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기획W] 레전드들이 말했다 “나에게 영구결번이란”

입력 2017-06-23 0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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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LG 이병규(9번)는 KBO리그 역사상 13번째 영구결번의 주인공이 됐다. 이병규에 앞서 영구결번에 지정된 역대 레전드들은 “영광”, “자부심”이라는 단어로 영구결번의 의미를 표현했다. 사진제공|LG 트윈스

LG는 20일 이병규의 등번호 9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이병규는 KBO리그 역사상 13번째 영구결번의 주인공이 됐다. 영구결번은 1986년 OB 고(故) 김영신의 ‘54번’이 최초였다. 이후 선동열(해태), 김용수(LG), 박철순(OB), 이만수(삼성), 장종훈(한화) 최동원(롯데) 등 한국야구를 대표했던 레전드들의 등번호가 영원히 역사에 남는 영광을 누렸다. 이들에게도 ‘영구결번’의 의미는 남달랐다. 장종훈 현 롯데 코치는 “상상도 하지 못 했던 일이었다”고 당시의 감격을 떠올렸고, 이종범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도 “구단이 앞으로 이 팀에서는 7번을 달고 이만큼 해줄 선수가 없다는 의미를 담고 결정해주신 것 아닌가. 항상 감사한 마음이고 개인으로서도 굉장한 영광이다”고 말했다.



● 이만수 “ML 낯선 땅에서 축하 받은 영구결번”

이만수 전 SK 감독은 1997년 삼성에서 유니폼을 벗었다. 그러나 이 전 감독이 사용했던 등번호 22번이 영구결번으로 결정된 것은 7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2004년이었다. 이 전 감독은 영구결번이 결정된 날의 기쁨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는 “당시 메이저리그 시카고 화이트삭스에서 코치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영구결번이 됐다는 소식을 삼성을 통해 전해 들었다”며 “감격스러워서 친한 코치에게 살짝 말했는데 그 코치가 나 모르게 구단에 얘기를 했던 모양이다. 경기 도중 불펜에 있었는데 갑자기 관중들이 나를 향해 기립박수를 쳐주는 게 아닌가. 선수들도 환호를 보내줘서 어리둥절해 있었는데 전광판을 보니 시카고 화이트삭스가 나에 대한 스토리가 담긴 영상을 틀어주면서 한국에서 영구결번 된 사실을 알리고 있었다. 메이저리그에서도 영구결번은 흔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특별히 축하해주기 위해 영상을 만들었다고 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 깜짝 놀랐고 정말 감동했다”고 말했다.

이 전 감독의 심금을 울렸던 것은 낯선 땅에서 받은 갈채만이 아니었다. 자신이 사용했던 등번호가 영구결번이 되기까지 팬들의 성원이 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였다. 이 전 감독은 “팬들이 강력하게 원했기 때문에 영구결번이 결정됐다는 것을 안다. 그 마음이 정말 감사해서 눈물이 났다”며 “야구인으로서도 기쁜 일이다. 내가 없더라도 손자가 나중에 할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지 않겠는가. 대대로 이어지는 영광이라서 감사하다”고 거듭 고마워했다.

전 삼성 이만수. 사진제공|삼성 라이온즈



● 양준혁 “장효조 선배 등번호에 부끄럽지 않게”

이만수 전 감독의 뒤를 이은 삼성 레전드는 양준혁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이었다. 그가 사용했던 10번은 2010년 사자군단에서는 영원히 사용할 수 없는 등번호로 남았다. 양 위원에게도 10번의 의미가 남달랐다. 삼성의 또 다른 레전드 고(故) 장효조 전 2군 감독이 썼던 등번호였기 때문이다. 양 위원은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올라갈 때였다. 장효조 선배가 후배들을 가르치기 위해 모교(대구상고)를 찾았는데 당시 나에게 타격기술을 가르쳐주셨다”며 “그때는 내가 특별하게 눈에 띄는 선수가 아니었음에도 당시 고등학교 감독님께 ‘괜찮으니까 한 번 믿고 써보라’고 추천을 해주셨다. 덕분에 1학년 때부터 4번타순에 들어갔고, 프로에 와서 계속 야구를 할 수 있었다”고 추억을 꺼냈다.

