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수의 라스트 씬] 영화 ‘건축학개론’ “이 집이 지겹지도 않아?”…“집이 지겨운 게 어딨어”

입력 2017-10-27 06: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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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 어설펐던 첫사랑의 기억
30대가 되어 그녀의 마음을 알았지만
낡고 휘어진 대문을 바로 잡지 못하듯
차마 바꿀 수 없는 시간의 무게…

30년 넘어 정릉동을 지킨 엄마는
아파트 이사를 권유하는 아들에게
그렇게…첫사랑 아픔을 추억하게 하네


단순히 이야기의 결말만은 아닐 터이다. 수많은 상징과 은유가 포함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들여다보는 이들이 스스로 그 결론을 맺어주길 바라는 ‘열린 결말’로서 갈무리하기도 한다. 한 편의 영화가 관객에게 안겨주는 진한 여운이 발원하는 또 하나의 지점, 마지막 장면, 바로 ‘라스트 씬’(Last Scene)이다. 그래서 ‘라스트 씬’은 어쩌면 한 편의 영화가 드러내려는 모든 것이 담긴, 단 하나의 장면일지 모른다. 때로는 ‘에필로그’로서 더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경우도 많아서 ‘라스트 씬’의 여운은 더욱 깊고 커지기도 한다. 표기법상 맞는 표현인 ‘라스트 신’이 아닌 ‘라스트 씬’이라 쓰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지난해 서울시민들이 가장 많이 이용한 버스는 143번이었다. 서울시 자료에 따르면 하루 평균 4만191명이 탔다는데, 국토교통부 등도 2014년과 2015년 같은 통계를 가리킨다. 버스는 서울 성북구 정릉동 정릉산장아파트에서 출발해 종로와 명동 등 도심을 통과한 뒤 반포대교를 건너 반포동에서 청담동까지 신사동과 압구정동을 가로지른다. 이후 삼성동을 거쳐 강남구 개포동 개포중학교에 가닿는, 왕복 62km에 달하는 긴 노선이다.

원래는 710번을 달고 서울 시내를 내달렸다. 2004년 7월 서울 시내버스 체계 개편에 따라 현재의 143번으로 바뀌었다.


● 710번 버스의 추억

1996년(즈음) 이제 갓 대학에 입학한 승민과 서연도 710번 버스에 오른다. 건축학개론 수업을 함께 듣는 건축학도 승민과 음대생 서연은 “사는 데서 가장 먼 곳”에 가보라며 교수가 내준 숙제를 하기 위해 정릉동에서 개포동까지 “42개”의 정류장을 거친다.

개포동을 목적지 삼은 것은 “서울 오려고 난리”쳐 학교를 다니기 위해 “아빠 친구분 집”에 머물고 있는 제주 출신 서연이 아직 서울 지리에 어두웠던 덕분(?)이다. 개포동은 또 정릉동에서 나고 자란 승민이 “어렸을 때부터 맨날 이 버스 타면서 어떤 덴지 궁금했었다”는 곳이다.

숙제를 핑계로 하지만, 어쨌든 이들의 개포동행은 사실상 두 번째 데이트이다. 정확히는 수업시간에 이미 서연에게 반해버린 승민이 본격적으로 그를 마음에 품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개포동의 어느 건물 옥상에서 서연이 건넨 CD플레이어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은 이제 두 사람이 서서히 추억을 쌓아갈 것이라고 노래한다.

승민과 서연의 첫 번째 데이트도 교수의 숙제로부터 시작됐다. “자기가 사는 동네를 여행해보라”며 “평소에 그냥 무심히 지나친 동네 골목들, 길들, 건물들을 자세히 관찰하면서 사진으로 기록하라”는 숙제. 두 사람은 그렇게 정릉에서 맞닥뜨렸다. 정릉동의 좁은 골목 안 빈 한옥에 들어가 바늘이 멈춰버린 괘종시계의 태엽을 감아내듯 이들은 서로의 마음을 서서히 연다.

정릉동은 그렇게 추억을 공유하는 공간이 된다.


● 정릉동의 추억

건축사학자이자 건축가인 임석재 교수(이화여대 건축학과)는 어린 시절 살던 동네와 지형이 닮아 유년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며 “정서적으로 좋아하는 산책코스”라고 정릉천변과 정릉동을 소개한다. “길, 골목, 집 등 공간을 형성하는 물리적 골격”이 “영역과 동선” 마침내 “공간의 감성적 특성”을 다양하게 한다는 정릉천변의 “다질성(多質性)”에 대한 애정이다. “정릉2동 주민센터에서 정릉4동 주민센터에 이르는 2킬로미터 조금 안 되는 거리”인 “산책코스”의 출발점(건축에세이 ‘시간의 힘’ 중에서)은, 승민이 엄마와 함께 살고 있는 단층집 인근이기도 하다. 승민은 여전히 그곳에 살고 있다.

