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끝내기’ SK 민경삼 전 단장의 GM論

입력 2017-01-13 0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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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민경삼 전 단장은 사진촬영을 어색해했다. 그러고 보니 할말이 있을 때에도 그는 전면에 나서지 않고, 뒤에서 참는 쪽을 택한 적이 많았다.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권력은 아버지와 아들도 나누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나이가 들면 식욕, 성욕은 감퇴되는데 권력욕만큼은 예외다. 야구계 역시 예외일 수 없어 ‘절대반지’라는 탐욕에 눈멀어, 내려갈 타이밍을 잊은 이들의 추락을 곧잘 목격한다. 어쩌면 어떤 사람의 평가는 마무리에서 갈린다. 그런 맥락에서 SK 민경삼 단장(54)의 퇴장은 그 의외성만큼이나 반향을 줬다. 민 단장의 인생은 곧 SK 와이번스 영광과 오욕의 궤적이었다. 영원한 SK 프런트의 수장일 줄 알았던 민 단장은 자기 커리어의 마침표를 스스로 찍었다. 2016년 12월26일 자진사임이 발표됐다. 내려놓음의 미학을 실천한 뒤 가족여행에서 돌아온 민 전 단장을 11일 광화문에서 만났다.

민경삼 전 SK 단장.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 “팀은 바퀴다”

-그만하겠다고 하니, 가족들이 뭐라던가요?

“와이프와 상의 안 했어요. 내가 ‘오래 한 거 아니냐?’고 말했고, 집에서도 긴장 속에서 살았을 테니까 이해하더라고. 뉴스 다 나오고, 제주도 여행가서 얘기했어요. ‘자기가 무를 거야? 밥은 굶겠니?’ 했어요.(웃음)”


-따님(민 단장의 딸 사랑은 각별하다) 반응은요?

“‘아빠, 댓글에서 ’갓경삼‘이라는데 왜 그래?(웃음)’ ‘4년이라는 세월 동안 성적이 안 나오면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말해줬어요.”


-물러나도 야구생각 안 납니까?

“나죠. 가끔. ‘사무실 가야지’ 느낄 때도…(웃음).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해요. 산에도 가고. 혼자 집에도 있고. 와이프는 사골 국물 끓여놓고 나가더라고.(웃음)”


-‘그만둔다’를 입에 달고 살아도 정말 관두는 사람은 드물잖아요.

“마음속에서 정했으니까요. (단장은) 사원이 아니잖아요. 후배들한테 감사해요. 민경삼 머리 하나로 여기까지 왔겠어요? 같이 고민했던 덕분에 SK가 짧은 시간 안에 올라설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나 최근 4년 묻혔고, 그래서 결심이 섰어요. 회사에서 ‘나가’ 이건 아니었는데 결단을 내렸죠.”


-7년(2009년12월~2016년12월)간 롱런한 비결이 뭘까요?

“좋은 후배들, 좋은 감독님들 많이 만나서 가능했죠. 진짜로. 전문가를 인정해주는 SK 그룹 문화에도 감사하고요. 2001년 처음 와서 (허허벌판에서) 일했을 때가 생각나요. 지금까지 걱정했던 일들을 돌이켜보면 ‘(이제 와서 보면)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도 드네요.”


-한국적 현실에서 단장은 비난의 표적입니다. 평상심을 어떻게 유지했나요?

“괴롭죠. 오해 받으면. 그런데 이제 패러다임이 바뀔 거 같아요. 왜? 이제 판이 커졌잖아요. 100억 선수가 나오는데, 매출이 커졌는데, 책임과 보상이 맞물려 갑니다. 미국은 단장이 시스템을 만들어요. 프런트가 때 되면 바뀌는 것이 아니라 현장과 같이 팀을 만들고 책임져요.”


-단장 오래하며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봤잖아요? 현장과 힘의 균형에서 정답은 뭡니까?

