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타자 이승엽의 23년’을 말한다…⑥ 이승엽이 기억하는 순간들 Ⅱ

입력 2017-09-15 0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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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엽은 비난에 직면했을 때, 변명이 아닌 홈런으로 답을 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일본을 격침시킨 홈런은 왜 그가 ‘국민타자’인지를 증명하는 한방이었다. 스포츠동아DB

‘국민타자’ 이승엽(41)이 마침내 은퇴한다. 1995년 삼성 유니폼을 입고 프로에 데뷔한 뒤로 23년이다.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로 숱한 불멸의 대기록과 영광의 기억이 함께했다. 한 시절을 주름잡던 대스타들을 보며 그가 성공을 꿈 꾼 것처럼, 지금은 ‘미래의 이승엽’을 머릿속에 그리는 선수들이 넘쳐난다. 40년을 바라보는 KBO리그, 100년을 훌쩍 넘긴 한국야구에서 그 누구보다 위대한 타자였기 때문이다. 스포츠동아는 21세기 한국야구의 최고 스타로 기억될 이승엽의 발걸음을 매주 주말판을 통해 되돌아보는 기획 시리즈를 마련했다.


⑥ 이승엽이 기억하는 순간들 Ⅱ…위대한 여정을 수놓은 한 걸음들

지난 23년간 이승엽은 무수히도 많은 영광스러운 기억과 드라마틱한 스토리를 빚어냈다. 그의 활약상과 전성기를 직접 지켜볼 수 있었다는 자부심은 먼 훗날 우리에게 아련한 추억과 행복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여러 명장면들을 만들어낸 데 대한 스스로의 뿌듯함 또한 컸다. 이승엽이 직접 넘긴 추억의 사진첩을 2회로 나눠서 함께 들여다본다. 그 두 번째 이야기다.

삼성 이승엽. 동아일보DB



● 만원관중 앞에서 치른 프로 데뷔전과 첫 안타

“프로 첫 안타도 기억난다. 잠실에서 김용수 선배의 포크볼을 때렸는데, 배트가 부러지면서 안타가 됐다. 팀이 지고 있는 상황에서 대타로 출전했었다. 지금은 규모가 좀 줄었지만, 그 때 잠실구장은 꽉 차면 (관중이) 3만이 넘었다.”

1995년 경북고를 졸업한 이승엽은 계약금 1억3200만원을 받고 삼성에 입단했다. 당시 프로 최저연봉인 2000만원을 포함한 총액 기준으로 역대 신인 계약금 및 연봉 랭킹 31위였다. 그 해에는 유독 쟁쟁한 신인들이 넘쳐났다. 아마추어 시절부터 주목 받은 롯데 마해영, 태평양 위재영과 프로에서 재능을 꽃피운 OB 진필중, 해태 임창용 등이 대표적이다. 대부분 대졸 신인들이었다.

이승엽의 데뷔전은 1995시즌 개막전으로 펼쳐진 4월 15일 잠실 LG전이었다. 3만500명의 만원관중이 들어찼다. 삼성이 1-5로 패한 이 경기에서 9회초 류중일의 대타로 나섰다. 지금은 레전드로 기억되는 LG 마무리 김용수를 맞아 주눅 들지 않고 안타를 뽑았다. 순조롭게 데뷔전을 마친 이튿날(역시 잠실 LG전)에는 6번 1루수로 선발출장해 프로 첫 타점(4타수 1안타)을 신고했다.

홈런왕과 정규리그 최우수선수(MVP)만 해도 각각 5회씩 수상한 이승엽이지만, 생애 한 번뿐인 신인왕은 아쉽게도 놓쳤다. 그해 120경기에서 타율 0.285, 13홈런, 73타점의 준수한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마해영도 126경기에서 타율 0.275, 18홈런, 87타점을 올렸다. 위재영은 36경기에 등판해 13승10패4세이브, 방어율 3.60을 기록했다. 그러나 신인왕 투표에서 이승엽은 4위에 그쳤다. 마해영과 위재영도 2·3위로 밀려났다. 1991년 삼성에 입단했던 늦깎이 이동수(125경기·타율 0.288·22홈런·81타점)가 신인왕의 영예를 차지했다.

이승엽의 홈런볼을 잡기 위한 외야 진풍경. 사진제공|삼성 라이온즈



● 전국을 잠자리채 물결로 뒤덮은 56호 홈런

“홈런 중에선 아무래도 2003년 56호 홈런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당시 잠자리채 물결도 잊을 수 없다. 전에 없던 광경이라 나 자신도 그런 모습을 보면서 굉장히 흐뭇했다.”

