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밀리가 떴다] 조교사·기수 부자 이희영·이혁 “제대 앞두고 휴가 나온 아들 몸무게가 궁금했지”

입력 2017-08-23 05:45:00
카카오톡 공유하기
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렛츠런파크 서울의 유일한 조교사와 기수 부자(父子). 아버지 이희영 조교사(왼쪽)는 1977년 한국마사회 기수 4기로 시작해 조교사가 됐다. 아들 이혁 기수는 29기다. 말(馬)과 공감하며 살아가는 용감한 부자는 경마를 향한 세상의 모든 편견을 뒤로한 채 결승선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과천 ㅣ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 경마 조교사·기수 부자 이 희 영·이 혁

■ 마사회 4기 기수 출신 조교사 아버지 이희영

나도 어릴 적 말도 타고 돈도 번다는 말에 혹
마군사관학교 악명…훈련 힘들어 도망치기도
부상에 시달리며 결국 10년 만에 기수 은퇴
조교사 되니 이제 부모님 걱정 안 시켜 좋았지

■ 29기 기수 아들 이혁

대학 1년 마치고 입대…공부는 적성 안 맞아
명색이 조교사 아들이지만 말 타본 적 없었죠
기수시험 합격…데뷔 첫 승 거둔 다음날 부상
빠진 뼈 끼워 맞추면서도 아버지껜 고통 숨겨


렛츠런파크 서울에는 부자(父子)사이인 조교사와 기수가 있다. 이희영 조교사와 이혁 기수다. 아버지는 1977년 한국마사회 기수 4기로 경마에 입문해 조교사로 전직했다. 아들은 기수 29기다. 2011년 데뷔해 렛츠런파크 서울에서 프리기수로 활동 중이다. 아버지가 관리하는 말을 타고 아버지에게 통산 500승과 600승을 안겨 화제도 됐다. 아버지는 아들이 말을 탈 때마다 “제발 한바퀴만 무사히 돌아오라”고 기도한다. 아들은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이 자랑스럽다. 유혹이 많은 경마계에서 40년 넘게 한 길을 걸어온 뚝심을 존경한다. 우리를 향한 주위의 색안경을 바꾸고 싶은 생각은 없다”고 했다. 말과 공감하며 피니시 라인을 향해 달리는 용감한 부자의 얘기다.


● 기수가 된 것은 아버지의 운명이었다.

아버지는 1976년 경마계에 첫 발을 내디뎠다. “1976년 고교진학을 앞뒀는데 주변에서 기수라는 일을 알려줬다. 말도 타고 돈도 번다는 얘기를 듣고 시험을 봤다. 70명이 봤는데 11명을 후보생으로 뽑았다. 사실 기수가 무엇을 하는 것인지는 잘 몰랐다. 말을 탄다고 하니 ‘나중에 잘하면 기마경찰이 될 수도 있겠구나’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기수 후보생으로 1년간 혹독한 교육을 받았다. 당시 마사회는 군대식 교육에 선후배 규율도 엄격했다. 군출신 교관 밑에서 고된 과정을 마치고 1977년 졸업해 마사회 정기 4기가 됐다. 동기 가운데 남은 사람은 부산에서 활동하는 김영관 조교사 뿐이다. “당시 우리를 마군사관학교 생도라고 불렀다. 육군 사관생도나 철도고등학교 생도처럼 정복을 입고 워커를 신고 다녔다. 양성소에서 생활했는데 군대식으로 일조일석 점호를 하고 내무반에서 생활했다. 야구방망이로 많이 맞아봤다. 훈련이 힘들어 포기하려고 한 적도 많았다. 도망쳤다가 잡혀오고 다시 교육을 받았다.”



● 아들은 아버지의 권유로 기수가 됐다.

계기는 우연찮게 왔다. “아들에게 위험한 기수 일을 시킬 생각은 없었다. 어릴 때 주위에서 아들을 보고 ‘야무지게 생겼다. 크면 기수 시켜라’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정작 그런 생각은 없었고 그런 꿈도 준 적이 없었다.”

인하대 항공기계과에 진학한 아들은 1학년을 마치고 입대했다. 제대를 앞두고 마지막 휴가를 나왔다. 외국연수를 준비하던 차에 아들의 몸무게가 궁금했다. 기수는 몸무게가 생명이다. 기량이 좋아도 체중 때문에 할 수 없는 특별한 직업이었다. 때 마침 기수를 뽑는 시험이 다가올 1월에 있을 예정이었다. 아들의 제대 예정일은 12월이었다.

