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수의 라스트 씬] 예술의 자유를 삼킨 권력 1984년 동독의 비극, 우리를 보는듯

입력 2017-09-29 06: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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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경찰은 극작가 드라이만과 그의 연인 크리스타의 무대 위 ‘타인의 삶’마저 옥죈다. 하지만 그 일상을 엿보고 엿듣는 슈타지 요원은 ‘타인의 삶’ 역시 자신의 것임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영화 ‘타인의 삶’ 화면 캡쳐

■ 영화 ‘타인의 삶’

전국민이 사찰 당했던 동독시대
최고의 극작가와 그의 연인을 훔쳐보는
정보기관 요원 비즐러의 고뇌
문화부장관 탐욕에 희생양되는 그들
마지막 비즐러의 눈물, 희망이 될까?

단순히 이야기의 결말만은 아닐 터이다. 수많은 상징과 은유가 포함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들여다보는 이들이 스스로 그 결론을 맺어주길 바라는 ‘열린 결말’로서 갈무리하기도 한다. 한 편의영화가 관객에게 안겨주는 진한 여운이 발원하는 또 하나의 지점, 마지막 장면, 바로 ‘라스트 씬’(Last Scene)이다. 그래서 ‘라스트 씬’은 어쩌면 한 편의 영화가 드러내려는 모든 것이 담긴, 단 하나의 장면일지 모른다. 때로는 ‘에필로그’로서 더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경우도 많아서 ‘라스트씬’의 여운은 더욱 깊고 커지기도 한다. 표기법상 맞는 표현인 ‘라스트 신’이 아닌 ‘라스트 씬’이라 쓰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1998년 가을, 우편배달부 게르트 비즐러는 서점에서 ‘아름다운 영혼을 위한 소나타’라는 책에서 다음의 헌사를 발견한다.

‘감사의 마음을 담아 HGW XX/7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HGW XX/7’. 이름의 각 앞 자를 따온 듯, 거기에 정체 모를 알파벳과 숫자를 나열한 이것은 한때 비즐러의 암호명이었다. 8년여 전까지만 해도 비즐러는 각종 보고서에 자신의 이름을 대체하며 그렇게 적었다.

그는 동독 슈타지의 대위였다. 냉철한 성격의 그는 경찰대학의 교수이기도 했다. 그가 요원으로 활동한 1984년께 슈타지 요원은 무려 10만여 명에 달했다. 이들이 거느린 정보원도 20만여 명이나 됐다.

1945년 7월26일 미국과 영국, 소련이 패전국 독일에 대한 처리 문제를 담아 내놓은 포츠담선언에 따라 독일은 독일연방공화국(서독)과 독일민주공화국(동독)으로 갈라졌다.(포츠담 선언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한국의 독립에 관한 내용을 주로 담았다.) 소련의 영향력 아래서 동독은 1950년 2월8일 정보기관 슈타지를 창설했다. 슈타지는 1990년 3월 해체되기까지 막강한 힘을 지니고 비밀경찰을 운용했다. 이들은 “모든 것을 파악한다”는 목표 아래 국민들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자행했다. 올가미는 전 국민을 옭아맸다. 전화 도감청과 비밀촬영, 우편물 검열, 동독 방문자 감시, 비밀수색, 협박과 회유 등 모든 방식이 동원됐다. 조금이라도 죄가 있다고 규정된 사람이면 모두 검거하고 고문해 집요하게 처벌했다.

‘HGW XX/7’, 비즐러 역시 그 최전선에 서 있었다. 사회주의에 대한 확신으로 “우리는 당의 칼과 방패다”는 선서를 잊지 않는 그는 “국가배신자들은 건방지다”는 ‘신념’ 아래 체제수호자임을 자부했다.

슈타지의 힘을 바탕으로 동독의 당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는 장기집권했다. 슈타지 요원들에게조차 조롱의 대상이 된 호네커는 슈타지 해체 한 해 전인 1989년 10월 민주화에 대한 국민적 요구에 무릎을 꿇었다. 슈타지도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다.

에리히 호네커의 부인은 문화훈장 수훈자인 극작가 게오르그 드라이만의 친구였다. ‘아름다운 영혼을 위한 소나타’가 바로 드라이만의 작품이다. ‘아름다운 영혼을 위한 소나타’는 베토벤의 소나타 ‘열정’을 떠올리게 하는 피아노 연주곡이자 드라이만이 스승과도 같은 연극 연출가 알베르트 예르스카로부터 생일선물로 받은 악보의 제목이다.

