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수의 라스트 씬] “다 덤벼, 나 캡짱이야”…양아치의 추억? 행복한 추억!

입력 2017-12-08 06: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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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품행제로’. 사진제공|KM컬쳐

■ 영화 ‘품행제로’

좌충우돌 싸우고 부서지고
그 삐딱함이 없었더라면
인생 무슨 재미가 있을까?
어른이 된 아이들
슬그머니 미소 짓는데…

단순히 이야기의 결말만은 아닐 터이다. 수많은 상징과 은유가 포함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들여다보는 이들이 스스로 그 결론을 맺어주길 바라는 ‘열린 결말’로서 갈무리하기도 한다. 한 편의 영화가 관객에게 안겨주는 진한 여운이 발원하는 또 하나의 지점, 마지막 장면, 바로 ‘라스트 씬’(Last Scene)이다. 그래서 ‘라스트 씬’은 어쩌면 한 편의 영화가 드러내려는 모든 것이 담긴, 단 하나의 장면일지 모른다. 때로는 ‘에필로그’로서 더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경우도 많아서 ‘라스트 씬’의 여운은 더욱 깊고 커지기도 한다. 표기법상 맞는 표현인 ‘라스트 신’이 아닌 ‘라스트 씬’이라 쓰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 그해 봄, 패싸움

수업을 마친 중학교 3년생 아이들은 학교 운동장에서 ‘짬뽕’(배구의 서브처럼 테니스공 혹은 그만한 크기의 고무공을 살짝 던져 올린 뒤 내려오는 공을 주먹으로 쳐내는, 야구와 비슷한 놀이다. ‘찜뽕’이라고도 했다. 어떻게 그런 이름을 갖게 됐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에 몰두했다.

대통령의 ‘두발자유화’ 지시로 그해부터 머리카락을 기를 수 있게 된 아이들은 이미 덥수룩한 머리를 하고 있었다. 뛰어노느라 흙먼지를 잔뜩 묻힌 검은 교복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양새였지만, 아이들은 그래도 침을 발라가며 가르마를 탔다.

또 다른 무리의 아이들. 시합을 걸어왔다. 그야말로 치열한 경기가 펼쳐졌다. 그러다 “아웃”이네, “세이프”네, 시비가 붙었다. 시비는 마침내 주먹다짐으로 이어졌다. 패싸움이었다. 싸움은 어느새 시합을 제안해온 아이들이 밀리는 상황으로 치달아갔다.

결국 도망치는 아이들과 이들을 뒤쫓는 아이들. 교문 밖을 나서자마자 한 녀석이 가방을 뒤졌다. 덩치가 또래들보다 유난히 큰 아이는 가방 속 도시락에서 포크를 꺼내들고는 다시 아이들을 뒤쫓았다. 그보다 덩치가 좀 작은 또 다른 녀석은 기술과목 시간에 원을 그리는 데나 써야 할, 끝이 날카롭게 뾰족한 컴퍼스를 꺼냈다. 두 녀석은 끝내 그들을 잡지 못했다. 덩치 큰 녀석은 분이 삭히지 않는 듯 씩씩대며 담배를 물었다. 학교 앞 대로변 문구점의 섹시한 여주인이 아이들을 곁눈질했다.


# 그해 가을, 맞짱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도 캡짱이 있었다. 겁 없이 주먹 잘 쓰는 녀석의 이름이 전설처럼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캡짱이 있으면 또 그 자리를 넘보는 놈도 있기 마련. 아이들은 두 녀석이 ‘맞짱을 뜨면’ 이길 승자를 가늠하며 상상했다.

캡짱은 학교에서 잘리고 말았다. 자퇴를 한 것인지, 퇴학을 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자연스레 다른 녀석이 캡짱으로 불렸다.

총점 200점의 ‘연합고사’로 불리는 고교입시 제도가 시행중이던 때, 아이들은 체력장에 응시해야 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윗몸일으키기, 멀리뛰기, 100m 달리기, 오래(1000m)달리기, 턱걸이(여학생은 철봉에 오래 매달리기) 등 일종의 체력검정으로 200점 가운데 20점(만점)부터 15점까지 점수를 얻었다.

검정의 공정성을 위해 다른 학교에 가서 체력장을 치른 아이들은 어디론가 몰려갔다. 그 학교의 캡짱과 자신들의 캡짱이 맞짱을 뜨기로 한 것이다. 맞짱은 아이들의 캡짱이 승리를 거둔 것으로 일단락됐다.

다음날 아이들은 그 전날 벌어진 대전에 대해 떠들었다.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자신들의 캡짱이 얼마나 위대한지 침을 튀어가며 친구들에게 전파했다. 회자의 내용은 얼마간 부풀려졌고, 캡짱은 그렇게 또래들의 영웅이 되어갔다.