“정답 없어요. 필드(field) 매니저와 제너럴(general) 매니저의 개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해요. 필드는 감독이, 전체는 단장이. ‘재료’로 요리 못 만들면 감독에게 우선 책임이 있어요. 그러나 좋은 요리사 못 구한 것은 단장 책임이죠. ‘좋은 재료’를 마련해 플랜을 짜는 것이 단장의 몫이에요. 시카고 컵스 우승 봐요. 테오 엡스타인 단장이 보스턴에서 (2004년 우승을) 해봤으니까 시스템, 장기 플랜을 만드는 게 가능했던 거예요. 팀은 바퀴에요. 찌그러진 데가 있으면 우승 못해요. 그걸 살피고, 구겨진 데가 있으면 펴줘서 팀이 굴러가게 해주는 것이 단장의 일이에요. SK, 삼성이 그랬고, 지금은 두산이 그런 팀이에요.”

민경삼 전 SK 단장.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 평생의 꿈, GM의 길


-단장은 야구를 많이 알아야겠네요.

“야구뿐 아니라 경영도 알아야죠. 팬들의 니즈(needs)가 무엇인지도 알고. 말 그대로 ‘제너럴’해야 해요.”


-야구인 출신 단장의 선구자 격인데요. 유리한 점은 뭔가요?

“선수, 코치, 프런트 경험이 있으니 가려운 데가 어딘지 눈에 보이죠. ‘저 사람이 뭐가 필요하고, 내가 어디까지 해줘야 할지’ 그런 감이 남보다 좋지 않았나 싶어요,”


-한국적 풍토에서는 현장과의 소통이 개입과 혼동될 때가 있죠.

“‘너 야구 알아?’ 이게 현장이 프런트를 보는 여태까지의 방식이었죠. 그 프레임에서 프런트는 현장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패턴이었죠. 한쪽 바퀴로 굴러갔어요. 그런데 이제는 프런트가 ‘왜 필요한 거죠?’라는 말을 현장에 할 수 있어야해요. 프런트도 이유를 공감하는 것이 중요하죠. 여태까지는 못했죠. 그러다 기업은 쓰지 않아도 될 비효율이 발생했고요.”


-결국 야구단도 운영, 마케팅 등 분야별 전문가 집단이 중용되겠네요.

“그렇게 될 거 같아요. 특히 SK는 ‘스포테인먼트’로 한국 프로야구 발전에 상당히 기여했다고 봐요. 당시 야구가 위기였어요. 신영철 사장님 비롯한 윗분들이 연속성을 가지고 마케팅 개념을 바꿨어요. 선수들부터 ‘야구만 잘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바뀌었어요. 누구 덕분에 있는 것인지 아는 거예요.”


-단장이라는 권력에 오래 있으면 사람을 많이 잃을 수밖에 없겠죠?

“제일 힘든 게 헤어질 때. 선수 정리해야 되죠. 성적 안 나면 코치, 감독과 헤어지고. 팬에게 비난받고. 혼자 끙끙거리는 스타일인데. 별명이 ‘양은냄비’에요(웃음). 그러니까 후배들에게 고마워요. 다 받아줘서.(웃음) 어쩔 수 없어요. 왜 회사에서 비서 주고 방 줘요? 그게 권한과 책임이니까…”


-성공한 야구선수는 아니었잖아요?

“그렇죠. 그때도 자발적으로 은퇴했어요. 성격 같아요. 1993년 캠프 끝나고. 당시 LG 어윤태 단장님이 프런트 들어오라 해서 들어섰죠.”


-잘하지도 못했던 야구선수가 단장이라는 정점까지 올라갔습니다. 무엇이 달랐을까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꿈이요. LG에서 박종호 이종열 유지현 송구홍이 쑥쑥 크는 게 보였어요. 내 자리가 없겠다 싶더라고요. LG에서 프런트 제의했는데 내가 매니저를 선택했어요. 선수단과 프런트를 같이 볼 수 있는 자리라서. 그땐 매니저가 예산도 짜고, 관여했던 시절이거든요. 코치도 5년 해봤는데 바람을 너무 타요. 그 이후 프런트 인생이었어요. 당시에는 우스웠겠지만 ‘야구선수 최초의 단장 한번 해 보겠다’ 했죠. 박노준 단장이 (히어로즈에서) 먼저 했지만요.