예르스카는 더 이상 무대에 나설 수 없다. 예술적 색채는 권력에 가로 막혔다. 세상과 사람의 모든 것을 무대와 그림과 악보와 스크린에 펼쳐내려는 예술행위마저도 사찰과 감시 그리고 이념적·정치적 단죄의 제물이 되어야 했던 시대. 누구보다 뛰어났던 연극 연출가의 선택은 없었다. 선택은 강요당할 뿐이었다.

어처구니없게도 그 아픔과 고통은 권력 사유의 탐욕에서 비롯됐다. “연극계를 제대로 정화시킨” 권력자 문화부장관은 드라이만의 아름답고 우아한 연인이자 배우인 크리스타를 무대에서 퇴출시키겠다는 협박을 도구 삼아 끊임없이 탐했다. 드라이만은 장관에게 “밉보인 놈”이어서 “제거해야 한다”며 비즐러에게 감시와 통제를 지시하는 상관은 “문화계 군기를 제대로 잡는다”는 칭찬과 그것이 자신의 “앞길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할 뿐이다.

이를 두고 혹자는 2차 대전 시기 유대인 대학살의 주범이었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지켜본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예루살렘의 아이히만: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를 인용한다. 그저 명령을 충실히 따랐을 뿐이라는 아이히만의 주장에 한나 아렌트는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할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은 말하기의 무능을 낳고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며 “근면한 인간”으로서 아이히만은 무죄일지 모르지만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한 죄가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1984년 동독의 문화부장관은 권력을 사유했고, 상관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함을 넘어 “당에 충성한다는 일념”이란 허울 좋은 명분을 내세웠다. 악행은 “근면”으로서 평범한 이들이 “생각의 무능” 속에서 저지른 것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악의는 자발적인 것임에 틀림없다면 억측일까.

그 악의와 폭력의 현실을 목도하며 비즐러는 무너져 가는 신념으로 혼란스럽다. ‘아름다운 영혼’의 무대를 꿈꿀 수 없는 무력한 예술가 드라이만과 크리스타를 무려 4개월 동안 비밀리에 감시해온 그는 자신 역시 그 폭력적 현실 앞에 놓여 있음을 깨달아 가는데, 무대에 나설 수 없는 한 예술가를 추억하는 드라이만의 ‘아름다운 영혼의 소나타’ 연주를 들으며 흘리는 눈물은 바로 인간성 회복의 출발점이다.

앞서 문화부장관은 드라이만의 작품을 좋아한다면서 그 이유를 비꼬아 말했다. “인간이 변할 수 있다는 믿음…. 하지만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고. 장강명의 소설 ‘댓글부대’ 속 정치적 댓글 조작을 지원하는 정체불명의 조직을 움직이는 재력가 회장은 “시대를 앞서간 천재” 신중현의 ‘아름다운 강산’을 좋아한다. 하지만 노래는 “사람 정신을 헷갈리게, 사람을 주저앉게 만드는” 것이라고 믿는다.

“빨갱이 새끼들이 이 노래를 먼저 선점해버렸지. 우리가 감각이 그 새끼들보다 떨어지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원래 빨갱이들이 글을 더 잘 쓰고 영화도 더 잘 만들어. 소설판이나 영화판을 봐. 다 빨갱이들이야. 옛날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중략) 천만 명이 넘게 봤다는 영화 중에 밝은 내용의 영화가 하나도 없더군. 대한민국을 살기 괜찮은 곳으로 그리는 영화도 한 편도 없어. 이러다 나라가 망하겠구나 싶더라.”

많은 이들이 무대를 떠나고, 마이크를 놓아 버렸다. 자발적 의지가 아니었다. 어떤 ‘악의’가 개입했을 거라고 연일 불거지는 관련 의혹과 사실은 말한다. 이를 지시하고 따른 이들은 “근면한 인간”들이었을까. ‘댓글부대’의 회장은 “인간이 천사가 아”니어서 “사람을 천사로 대해주면 아무 일도 되지 않는다”고 믿었다.

1984년 동독의 문화부장관과 재력가 회장은 무엇이 다른가. 1984년 동독의 현실과 지금 우리의 그것은 또 무엇이 다른가. ‘아름다운 영혼의 소타나’ 속 헌사는 과연 현실 밖 희망에 불과한가.

● 영화 ‘타인의 삶’

1984년 동독 국가보위부의 비밀경찰, 슈타지의 요원 비즐러(울리히 뮤흐)가 그해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최고의 극작가 드라이만(세바스티안 코치)과 그의 연인인 여배우 크리스타(마르티나 게덱)의 집을 도청하고 감시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묵직한 서사와 엄혹한 시대 인간성을 회복해가는 주인공의 모습이 감동적이다. 폰 돈너스마르크 감독의 2006년 데뷔작. 그 해 독일 영화상에서 작품상과 감독상 등 7관왕을 차지한 수작이다.

윤여수 전문기자 tadada@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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