상대로 기록한 역대 아마추어 최다타점 기록인 10타점을 넘어선 신기록이었다).

“그것 때문에 야구하면서 처음으로 이름이 신문에 크게 나고 국가대표도 됐다. 국가대표를 하면서 야구에 더 크게 눈을 떴다. 다른 학교지만 박재홍, 김종국, 안희봉, 문동환, 조성민, 임선동, 조경환, 심재학 선배 등등 쟁쟁한 선수들을 만나게 됐다. 그런 선수들을 보면서, 형들 따라하면서, 실력이 크게 늘었던 것 같다.”

현역 시절 이병규. 사진제공|LG 트윈스 페이스북



● 신인왕, 안타왕, 그리고 배드볼히터


-1997년 LG에 1차지명됐다. 역대 신인 야수 최고 계약금 4억4000만원을 받았다.

“1차지명은 생각도 못했다. 그때 서울 지역 동기들 중에 이경필, 전승남, 백재호 등등 좋은 선수들이 많았다. 강혁은 이미 OB(현 두산)와 가계약을 했었고…. 운 좋게, 그것도 가고 싶었던 LG 1차지명을 받아서 너무 행복했다.”


-‘이병규’ 하면 안타제조기다. 프로데뷔하자마자 151안타에 3할타율(0.305)을 치며 신인왕에 올랐다.

“천보성 감독님이 기회를 주셔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그러면서 성적도 나고, 이렇게 오지 않았나 싶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입학하자마자 주전으로 뛰고, 프로에서도 입단하자마자 주전으로 나갔다. 난 행운아다. 학창 시절 1학년이 3학년 공 쳐보는 게 쉽지 않다. 그런데 1학년 때 3학년 공을 치면서 더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국가대표로 나가서도 쿠바, 일본, 대만의 좋은 투수들을 상대해봤기 때문에 프로에서도 입단하자마자 수준 높은 프로 투수의 공에 더 빨리 적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병규 하면 ‘안타 제조기’, ‘배드볼 히터’라는 이미지부터 떠오른다. 어떤 공도 안타를 만들어내는 타자, 심지어 투수의 원바운드 공도 안타를 만드는 타자 아닌가.

“에이~, 원바운드를 안타 만든 적은 없었다. 원바운드될 뻔한 낮은 공을 안타를 때리긴 했지만(웃음).”


-그만큼 타석에서 공격적이었다.

“볼넷보다는 치고 싶은 욕망이 컸던 것 같다. 일단 배트에 공이 맞아야 무슨 상황이든 일어나니까…. 대신 늘 자신감 갖고 타석에 들어섰다. 눈에 공이 보이면 본능적으로 방망이가 나갔다.”


-배트에 공을 맞히는 ‘콘택트 능력’은 최고라는 평가를 받았다. 한때 4할을 기록할 후보로 꼽히기도 했다.

“4할은 (이)종범이 형 정도나 도전할 수 있는 분야다. 난 막 치는 스타일이라…. 처음엔 안타 욕심이 많았는데, 최다안타 4번(1999~2001년, 2005년)을 했다. 선구안이 안 좋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서 솔직히 나중엔 타격왕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격왕을 하려면 공을 더 많이 봐야하니까, 스타일도 조금 바꾸고, 조금 더 기다리기도 하고, 마인드를 바꿨다. 어쨌든 2차례 타격왕(2005, 2013년)을 했으니 목표를 이뤘다.”


-1999년엔 역대 2번째로 190안타를 넘기고(192안타), 30홈런-30도루 클럽에도 가입했다. 잠실구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하는 서울팀 선수 최초의 기록이다.

“나한테는 의미가 크다. 도루도 도루지만 잠실구장을 홈으로 쓰면서 30홈런을 친 거니까. 우타자야 두산 심정수(1999년 31홈런)나 김동주(2000년 31홈런)가 그 시절 30홈런을 치기는 했지만 좌타자는 없지 않았나(올 시즌 두산 김재환이 좌타자로 37홈런을 기록하기 전까지 잠실을 홈으로 쓰는 좌타자 최다홈런이었다). 김용달 타격코치님의 권유로 오른다리를 들어올려 치는 타격폼(레그킥)으로 바꿨고, 미국에서 오신 이창호 트레이너(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던 시절 전담 트레이너)가 당시 웨이트트레이닝의 중요성을 알려주셨다. 배트도 33인치에서 33.5인치로 바꾸고….”