정릉동을 삶의 오랜 터전으로 삼은 시인 신경림도 이 곳에서 어머니를 추억한다. “정릉에 들어와 산 지”가 “어느새 서른 해가 훨씬 넘”어 “은행 옆 주민센터 그 건너 우체국/다시 그 옆 약방에 냉면집/눈에 익지 않은 거리가 없고/길들지 않은 골목이 없다”(시 ‘정릉에서 서른해를’ 중에서)는 그는 자신의 어머니 역시 “서른 해 동안 서울 살면서 오간”, 하지만 이제는 “약방도 떡집도 방앗간도 동태 좌판도 없어진” 길을 걸으며 당신이 생전 이웃들과 부대끼며 살았던 복닥거림의 풍성한 정서적 삶을 떠올린다.(시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중에서)

승민과 엄마도 “30년을 넘게” 정릉동을 지키고 있다. 엄마는 정릉시장의 작은 순댓국집으로 살림을 꾸려왔다. 임석재 교수에 따르면(위 책) 이 시장에는 “재미있는 가게 이름”이 많아서, “금메달마트, 한아름곱창, 기차순대국, 볏짚삼겹살, 임금님 수타짜장” 등이다. 그는 업종 이름을 빼면 “입가를 살짝 끌어올리며 미소 짓게 해주는 포근한 단어들”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기차순대국’은 승민네 가게일까.) 고생 끝에서 엄마는 좀 더 편한 노후를 권하며 “이 집이 지겹지도 않느냐”는 아들의 타박에 “집이 지겨운 게 어딨어? 집은 그냥 집이지”라고 말할 뿐이다. 오랜 시간 이웃과 지지고 볶으며 함께한 세상살이의 억척스러움으로 엄마에게 집은 “그냥 집”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안다.


● 제주의 추억 그리고…

“집이 그냥 집”이 아닌 것은 그 안에 켜켜이 쌓인 사람의 추억 덕분이다. 사랑과 감정에 서툴렀던 청춘의 시절과 헤어져 15년의 시간을 보낸 뒤 서연은 이제 살 날 많지 않은 아버지의 편안한 일상을 위해 제주의 옛집을 “싹 밀어내고” 다시 집을 짓기로 하지만, 무릇 추억은 그렇게 “싹 밀어내”지는 것이 아니다.

건축가 승효상은 “밥을 짓고 농사를 짓고 시를 짓듯이 집은 지어서 만드는 것”이라면서 “짓는다는 것은 어떤 재료를 가지고 생각과 뜻과 마음을 통하여 전혀 다른 결과로 변화시켜 나타내는 것이다”(‘건축, 사유의 기호’)고 말했다. 또 다른 건축가 오시마 겐지는 ‘집짓기 해부도감’에서 “긴 인생의 다양한 풍경을 떠올리며 집을 짓는 것이 좋지 않을까”라 권했다. 승민이 옛집을 증축하며 서연이 자라나던 시절 키를 쟀던 벽의 낙서와, 채 마르지 않은 시멘트 사이에 새겨진 그 작은 아이의 올망한 발자국이 고스란한 마당의 세면대에게 제자리를 부여하는 것도 그래서다. 서연은 그렇게 새롭게 지어진 집에서 이제는 작은 못으로 변모한 세면대를, 아니 그 위에 새겨진 어린 딸의 발자국을 들여다보는 아버지의 추억과 함께 살아갈 터이다.

결국 추억은 원래 있던 것을 허물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인지 모른다. 오래된 CD플레이어에서 흘러나오는 ‘기억의 습작’이 안겨주는 따뜻한 아련함도 쉽게 허물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첫사랑은 어쩌면 서연에게도, 승민에게도 또 세상 모든 그 누군가에게도 각기 삶의 또 다른 연습으로서만 기억 혹은 추억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P.S 건축학개론의 교수는 서연이 정릉에 산다고 하자 “정릉이 누구 능이야?”라고 묻는다. 제대로 알 리 없는 서연은 “…정조? …정종? …정약용?”이라며 우물쭈물한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의 능이 정답이다.


TIP 영화 ‘건축학개론’은?

풋풋한 스무 살 초입의 두 청춘이 겪는 첫사랑 그리고 15년의 시간이 지난 뒤 다시 만난 이들이 떠올리는 추억을 그린 작품. 실제 대학(연세대)에서 건축학을 공부한 이용주 감독이 연출했다. 터를 닦아 기초를 세우고 그 위에 짓는 집처럼 차곡차곡 쌓여가는 감정의 흐름과 그 에피소드를 탁월하게 그려냈다. 여주인공 한가인의 청춘 시절을 연기한 배수지를 ‘첫사랑의 아이콘’으로 각인시키기도 했다. 제주 서연의 집은 현재 제작사 명필름이 운영하는 카페로 변모했다.

윤여수 전문기자 tadada@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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