양 위원에게 장 전 감독은 ‘우상’이었다. “타격스타일은 다르지만 같은 왼손잡이였고 어릴 때부터 선배의 야구를 쭉 지켜봐왔다”고 할 정도였다. 우상에서 인정을 받은 양 위원은 장 전 감독이 달고 뛰었던 10번에 부끄럽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했다. 그 결과 KBO리그 역사에 남을 타격 기록을 쓰면서 구단 역사상 2번째 영구결번이라는 영광을 누렸다.

전 삼성 양준혁. 사진제공|스포츠코리아



● 장종훈 “35번은 나에게 행운을 가져다준 등번호”

‘레전드의 산실’ 한화에서 최초로 영구결번의 주인공이 된 이는 장종훈 현 롯데 코치다. 그는 연습생으로 시작해 1990년대 홈런왕으로 우뚝 서는 ‘신화’를 만들었다. 한화는 장 코치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35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장 코치도 ‘구단 최초’라는 사실에 의미를 부여했다.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일이었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고 정말 영광이었다”고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장 코치가 처음 35번을 달았을 때 그리 유쾌한 기억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는 “처음 프로에 들어왔을 때 연습생 신분이었고 달 번호가 없었다”며 “0번부터 51번까지 다 주인이 있어서 지금 (김)태균이가 달고 있었던 52번을 달았는데 예전에는 20번대가 넘어가면 후보선수라는 의미가 있었다. 52번은 너무 창피하니까 어떻게든 앞당겨보려고 룸메이트 형이 은퇴하면서 남긴 35번을 달았는데 그 번호도 썩 좋은 번호는 아니었다”고 귀띔했다.
35번은 장 코치에게 ‘운명’이었다. 그 번호를 달자마자 1군 출전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장 코치는 “번호를 바꾸자마자 기회가 찾아왔다. 행운을 가져다준 번호니까 바꿀 수가 없더라”며 웃고는 “지금은 35번에 애착이 크다. 다시 달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길 가다가도 숫자 ‘35’가 보이면 어쩔 수 없이 시선이 간다. 딴 것보다 팬들의 성원이 없으면 영구결번이 되기 힘들지 않나. 팬들의 마음을 잘 알기 때문에 35번을 달고 뛰었던 게 항상 감사하다”고 말했다.

전 한화 장종훈. 사진제공|한화 이글스



● 이종범 “가장 잘하는 유격수라는 영광의 7번”

이종범 위원에게도 ‘7번’은 남다른 애착이 있는 번호다. 단순히 영구결번이 돼서가 아니다. 한국프로야구에서 ‘7번’은 뛰어난 유격수를 의미한다. 지금은 의미가 희석됐지만 예전에는 특정 포지션을 상징하는 번호가 있었다. 이만수 전 감독은 “보통 투수는 1번을 달고 포수는 2번을 선택했다. 그래서 포수인 내가 22번을 달았다”고 귀띔했다. 장종훈 코치도 “옛날에는 등번호마다 의미가 있었다. 좌완투수는 21번, 우완투수 18번, 포수는 2번이나 22번을 다는 게 관례였다”고 설명했다.

김재박 전 감독의 현역 시절을 닮고 싶었던 이 위원도 7번에 욕심을 냈다. 이 위원은 “김재박 감독님은 최고의 유격수였다. 감독님 현역 시절 등번호가 7번이었고, 나 역시 7번을 달고 뛰고 싶었다”며 “본격적으로 7번을 달았던 건 초등학교 6학년부터였다. 선배들이 쓰고 있으면 쓸 수 없었지만 중학교, 고등학교에서도 가능한 7번을 달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이 위원은 7번에 어울리는 선수였다. ‘투수는 선동열, 타자는 이승엽, 야구는 이종범’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공·수·주에서 빼어난 활약을 펼쳤다. 이 위원은 “영구결번은 단순히 야구만 잘 하는 게 아니라 인성, 팬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스타가 돼야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며 “7번을 달고 뛰고 싶어 하는 유격수 후배들이 많다는 것을 아는데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안주하지 말고 좀더 노력해서 그 번호에 어울리는 선수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전했다.