-그런데 그 이후 홈런수가 줄었다.

“1999년 시즌 후에 한일슈퍼게임 대표로 뽑혀 일본에 갔는데 경기를 하다 발목을 다쳤다. 대회가 끝나고 귀국을 했는데 치료를 하지 못하고 곧바로 군대에 가 4주간 기초군사훈련(1998년 방콕아시안게임 금메달로 병역혜택)을 받았다. 2000년에 18홈런을 기록했으니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김용달 타격코치님이 현대로 가시고, 트레이너도 바뀌고, 혼란이 오더라. 그러면서 타격 스타일이 또 바뀌었던 것 같다. 2003년 무릎수술을 한 영향도 있었고….”


-그 시절 무릎 수술 때문에 세 자릿수 안타를 때리지 못했다. 화려한 연속 기록 속에 이가 빠져 있는 듯한 느낌인데.

“그렇게도 볼 수 있지만, 개인적으론 오히려 고마운 시기다. 독일에서 무릎 수술을 하고 왔는데, 야구에 대한 절실함과 고마움을 느낀 때였다. 재활을 하면서 ‘이제 못 뛰는 것 아닌가’ 싶어 두려웠다. 더 악착 같이 재활을 했다. 그 이후로 10년 동안 아프지 않았다. 그라운드에 복귀해서는 더 간절한 마음으로 더 열심히 야구를 했던 것 같다.”


-국가대표로도 많이 활약했다. 프로 선수가 참가하는 국제대회(아시안게임, 올림픽 예선, 올림픽, WBC) 기록만 뽑아보니 타율만 4할(150타수 60안타)이더라. 4홈런, 35타점, 43득점, 9도루로 태극마크를 달고서도 참 열심히 뛰었다.

“대표팀에 뽑히면 항상 좋았다. 내가 국가대표 하면서 혜택도 받았고, 후배들한테 그 혜택을 돌려주고 싶기도 했다. 거기서도 타석에 많이 들어가고 싶었고 안타를 많이 치고 싶었다.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 금메달, 2000년 시드니올림픽 동메달,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금메달 순간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항간에는 이병규를 두고 ‘게으른 천재’라는 평가도 있다.

“난 그렇게 생각 안한다. 무릎수술로 공백기가 있었지만 그 이후 3시즌을 뛰고 그 나이(33세)에 일본(주니치)에 갔다. 정말 열심히 했기 때문에 나에게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다.”


-통산 2043개의 안타를 때렸다. 역대 최소경기 2000안타 기록도 세웠지만, 일본에 다녀오지 않았으면 더 많은 기록을 세울 뻔했다(일본에서 2007~2009년 3년간 1군 253안타를 포함하면 한일통산 2296안타).

“어릴 땐 3000안타가 목표였다. 누구나 목표는 크게 가져야된다고 생각했다. 해볼 수도 있겠다는 자신감도 들었다. 그런데 일본에 갈 기회가 생기는 순간, 그 부분에 대한 목표는 접었다. 일본에서 2군도 경험했지만 야구인생뿐만 아니라 내 인생에 도움이 되는 시간이었다. 후회는 없다.”


-어떤 도움인가?

“그동안 겪어보지 못한 2군선수들의 설움과 아픔을 이해할 수 있었다. 거기 고참들이 2군에 있으면서 1군에 한 번 올라가려고 정말 열심히 하더라. 1군에 올라가는 선수가 있으면 다들 ‘다시 여기 오지 마라’면서 서로 박수 쳐주고…. 그 시절 2군 경험이 없었다면 어쩌면 올해 2군에서 버티지 못했을지 모른다.”