아들은 고민했다. 공부가 힘들었다. 생각과는 맞지 않았다. 그래서 우선 군에 갔다. 군에서 장래를 고민했다. “공부가 내 적성에 맞는지 생각이 많던 차에 기수를 제안 받았다. 체구는 작았지만 나름 운동신경도 있다고 자부하던 터였다. 공부보다는 운동에 도전하는 것이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은 제대하자마자 기수 시험을 준비했다. 명색이 조교사 아들이지만 그 전까지는 말을 타 본 적도 없었다. 아버지는 집에서 말(馬)은 물론 업무와 관련된 얘기를 하지 않았다. 마방에 아들을 데려간 적도 없었다.


● 아들에게 말을 태워주지 않은 아버지, 아들은 스스로 찾아가서 말을 탔다

기수 시험을 앞두고 처음으로 마방의 아버지를 찾아갔다. 말을 타보고 싶다고 했다. 아들의 청을 들어줬다. 가장 기본적인 기술만 배워서 시험을 봤다. 서류전형과 체력테스트를 통과했다. 이후 4년간 기수 후보생으로 교육을 받았다. “도중에 체력적으로 힘들어서 그만둔 사람이 많았다. 매일 새벽 4∼5시에 일어나 운동을 하고 마굿간을 치우는 일을 못 견디고 그만뒀거나 체중조절이 힘들어서 포기한 경우도 많았다.”

기수들에게 체중은 숙명이다. 인위적으로 약을 먹으면서 살을 빼는 것은 금지된다. 매주 말을 타야하는 직업의 특성상 항상 굶고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이런 힘든 과정을 겪고 마침내 29기 기수가 됐다.

한국마사회. 이희영 조교사(오른쪽)와 이혁 기수. 과천 |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 아버지는 10년 만에 기수를 그만두고 새 인생을 개척했다.

1977년에 기수가 된 아버지는 1986년 12월 4일부로 조교사 면허를 받았다.

기수로서 8년 이상 활동해야 조교사 시험을 볼 자격을 주는데 그 기회가 생기자마자 전직을 했다. 기수를 일찍 그만둔 이유는 부상 때문이었다. 하다 보니 여기저기 많이 다쳤다. 어깨, 허리, 척추와 대퇴부에 골절 등 부상이 많아 성한 곳이 없었다. 그 후유증으로 최근 수술을 받았다. 아버지는 부모님을 위해 일찍 기수은퇴를 결정했다. “조교사 되고 가장 좋았던 것은 더 이상 부모님 걱정을 시키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 조교사 시작 1년 만에 대상 우승을 차지하다

13조 마방에서 13마리의 말로 조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대부분 다른 마방에서 준 말이었다. 이 가운데 한 마리가 ‘청하’였다. 호주산 2살짜리 말. 기본기가 있고 잘 생기고 근성도 있었다. 선행마답게 한 번 앞서면 절대로 역전당하지 않고 내달렸다. 1987년 12월 13일 그랑프리 대회에서 ‘청하’가 예상 못한 우승을 차지했다. 조교사 생활 1년 만에 찾아온 행운이었다.

당시 대상경주에 나갈 자격에서 모자라 예비마로 들어가 있다가 대타로 출전했다. ‘청하’는 출발하자마자 맨 앞으로 뛰쳐나갔다. 3코너를 돌때까지 뒤처지지 않았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얼른 양복을 걸쳤다. ‘청하’는 기대대로 끝까지 앞서서 달렸다. 이희영 조교사에게 가장 기억나는 경기였다. 아들과는 500승 600승을 함께 했다. 499승에서 아홉수에 걸려 있었는데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들이 기대하지 않았던 승리를 선물했고, 600승 때는 8개월이나 쉬어 인기가 없던 말을 가지고 생각도 못한 추입으로 우승을 안겼다.



● 아들의 첫 승은 아버지가 관리하는 말이었다.

‘다마스룰러’였다. 성격이 난폭해 걱정도 했지만 아들은 잘 탔다. 호사마다라고 할까. 아들은 데뷔 첫 승을 거둔 다음날 부상을 당했다. 훈련 도중이었다. 아버지가 급히 병원에 도착했을 때 아들은 빠진 뼈를 다시 끼우기 위해서 잡아당겨 다시 맞추는 치료를 받고 있었다. 엄청난 고통을 각오해야 하는 순간에도 아들은 아버지를 보고 표정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만큼 기수는 강해야 한다. 경주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 “레이스를 하다보면 앞서가는 말의 뒷다리가 보이는데 무섭다. 하지만 그 두려움을 이겨내야 한다. 다쳐서 병원에 입원할 때는 아찔하다. 워낙 순식간에 사고가 벌어지기 때문에 정신도 없다. 그 순간이 기억나지도 않는다. 나중에 ‘아 그때 죽을 수도 있었겠구나’ 하고 느낄 뿐이다.” 기수는 위험한 직업이다. 무서워하면 말을 못 탄다. 특히 말에 떨어지는 부상을 당한 뒤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면 다시 할 수 없는 것이 기수다.