동아닷컴DB



● 김용수 “결번식은 내가 최초…영구결번은 자부심”

이병규 이전 LG의 첫 영구결번의 주인공은 김용수 전 LG 코치였다. 김 전 코치의 41번은 MBC 청룡부터 쌍둥이군단을 응원해온 팬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 있는 번호다. 김 전 코치가 41번을 달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처음에는 38번을 달고 뛰다가 무릎을 다쳤고 잠시 쉬고 있을 때 김동엽 전 감독이 ‘38번’을 달게 되면서 새로운 번호를 선택해야했다. 14번을 원했지만 선배의 등번호여서 차마 달라고 할 수 없었다. 14번을 달지 못하게 되자 결국 부상으로 은퇴하게 된 동기의 등번호였던 41번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김 전 코치는 “친구들이 ‘41번을 달았으니 이제 곧 선수생활을 그만두게 될 것’이라고 놀렸는데 오히려 더 길게 했다”며 웃고는 “시작할 때만 해도 특별한 의미는 없었는데 하다보니까 애착이 가게 됐다. 41번을 달고 등 뒤에서 보면 숫자 밸런스가 좋다. 지금도 그 번호를 보면 흐뭇하다”고 말했다.

41번을 두고 김광삼 현 LG 재활코치와의 에피소드도 있다. 김 전 코치는 “41번에 얽힌 사연은 많다. 은퇴할 때 지금은 코치인 (김)광삼이가 41번을 달고 싶다고 했다. 흔쾌히 그러라고 했는데 3~4일 뒤에 영구결번이 됐다. 결국 김광삼 코치가 못 달게 됐다”며 웃었다.

김 코치는 인터뷰 내내 유쾌하게 말했지만, 영구결번에 대한 자부심만은 남달랐다. 사실상 레전드의 업적을 기리는 영구결번은 1999년 김 코치의 41번부터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KBO리그 최초 영구결번 주인공은 OB 김영신이었지만 이는 선수의 자살로 인해 ‘그 번호를 쓰지 말자’는 의미로 결정된 일이었다. 공식적으로 결번식을 치른 것도 김 전 코치가 처음이었다. LG 구단은 1999년 시즌 도중 사상 최초로 개인통산 100승-200세이브를 올린 기념으로 현역 선수에게 결번식을 해줬던 것이었다. 그는 2000년까지 뛴 뒤 은퇴했다.

전 LG 김용수. 사진제공|LG 트윈스


이보다 앞서 선동열 전 감독은 해태 시절이던 1996년 일본(주니치)으로 진출하면서 자연스럽게 영구결번이 된 사례다. 현역으로 해태에 복귀하면 다시 달 수 있도록 비워뒀는데 1999년에 일본에서 은퇴하면서 18번을 아무도 쓸 수 없도록 된 것이었다.

김 전 코치는 “최초라는 것에 자부심이 크다. 또 선수 존엄성을 높이기 위해 구단과 팬들의 인정해주는 거니까 굉장히 영광스럽다”고 의미를 부여하고는 “영구결번은 선수의 ‘얼굴’이다. 이병규가 지금은 해설을 하고 있지만 지도자로 현장에 복귀했을 때 영구결번에 어울리는 행동이 필요하다. 비단 LG뿐 아니라 우리나라 프로야구를 대표한다는 마음으로 모범적인 모습을 보였으면 좋겠다”고 따뜻한 조언을 건넸다.

홍재현 기자 hong92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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