-우리나라 2군과 비교하면 어떤가.

“우리 선수들이 열심히 안 하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선수들이 조금 더 절실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1군에 저 선수가 있는데 내게 기회가 안 올 거다’고 자포자기하지 말고, 어떻게 해서든 그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목표와 욕심이 있어야한다. 그래서 나도 2군에서 정말 열심히 했다(이병규는 올 시즌 2군에서 타율 0.401을 기록했다). 나도 속으로 ‘올해 안에 과연 1군에 갈 수 있을까’ 싶었지만, 후배들이 보고 있으니까 더 열심히 하려고 했다. 발버둥치고, 부딪쳤다.”

전 LG 이병규. 김진환 기자 kwangshin00@donga.com



● 머나먼 1군, 은퇴, 그리고 미래


-올 시즌 1군 호출까지 참 멀었다.

“선수로서 마무리를 잘 하고 싶었는데, 솔직히 내가 그려왔던 마지막 그림과는 조금 달랐다. 난 자리는 경쟁에서 이기는 사람이 가져가고, 밀려나면 당연히 물러나야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회를 잡기 위해 2군에서 4할이 아니라 5할을 쳐야한다는 생각으로 버텼다. 그런데 마무리할 수 있는 기회가 오지 않았던 것 같다. 메이저리그를 보면 마무리를 하는 기회를 주는 그런 문화가 조금 부럽기도 하다. 우리나라 현실인지 모르지만, 이것도 야구가 발전하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LG를 떠나서라도 다른 팀에서 불러주면 선수생활을 더 하고 싶지 않았나.

“잠시 생각은 해봤지만, LG를 떠난다고 마음먹은 적이 없다. LG 입단할 때부터, 여기서 끝내겠다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이 팀이 내 마지막 팀이라고 생각했다. 내 인생의 절반이 LG인데 여길 어떻게 떠나나. 어쨌든 결과적으로 우리나라에선 LG 줄무늬 유니폼 한 벌로 끝낸 걸 행복하게 생각한다.”


-시즌 마지막 경기(10월8일 잠실 두산전)에 1군에 올라왔다.

“아마 그때 팬들의 함성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날 4회에 대타로 나가는데 응원가가 더 크게 들려왔다. LG 팬들은 정말 열정적이다. 목이 쉬어라 불러주는데, 속으로 ‘이게 마지막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 일부러 타석에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응원가에 머리가 삐죽삐죽 섰다. 말로는 표현이 안 된다.”

스포츠동아DB



-상대투수가 하필이면 최고투수 니퍼트였는데.

“9월에 2군 리그도 일찍 끝나서 솔직히 실전 감각이 걱정됐다. 초구는 무조건 보자고 생각하고 기다렸는데 150㎞짜리 공이 들어오니 안 보이더라. 그래도 그 전에 경험한 니퍼트의 이미지를 그리면서 다음 공을 쳤는데, 정타로 맞지 않았지만 다행히 안타가 됐다.”


-2043개의 안타를 쳤는데, 가장 많이 기억에 남는 안타는.

“많은데, 그리고 모두 소중한데, 지금 제일 기억에 남는 건 마지막 안타다. 그리고 30-30 했을 때 마지막 홈런, 최고령 사이클링히트 때 마지막 3루타도 기억에 많이 남는 안타다.”


-이제 더 이상 야구에 대한 스트레스도 받지 않아도 되니, 좋은 면도 있겠다.

“난 예전부터 잔디를 밟지 않는 겨울이 싫었다. 오죽했으면 선수 시절에도 겨울에 남들은 야구를 잊고 쉬고 싶다는데, 난 도미니카윈터리그에 가서 뛰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겠는가. 아직은 쉬는 것보다 야구를 하고 싶은 모양이다. 요즘 자면서도 야구하는 걸 꿈꾸는 걸 보면….”


-앞으로 계획은.

