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수의 라스트 씬] 그때도, 지금도 신음하는 청춘들…그들의 ‘고래’는 어디에 있나?

입력 2017-09-15 06: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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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바보들의 행진’ 속 청춘들의 행진이다. 영철은 동해의 절벽 위에서 눈물을 흘리며 절망의 시대에 또 다른 위안의 힘을 얻는다(위쪽사진). 입영열차 속의 병태는 플랫폼 위 영자와 입맞춤하며 청춘의 새로운 출발을 시작한다(아래쪽 사진). 사진출처|한국영상자료원 ‘바보들의 행진’ 화면 캡처

■ 영화 ‘바 보 들 의 행 진’

1970년대…장발 단속령 등 통제의 시대
강압적 현실에 도피 선택한 영철과 병태

여전히 고달픈 현실을 헤메는 ‘N포세대’
자유방임적 시대에도 청춘들 신음 여전

단순히 이야기의 결말만은 아닐 터이다. 수많은 상징과 은유가 포함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들여다보는 이들이 스스로 그 결론을 맺어주길 바라는 ‘열린 결말’로서 갈무리하기도 한다. 한 편의 영화가 관객에게 안겨주는 진한 여운이 발원하는 또 하나의 지점, 마지막 장면, 바로 ‘라스트 씬’(Last Scene)이다. 그래서 ‘라스트 씬’은 어쩌면 한 편의 영화가 드러내려는 모든 것이 담긴, 단 하나의 장면일지 모른다. 때로는 ‘에필로그’로서 더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경우도 많아서 ‘라스트 씬’의 여운은 더욱 깊고 커지기도 한다. 표기법상 맞는 표현인 ‘라스트 신’이 아닌 ‘라스트 씬’이라 쓰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입대 신검에서 “병종 불합격”한 영철은 동해의 가파른 절벽 위에 섰다. “자가용”인 자전거를 타고 먼 길을 달려온 참이다. 고속도로와 시골길을 내달리고, 개울에 넘어지기도 하면서. 시리도록 눈부시게 푸른 물결을 바라보는 영철의 표정은 벅차면서도 처연하다. 영철은 이내 “예쁜 고래 한 마리”를 향해 자전거 핸들 브레이크에서 손을 뗀다.

입대 신검에서 “갑종 합격”한 병태는 입영열차에 오른다. 자신을 떠난 듯했던 영자가 달려온다. 열차는 바퀴를 굴리며 천천히 나아간다. 영자는 병태에게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라 하더니 연방 뛰어 오른다. 보다 못한 헌병은 영자의 몸을 들어 올려준다.

병태와 영철은 그렇게 자신들의 청춘을 떠나보냈다. ‘가을잎 찬 바람에 흩어져 날리면’ 이내 ‘캠퍼스 잔디 위엔 또 다시 황금물결’이 일렁이는, 오래 전 을씨년스러운 어느 날이었다.


● 절망의 시대, 청춘은 정말 “괴질”이었을까

대학은 문을 닫았다. “교수회의 결정”에 따른 휴교령. 동해바다로 떠나기 전 영철은 함께 가자는 병태를 말렸다. 병태는 학교로 돌아와 황량한 캠퍼스를 맞닥뜨리고 만다. 전날 이들은 “한국적 스트리킹이다”면서 교정을 뛰쳐나갔다.

스트리킹! 1973년 초 미국에서 일기 시작한 알몸 질주의 일탈적 해프닝? 퍼포먼스? 저항? 이듬해 봄, 서울 안암동에서도 두 청년이 알몸으로 거리를 내달렸다. 이후로도 질주하는 알몸들이 속출했다. 장발 일제단속도 실시됐다. 권보드래 고려대 교수에 따르면, “안암동 스트리커를 체포하기 위해 전담 수사반까지 편성됐”고, 장발 단속령은 “스트리킹 유행 때문이라는 소문이 떠돌”게 했다.(경향신문 2013년 10월11일자)

옷을 입은 채 캠퍼스를 내달린 병태와 영철도 장발 단속에 걸렸다. 대학 첫 미팅에 가는 길이었다. 개구쟁이 같은 웃음으로 도망친 이들은 파출소로 끌려갔다. 병태는 “우리 머리 가지고 왜들 그럴까?” 물었고, 영철은 “혐오감을 준대. 그래서 깎아야 한대”라고 답했다. “퇴폐풍조”와 “자유방임적 생활을 일삼는 풍조”의 “일소”라는 당국의 방침 속에 단속 경관은 “너희들은 괴질이야”라고 말했다.

“괴질!” 어째서 이들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상한 병균’이 되고 말았을까.

