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타자 이승엽의 23년’을 말한다!…③‘어떤 날’들에 대한 기억

입력 2017-08-25 05:30:00
카카오톡 공유하기
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삼성 이승엽은 2003년 10월 2일 대구구장에서 롯데 이정민을 상대로 역사적인 시즌 56호 홈런을 빼앗았다. 23년간 숱한 스토리를 만들어낸 대스타답게 정규시즌 최종전에서 또 한 번 거짓말 같은 드라마를 연출했다. 사진제공|삼성 라이온즈

‘국민타자’ 이승엽(41)이 마침내 은퇴한다. 1995년 삼성 유니폼을 입고 프로에 데뷔한 뒤로 23년이다.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로 숱한 불멸의 대기록과 영광의 기억이 함께했다. 한 시절을 주름잡던 대스타들을 보며 그가 성공을 꿈 꾼 것처럼, 지금은 ‘미래의 이승엽’을 머릿속에 그리는 선수들이 넘쳐난다. 40년을 바라보는 KBO리그, 100년을 훌쩍 넘긴 한국야구에서 그 누구보다 위대한 타자였기 때문이다. 스포츠동아는 21세기 한국야구의 최고 스타로 기억될 이승엽의 발걸음을 매주 주말판을 통해 되돌아보는 기획 시리즈를 마련했다<편집자 주>.


③ ‘어떤 날’들에 대한 기억…‘이승엽의 해’로 남을 2003년

2003년은 한국프로야구에서 특별한 해다. 이승엽에 의해 단일시즌 최다홈런 아시아신기록이 수립됐다. 일본프로야구의 전설 오 사다하루와 외국인타자 터피 로즈가 함께 보유했던 55홈런의 종전 기록을 1개 넘어섰다. 그 과정은 극적이었고, 전국은 홈런 열풍에 휩싸였다. 박찬호를 필두로 한 여러 코리안 메이저리거들의 등장으로 KBO리그의 인기가 예전만 못하던 때였다. 이승엽은 그 같은 상황의 반전 가능성을 알린 고마운 존재였다. 실제로 한국프로야구는 2006년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의 선전(이승엽이 눈부시게 활약한 덕분이기도 하다)을 기점으로 1990년대 중반까지의 인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56홈런은 지금까지도 이승엽을 상징하는 제1의 코드다. 또 그 속은 온통 환희의 기억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2003년 말 이승엽은 이를 뒤로 한 채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린다. 미지의 세계를 택한다. 이번 회에선 그 해 이승엽을 둘러싼 몇몇 기억의 조각들을 들춰내고자 한다. 14년 전 ‘어떤 날’들에 대한 어렴풋한 회상에서 출발한다. 56홈런과 일본행, 이승엽의 야구인생에서 결정적 터닝 포인트로 인식되고 있는 사건(또는 결정)들에 대한 추억이다.

이승엽. 동아일보DB



● 9월 26일…이승엽의 홈런에 웃고 울다!

KTX가 개통되기 직전의 해다. 가장 빠른 새마을호로 서울서 부산까지 4시간 남짓 걸리던 시절이다. 그 날(9월 26일) 광주역에서 회사 후배와 함께 기차에 올랐다. 새마을호인지, 무궁화호인지는 정확치 않다. 전날까지 사흘간 광주구장에서 벌어진 삼성-KIA의 4연전(9월 24일 더블헤더 포함)을 취재하고 상경하는 길이었다. 역 매표창구에서 티켓을 끊을 때까지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열차 안에서 좌석을 확인한 뒤에야 비로소 열없는 웃음이 나왔다. “○○아, 이러다 노이로제 걸리겠다. 56홈런은 네가 책임져라.” 후배와 기자의 손에 쥐어진 좌석번호는 하필 ‘55’, ‘56’이었다.

9월 25일 이승엽은 광주구장에서 KIA 김진우를 상대로 6회초 아시아타이기록인 55호 아치를 그렸다. 대망의 56호 홈런까지 이제 1개차. 당시 이승엽의 시즌 최다홈런 달성 과정과 그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국내 수많은 언론사에서 특별취재반을 꾸렸다. 이승엽이 가는 곳마다 잠자리채나 뜰채를 든 구름 관중이 몰렸다. 내야석이 아니라 외야석부터 매진되는 진기한 광경도 연이어 펼쳐졌다. 이승엽을 쫓아다니며 그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삼성과 이승엽을 담당하던 기자들의 피로감 역시 쌓여갔다. 그러다보니 기차 좌석번호마저 남다르지 않게 다가왔던 것이다.