“구단과 상의를 해봐야겠다. 미국야구 시스템을 배우고 싶다. 경기를 준비하는 과정 등 현장뿐만 아니라 프런트 쪽도 같이 보고 싶다. 기회가 되면 일본도 한 번 더 가보고 싶기도 하다. 선수로 일본에서 뛰어봤지만 벌써 거의 10년 전이라 또 야구가 달라졌을 수 있다.”


-장기간 연수를 가고 싶은가.

“길면 2년 정도 가고 싶긴 한데, 모르겠다. 큰 애(승민)가 야구를 한다. 초등학교 5학년인데 내년에 6학년 올라간다. 벌써 키가 170㎝다. 생각보다 야구를 잘하는 것 같다(실제로 올 초에 구리구장에서 열린 첫 야구경기에 나서 첫 타석에서 초구 만루홈런을 때렸다고 한다). 가족과 함께 미국에 가고 싶은데, 아이 장래를 생각하면 또 고민이 된다. 혼자 다녀올까 싶기도 하고…. 혼자 가면 연수 기간이 짧아질 수도 있다.”

한 평(3.3㎡)도 채 되지 않는 가로 4피트(1.2m), 세로 6피트(1.8m)의 타석. 이병규가 은퇴를 망설였던 것도 그 타석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다. 줄기차게 안타를 생산했던 곳, 나아가 야구인생의 희로애락을 꾹꾹 눌러 담아낸 곳. 그에게 타석은 또 어떤 의미였을까.

“나만의 전쟁터였다. 나 자신과 고독한 싸움을 벌이는 공간,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나만의 공간…. 하루 4번 그곳에 들어서기 위해 야구선수들은 겨울부터 시작해 피나는 훈련을 한다.”

쿠바의 공산혁명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 전 국가평의회 의장은 “시간은 모두에게 찾아온다”는 명언을 남겼다. 그리고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찾아오는 시간을 맞이했다. 11월25일 세계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채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공교롭게도 바로 그날, 이병규도 유니폼을 벗겠다고 발표했다. 카스트로의 말처럼, 영원할 것 같았던 적토마에게도 은퇴의 시간이 얄미우리만큼 공평하게 찾아왔다.

“라뱅 스리런!”, “L~G의 이병규~!” 팬들의 외침을 뒤로 한 채, 레전드의 야구인생 1막이 또 이렇게 마무리됐다. 질주를 멈춘 적토마는 “한 평도 되지 않은 그 치열했던 타석이 많이 그리울 것 같다”며 웃었다.

LG 이병규의 역사는 한국야구 영광의 역사와 궤적을 같이 한다. 국가대표로서 1999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MVP(①) 등 국가를 위해 지속적으로 기여했고, 일본프로야구 주니치(②)에도 진출했다. ‘미스터 LG’로서 2011년에는 올스타전 MVP(③), 2013년에는 LG의 가을야구 숙원(④)을 풀었다. 영욕의 현역 인생을 뒤로 하고, 2016시즌을 마친 뒤에는 은퇴를 결심(⑤)했다. 스포츠동아DB



● ‘적토마’ 이병규


▲생년월일=1974년 10월 25일

▲출신교=청구초∼서대문중∼장충고∼단국대

▲프로 경력=KBO리그 LG(1997∼2006년, 2010∼2016년), 일본프로야구 주니치(2007∼2009년)

▲통산성적=1741경기 타율 0.311(6571타수 2043안타), 161홈런, 972타점, 992득점, 147도루

▲주요수상=신인왕(1997년), 골든글러브 7회(1997·1999·2000·2001·2004·2005년 외야수 부문, 2013년 지명타자 부문), 최다안타 4회(1999·2000·2001년·2005년), 타격왕 2회(2005·2013년), 득점왕 1회(2001년), 올스타전 MVP 1회(2011년)

▲주요기록=서울팀 선수 최초 30홈런-30도루(1999년), 10연타석안타 신기록(2013년 7월3일 잠실 한화전∼7월10일 잠실 NC전), 최고령 사이클링히트(2013년 7월5일 목동 넥센전), 최고령 타격왕(2013년), 최소경기 2000안타(1653경기)

이재국 기자 keystone@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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