영화 ‘품행제로’의 한 장면. 사진제공|KM컬쳐



# 그해 봄, 호출

영웅은 고등학교에 올라가 어느새 2학년이 됐다. 누군가 그에게 불려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 수 없지만, 또래들보다 1년 뒤늦게 입학한 신입생이 축 늘어진 어깨를 하고 영웅 앞에 섰다. 그 역시 한때 주먹 좀 휘두르던 아이였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나돌기는 했다. 영웅의 곁에는 그를 추종하는 아이들이 “한쪽 다리 건들거리면서/삐딱하게 서”(김애란, 시 ‘난 삐딱한 게 좋아’ 중에서) 있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다리를 쫙 벌린 채 계단에 앉은 영웅은 매서운 눈빛으로 신입생을 추궁하기 시작했다.

“너 이 새끼, 1년 꿀었다며?”

신입생은 말이 없었다. 힘없는 눈빛으로 영웅을 쳐다볼 뿐이었다. 눈알에 잔뜩 힘이 들어간 영웅은 “엉기지 마”라는 경고로 신입생을 보내 주었다. 신입생이 자신들에게 엉길 이유는 없었는데도, 영웅과 그 무리들은 후배의 기선을 제압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혹여나 다른 아이에게 그 자리를 빼앗기는 ‘쪽팔리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나름의 전략이기도 했다.

그것이 캡짱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 그해 여름, 또 맞짱

문덕고의 캡짱 중필(류승범)도 숙명을 피해가기 어려웠다. 아이들은 그 고달픈 숙명을 부추겼다. 중필도 내심 강호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전학생(김광일)을 두고만 볼 수 없었던 터이기는 했다. 치고 때리고 막고 넘어지고 쓰러져가는 막싸움 끝에 마침내 승리를 쟁취한 중필이 “이 X새끼들아! 내가 캡짱이야!”라고 선언하면서 아이들은 진짜 캡짱의 위용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전설은 그냥 전설이 아니었던 거다.

그렇게 아이들은 자라났다. 정란여고의 민희(임은경)를 짝사랑하는 중필, 그런 그를 역시 짝사랑하는 정란여고의 ‘캡짱’인 날라리 여고생 나영(공효진), 중필의 ‘꼬붕’인 수동(봉태규)도 어느새 어른이 됐다. 민희에게 잘 보이고 싶어 기타를 들었던 중필은 바로 그 기타로 교습소를 차려 밥 벌어 먹고 살아간다. 민희는 연구소 연구원, 나영은 ‘길거리 캐스팅’된 CF모델, 수동은 자신의 재능을 뒤늦게 발견해 한 놀이공원에서 일하는 요들송 가수가 됐다.

어른이 되어 맞는 어느 겨울, 중필은 기타교습소 창 밖으로 ‘캡짱’의 추억을 떠올리며 미소 짓는다. 전설은 그렇게 추억의 눈이 되어 아이들의 머리 위에 사뿐히 내려앉는다. 추억을 가볍게 되새기며 아이들은 제각각 자신들의 자리를 찾아가고야 만 것이다.

괜한 우쭐댐으로 좌충우돌할지언정, 그것이야말로 아이들의 성장기를 채워준다. 질풍노도가 아니라면 아이들은 자라날 수 없다. 그렇게 좌충우돌하면서 아이들은 쑥쑥 커갈 수밖에 없다.

작가 김려령의 주인공 ‘완득이’도 말하지 않았나.

“흘려보낸 내 하루들. 대단한 거 하나 없는 내 인생, 그렇게 대충 살면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 거창하고 대단하지 않아도 좋다. 작은 하루가 모여 큰 하루가 된다. 평범하지만 단단하고 꽉 찬 하루를 꿰어 훗날 근사한 인생 목걸이로 완성할 것이다.”

그러니 좀 어긋난다고, 좀 삐딱하다고 크게 나무랄 일은 아닐 성싶다. 시인 김애란은 그래서 물었다. “생각해 봐/꼿꼿이 자라는 나무와/삐딱하게 자라는 나무/애들이 어디에서 놀지?/어디가 재밌을 거 같아?/어디에 기대고 싶어?/어디가 편할 거 같아?”(위 시 중에서)라고.

우리의 ‘캡짱’과 그 무리들도 이제는 어디선가 건강한 시민으로 제 몫을 해가며 살아가고 있다. 질풍노도와 좌충우돌과 막싸움 끝에 자신들의 속을 채우는 방법을 배워간 덕분이다. “속이 없는 게 아니야, 속을 비워 두는 거야!”(박성우의 시 ‘대나무 성장통’)라는 말에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게 아니다.


■ 영화 ‘품행제로’

1980년대 말쯤으로 보이는 시기, 문덕고 캡짱 중필의 성장기. 주연배우 류승범의 ‘양아치스러운’ 연기가 일품이다. 날라리 여고생 나영 역의 공효진과 민희 역의 ‘TTL 소녀’ 임은경, 중필의 친구 수동 역의 봉태규 등도 맛깔스런 연기를 펼쳐냈다. 조근식 감독이 이들을 통해 10대들만의 세상을 발랄하게 그려냈다.

윤여수 기자 tadada@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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