‘열차표 사건’으로부터 엿새 뒤인 10월 2일 대구구장. 이승엽은 롯데 이정민으로부터 2회말 중월솔로홈런을 뽑았다. 시즌 최종전이었기에 지켜보는 사람에게는 긴장감이, 당사자에게는 중압감이 한층 고조되던 찰나였다. 오색축포가 터졌고, 베이스를 돌던 이승엽 또한 펄쩍펄쩍 뛰며 기뻐했다. 홈을 밟은 그는 평생의 사부 박흥식(현 KIA) 코치와 진한 포옹을 나누기도 했다. 그리고 그 역사의 현장을 기자는 개인적 사정 때문에 아쉽게도 직접 목격하진 못했다. “네가 가라”며 ‘등 떠밀어’(?) 내려 보냈던 그 후배의 차지가 됐다.

이승엽의 홈런볼을 잡기 위한 외야 진풍경. 사진제공|삼성 라이온즈



● 12월 11일…고뇌 속의 이승엽, 길을 묻다!

그 날 이승엽은 서울 리츠칼튼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앞두고 있었다. 당초 오전 11시로 예고됐던 회견은 20분쯤 지나서야 열렸다. 일본프로야구 지바롯데 입단을 공식적으로 알리는 자리였다. 이승엽은 회견문을 읽던 도중 “삼성이 그동안 친아들처럼 대해줘서 감사하다”며 눈물을 펑펑 쏟았다. 당시 회견 시작 시간이 지체되면서 이상한 낌새가 감돌자 영문을 모르는 일부 취재진은 어리둥절해했는데, 여기에는 역시 그럴 만한 사연이 있었다.

오전 일찍 호텔 안에선 복수의 삼성 구단 총무팀 및 운영팀 직원이 눈에 띄었다. 그들은 하루 전인 12월 10일 밤 황급히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와 이승엽과 만남을 시도했다. 이승엽의 마음을 돌려 팀에 잔류시키기 위한 ‘특사’였다. 에이전트(J‘s엔터테인먼트 김동준 대표)를 통해 이승엽의 일본행이 이미 공표된 뒤였다. 삼성 구단 직원들은 밤새 호텔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부친 이춘광 씨도 수차례의 전화통화로 아들을 설득했다. ‘입단 이후 줄곧 삼성으로부터 큰 은혜를 입었다’는 아버지의 간곡한 만류에 이승엽은 크게 흔들렸다. 그의 지바롯데 입단을 철석같이 믿고 일본에서도 적잖은 취재진이 회견장을 찾기로 한 터라 에이전트의 입은 바싹 타들어갔다.

일찌감치 호텔에 도착해 로비에 머물고 있던 기자를 에이전트가 찾아왔다. 직전까지의 자초지종을 설명한 그는 “지금 분위기로는 (일본행이) 힘들 것 같다”며 향후 예상되는 상황전개를 기자에게 물었다. ‘일본 기자들까지 몰려든 터라 좀 망신스러울 수는 있겠지만, 본인의 의사를 존중해야 하지 않겠나’라고 답하자 에이전트도 자포자기하는 눈치였다. 그는 기자회견 시작을 30분 가량 남기고 다시 기자를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당초 발표한 내용인 일본행을) 설득해보겠다”며 이승엽이 대기 중이던 방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11시 10분을 넘긴 무렵,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이제 (회견장으로) 내려간다. (일본으로) 가기로 했다.” 이승엽과 절친했던 방송인 김제동까지 가세해 지바롯데 입단을 종용한 결과였다. ‘회견장으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결심했다’는 그간의 알려진 내용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지바롯데 시절 이승엽. 사진제공|지바롯데



#PS=2004년 9월 8일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이사한 새 집에 익숙해지는 데도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이승엽은 지바롯데 입단 첫 해인 2004년 기대치를 밑도는 성적과 극심한 향수병 때문에 금세 지쳤다. 기자는 그 해 9월 8일 ‘이승엽이 지바롯데와의 계약기간 2년을 채우지 않고 1년 만에 삼성 복귀를 추진 중이다’는 요지의 기사를 작성해 보도했다. 이에 대해 당시 이승엽측과 삼성 모두 긍정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팬들은 안타까워했다. 조기복귀에 반대의사를 드러내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 해 이승엽은 100경기에 출전해 타율 0.240, 14홈런, 50타점에 그친 뒤 조용히 귀국했다. ‘열차표 사건’ 때 기자와 동행했던 후배가 대구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이승엽을 만나러 내려갔다. 이승엽은 그에게 ‘삼성으로 조기복귀를 추진한 사실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되물었다. 그리고는 그 겨울을 보낸 뒤 일본으로 돌아가 절치부심하며 부활을 준비했다. 2005년에는 정규시즌 117경기에서 타율 0.260, 30홈런, 82타점으로 반등했다. 한신과 맞붙은 일본시리즈에선 3홈런을 터트리며 지바롯데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부진→국내 조기복귀 추진→반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에 얽힌 좀더 구체적인 ‘증언’을 다음 회에서 전하고자 한다.

정재우 전문기자 jace@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뉴스스탠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