● 경마는 ‘馬7人3’이다.

말의 능력은 우승의 가장 큰 요인이다. 사람들은 조교사 아버지가 아들에게 좋은 말을 줘서 편하게 우승하겠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물론 그랬더라면 우승 기회가 더 많았겠지만 그것은 마방과 경마의 시스템을 모르는 사람들의 편견일 뿐이다.

조교사 아버지는 기수 아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기수는 마주가 결정한다. 아버지 입장에서는 좋은 말에 아들을 태우고 싶은 마음은 있어도 자신이 먼저 아들을 태워달라고 할 수는 없다. 꺼려하는 마주도 있다. 혹시 자기 말을 타다 사고가 났을 경우 서로가 불편해지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아들이 말을 타면 항상 제발 한 바퀴만 무사히 돌아오라고 기도한다. 아들이 말을 타다가 떨어지는 것도 여러 차례 봤다. 아버지는 아들이 기수 면허를 받자 “다치지 말고 열심히 해라”는 한마디만 했다.



● 아들은 아버지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으려고 더 열심히 살았다

기수후보생 때나 기수로 데뷔한 뒤로도 누구누구의 아들이라는 꼬리표는 부담이었다. 아들은 그래서 더 열심히 했다. 인간관계나 생활에서 열심히 아버지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했다. 먼저 인사하고 밝은 표정으로 생활했다. 누구누구 아들이 건방지다더라는 얘기를 듣지 않으려고 스스로 엄격하게 남보다 더 열심히 뛰어다녔다.

다행히 열심히 한 덕분에 현재 렛츠런파크 서울에서 상금 톱10 안에 드는 성적을 내며 프리기수로 활동 중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2015년 ‘코스모스킹’으로 과천시장배 대상경주에서 우승도 했다. 이제 부자(父子)는 한국을 대표하는 대상경주에서 우승하기를 꿈꾼다.


● 조교사 아버지가 아들에게 건네는 충고.

조교사와 기수는 유혹이 많은 직업이다. 모든 사람들이 경마 정보를 얻으려고 하는 대상이다. 그래서 친구 선배 등 주위에 현혹되지 않도록 관리와 처신을 잘해야 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정에 끼었다가 경마계를 떠나간 경우도 많았다. 이런 사례를 많이 봤던 아버지는 아들에게 친한 사람일수록 경계하라고 충고했다.

“네가 먼저 돈을 네라. 신세를 지면 미안한 마음에 보답하려고 하는데 그러면 문제가 된다. 항상 행동에 조심해라. 여기는 냉정한 곳이다. 이미 떠난 사람과도 인간적인 관계뿐만 아니라 주위와 모든 인연을 끊어야 하는 직업이다. 우리는 아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두렵다. 부정은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우연찮은 과정에서 문제가 나온다. 마사회에는 뛰는 말(馬)도 많지만 유언비어 즉 말(言)도 많은 곳이다”고 항상 얘기했다.

아버지는 그래서 명함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 손에서 어떻게 쓰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 직업은 남들에게 궁금증을 줄 수밖에 없는데 사람들이 이것저것 물어보면 대답해줘야 하고 그것이 정보로 둔갑할 수 있어서 가능한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 그래서 기수나 조교사는 주변에 사람이 없다. 외롭다. 운명이다.”


● 이희영 조교사

▲소속조=13조
▲생년월일=1960년 8월 16일
▲조교사 데뷔=1986년 12월 4일
▲대상경주 우승=1987년 12월 13일 그랑프리(G1) ‘청하’, 2000년 9월 17일 일간스포츠배 ‘그로브레이디’, 2009년 9월 6일 ‘칸의 제국’, 2014년 10월 11일 과천시장배 ‘코스모스킹’


● 이혁 기수

▲소속조=프리기수
▲생년월일=1987년 1월 5일
▲기수 데뷔=2011년 8월 24일
▲기승중량=51Kg
▲기수 데뷔=2011년 8월 24일
▲대상경주 우승=2014년 10월 11일 과천시장배 ‘코스모스킹’

김종건 기자 marc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뉴스스탠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