병태는 그저 돈이 없어 “다섯 달 만에 찾은 시계를 하루도 제대로 못 차보고” 외상물건으로 잡혀 생맥주 몇 잔 마신 게 전부다. 생맥주와 청바지와 미니스커트(여성의 치맛단이 무릎 위 몇 센티까지인지를 자로 재는 경찰관의 코미디 같은 풍경!)와 장발은 그렇게 “퇴폐풍조”의 상징이 되었다. 영철은 신문팔이 소년에게 500원의 ‘거금’을 내주며 거스름돈을 바꿔 오는지 달아나는지를 내기한 뒤 1시간 뒤 돌아온 소년을 바라보며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필요한 건 서로가 서로를 믿는 믿음”이라는 걸 확인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 마저도 “영웅도 구제할 수 없는 절망의 시기, 몇몇 마음이 맞는 친구들끼리 술집을 전전하고 수다를 떨고 푸념을 늘어놓으면서 쥐죽은 듯 잘 지내며, 사소한 승패에 열중할 때의 흥겨움, 편을 나누고 역할을 교대하는 도취감, 내기를 해놓고 기다릴 때의 설렘으로만 존재하는 대상으로서 공허한, 절대로 오지 않을 꿈, 일장춘몽”(김곡 감독, 씨네21, 2014년 9월5일자)이었을까.

개인과, 일상과, 소박한 꿈과, 어쩌면 허약했을 몽상마저도 관리와 통제와 단속의 대상이 됐던 시대였다. “자유방임적” 사고와 꿈마저도 제대로 꾸면 안 되는 시대였다. 그건 무릇 “괴질”의 강력한 전염성으로 퍼져 나가 끝내 관리와 통제와 단속의 체제를 무너뜨릴 수도 있는 위험성을 지닌 것이라고 관리와 통제와 단속의 힘을 가진 자들이 확신하던 시대였다. 확신은 대학의 문을 닫도록 했던 시대였다.


● 청춘, 고래의 꿈은 이뤄질까

유신헌법과 일련의 긴급조치로 상징되는 폭압체제는 그렇게 “한국적 민주주의”를 위선했다. 그러니 병태는 “이 세상 모든 것은 가짜 아닌 게 없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청춘은 적어도 위악하지 않았다. 불의에 맞서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했다. 사제이기도 한 호인수 시인은 그래서 일찍이 고백했다. ‘나를 무슨 반역죄인처럼/눈 부릅뜨고 잡으려 하지 마세요/부끄러움도 죄가 되는 시절이라면/단번에 삭발해도 그만이지만/핏기 잃은 이마와/앞이 안 보이는 눈과/친구의 울음소리마저 들을 수 없는 귀가 부끄러워/가리고 다니는 것뿐이에요/…(후략)’라고.(‘장발’, 1978년)

병태와 영철도 “내 힘으로 할 줄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쪼다, 병신, 바보”였다. “참 시시한 대학생”이었다. 거스름돈을 들고 온 신문팔이 소년이 자신들보다 “100배 낫다”고 말한 영철의 말은 그래서 거짓이 아니었다. 병태와 영철은 “군대나 가고 싶어. 군대!”라고 말했다. 맞서지 못해 탈출구 삼은 군대는 그렇게 안식처가 되었을까.

어쨌든 병태는 영자의 입맞춤을 뒤로 하고 군대로 갔다. 그래도 꿈을 꾸었다. “곧 우리들의 꿈은 이뤄질 거야”라 믿었다. 과연 숱한 병태들과 영철들의 꿈은 이뤄졌을까.

영철은 “동해에는 예쁜 고래 한 마리”가 살지만 실상 “내 마음에 있기도” 해서 “그걸 잡으러 갈 거야”라며 동해바다로 나아갔다. “그렇지 않고선 오늘의 날 지탱할 수가 없”어서, “용기를 보여주겠”다며. 과연 영철은 “예쁜 고래 한 마리”를 잡았을까. 아니, 동해바다 그 깊고 시린 물 속에는 정말 “예쁜 고래 한 마리”가 살아 있기는 했을까.

안타깝게도, 병태가 “곧”이라 믿었던 시간은 무력해서 수많은 병태들과 영철들이 또 달리 고달픈 현실 속을 여전히 헤매고 있음을 도처에서 목격하는 시대다. 이제 개인과, 일상과, 소박한 꿈과, 몽상을 “자유방임”할 수 있게 됐는지는 모르지만, ‘헬조선’과 ‘N포세대’ ‘이생망’ ‘금수저와 흙수저’ 등 신조어 속에서 이 시대 병태들과 영철들의 신음을 듣는 것은 어째서일까. 정말 청춘의 고래는 어디 있을까.


■ 영화 ‘바보들의 행진’

1979년 38세로 요절한 하길종 감독의 대표작. 1975년 5월 개봉해 15만 관객(서울 기준)이 들며 흥행했다. 엄혹했던 1970년대, 절망에 빠진 청춘의 초상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카메라를 들고 대상을 따라가는 핸드헬드 기법과 경쾌한 카메라 워크 등 선진적인 촬영 방식도 따랐다. 윤문섭(병태), 하재영(영철), 이영옥(영자) 등 당시 실제 대학생을 캐스팅했다. 하지만 영화는 검열의 가윗날을 피하지 못해 대학가 시위 장면 등 30여분 분량이 잘려 나갔다. 삽입곡 ‘고래사냥’과 ‘왜불러’ 등은 금지곡이 됐다. 영화는 한국영상자료원 VOD 서비스를 통해 무료로 볼 수 있다.

윤여수 전문기자 tadada@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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