민경삼 전 SK 단장.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 내려놓은 자의 행복


-세상을 떠난 아드님 이름으로 기부를 하는 것으로 압니다.

“(민 단장의 외아들인 故 민선홍 군은 2013년 희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가슴에 묻은 아들 이야기에 민 단장의 눈시울이 약간 붉어졌다. 지금도 민 단장 지갑엔 아들의 사진이 들어있다.) 매년 1500~2000달러씩 뉴욕 메츠 인턴 하는 친구들 위해서 기름값이라도 하라고…(선홍 군은 메츠에서 인턴으로 일했다.) 아들 이름으로. 거기 인턴이 얼마나 힘들게 일하는지 아니까…. 아들이 야구 엄청 좋아했어요. 김광현(29)과 1살 차이였는데….”


-여기까지 오는데 고마운 사람을 꼽는다면요?

“남들이 ‘저 사람은 운도 좋아’ 그럴지 모르겠지만 100% 사람 덕분에 여기까지 할 수 있었어요. 내가 잘나서 한 거 하나도 없어요. 사장님들이 역량 펼치게 해주셨고. 아래에는 ‘너희들 합의 봐. 윗사람은 내가 설득할게.’ 이렇게 일했어요. 직장인이 보람 느낄 때가 언제에요? 월급 오를 때, 승진될 때, 그리고 자기 성취감 느낄 때에요. 성취감은 리더가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거예요.”


-단장은 큰 결정을 하는 자리입니다. 오판에 대한 두려움은 숙명 같은데요.

“그렇죠. 외국인선수 스캇도, 라라도 그렇고. 다 내 잘못으로 귀결돼요. 외국인선수가 실패하면 스카우트에게 그랬어요. ‘너랑 나랑 300만 달러 해먹었다’고(웃음). SK는 실패에 관대한 문화가 있는 편이에요.”


-단장을 꿈꾸는 이들에게 첫머리에 해주고픈 말이 있다면요.

“전문가적 지식, 설득력, 추진력 이렇게 3가지에요. 야구 매출이 크니까 이제 비전문가에게 맡기기 쉽지 않아졌어요. 야구한 사람도 야구뿐 아니라 전체를 볼 수 있는 눈을 넓혀야겠죠. 단장은 선수만 보는 자리가 아니에요. 수많은 사람을 봐야 해요. 그러려면 대화가 되어야 해요. 회계, 홍보, 심리까지 이해력이 있어야 돼요.”


-프런트로 일해서 좋았던 적이 있었습니까?

“좋은 맛은 2003년 SK의 첫 한국시리즈에요. 그때 친구들이 2007년 이후 (6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과 3회 우승) 기틀이 됐죠. 나쁜 맛은 SK그룹에 노이즈가 나게 했던 일들이에요. 죄송하게 생각해요. 책임을 늘 느껴요.”


-제가 보기엔 지금이 제일 좋아 보이는데요.(웃음)

“그렇죠?(웃음) 항상 초조했는데…. 원 없이 했어요, 꿈도 이뤄 단장도 됐고, 우승도 해봤고. 남들이 어렵다는 대형계약도 해봤고. 해볼 수 있는 것은 SK에서 다 해봤네요.”

선수로서, 코치로서, 프런트 실무직원과 수장인 단장으로서, 민 전 단장은 11번의 한국시리즈를 경험했다. 이 중 5번 우승했고, 이 중 3차례는 SK 프런트 핵심으로서 이뤄낸 것이다. 단장으로서 7시즌 동안 487승을 거뒀고, SK에서 일한 16년간 1000만 명의 관중이 인천SK행복드림구장을 찾았다. 이 숫자는 변할 수 없다.


● 민경삼 SK 전 단장

▲생년월일 1963년 2월 24일
▲신일고~고려대~고려대 대학원 석사
▲MBC청룡(1986~1993)~LG매니저(1994~1996)~LG 수비코치(1997)~SK 운영팀장·운영본부장(2001~2009)~SK 단장(2010~2016)

김영준 기자 gatzby@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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