이승엽은 2003년 10월 2일 대구 롯데전 2회말 이정민으로부터 대망의 시즌 56호 홈런을 빼앗았다. 타구는 대구시민구장 외야 가운데 담장을 쏜살처럼 넘어갔다. 그보다 일주일 전인 9월 25일 광주 KIA전에서 55호 아치를 그린 뒤로 줄곧 침묵했기에 단일시즌 최다홈런 아시아신기록 수립에 대한 열망이 절정을 향해 치닫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시즌 최종전에서 기어코 고대하던 홈런을 토해냈다.

사진제공|삼성 라이온즈


잘 알려진 대로 그 무렵 이승엽의 홈런볼 하나하나는 상당한 가치를 지닌 ‘황금공’으로 여겨졌다. 그의 발길이 닿는 야구장마다 잠자리채를 든 팬들이 외야석부터 가득 메우곤 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뜻밖의 소동도 여러 차례 빚어졌다. 그 중 하나. 그 해 9월 27일 사직구장에서 벌어진 삼성-롯데전은 팬들의 격렬한 항의로 1시간 동안 지연됐다. 롯데 김용철 감독대행이 4-2로 앞선 8회초 1사 2루서 이승엽을 고의4구로 출루시키자 성난 홈팬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미 이틀 전 55호 홈런이 나온 터라 팬들의 기대감은 한층 고조돼 있었다. 결국 다음날 김용철 대행은 팬들에게 머리 숙여 사과했다.

2006 WBC 1라운드 3차전 일본전에서 투런 홈런을 친 이승엽.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 ‘국민타자’의 가치를 더한 홈런들

이승엽은 13일 대구 한화전 6회 우월2점포로 한·일 통산 624홈런(KBO리그 통산 465홈런)을 기록했다. 2003년 시즌 56호 홈런은 개인통산으로는 324호 홈런이었다. 600개도 넘는 만큼 홈런 하나하나를 또렷이 기억할 순 없다. 다만 이정표처럼 여겨지는, 또 팬들이 의미를 부여해준 홈런들도 적잖다.

홈런타자 이승엽의 서막은 1995년 5월 2일 광주 해태전에서 올랐다. 4번 1루수로 선발출장해 2-1로 앞선 6회초 승리에 쐐기를 박는 우월솔로홈런을 때렸다. 당대 최고의 잠수함투수 이강철이 까마득한 신인 타자에게 프로 첫 홈런을 허용했다. 2005년 은퇴한 이강철은 이승엽에게 모두 2홈런을 내줬고, 1994년부터 2009년까지 활약한 우완 최상덕이 이승엽에게 가장 많은 7홈런을 헌납한 투수로 남아있다.

일본의 콧대를 꺾어놓은 홈런들도 잊을 수 없다. 지금까지 팬들이 가장 사랑하는 홈런들이기도 하다. 2006년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과 2008년 베이징올림픽이 대표적이다. 먼저 2006년 3월 5일 도쿄돔에서 열린 제1회 WBC 1라운드 3차전 일본전. 1-2로 뒤진 8회초 1사 1루서 이승엽은 좌완 이시이 히로토시를 상대로 역전 결승 우월2점홈런을 날렸다. 일본야구의 심장부에서 한국야구의 급성장을 알린 한방이었다.

2008년 8월 22일 우커송야구장에서 벌어진 베이징올림픽 준결승 일본전이야말로 가장 극적인 순간이었는지 모른다. 예선 7경기 동안 22타수 3안타, 타율 0.136으로 부진했던 이승엽은 2-2로 맞선 8회말 1사 1루서 일본 최고의 마무리투수인 좌완 이와세 히토키에게서 결승 우월2점홈런을 터트렸다. 6-2로 이겨 결승 진출을 확정한 직후 그간의 마음고생을 담은 눈물을 펑펑 쏟아내던 이승엽의 모습에 많은 팬들도 따라 울었다.

그밖에 2002년 LG와의 한국시리즈 6차전 9회말 동점 우월3점홈런, 제1회 WBC 미국전 1회말 선제 결승 우중월솔로홈런, 베이징올림픽 결승 쿠바전 1회초 선제 결승 좌월2점홈런 등도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결정적 장면들이다.

정재우 전문기자 jace@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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