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수의 라스트 씬] 스크린 속 묵직한 울림…권력? 세상은 ‘보통사람들’이 바꾼다

입력 2017-12-22 06: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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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한 권력은 백골단으로 불린 사복경찰(오른쪽 뒷모습)을 앞세워 수시로 시민들의 양심을 불심검문했다. 사진은 영화에서 87학번 대학생 연희 역을 맡은 김태리가 그 검문망을 지나는 모습. 사진제공|우정필름

■ 영화 ‘1987’

박종철 고문치사부터 6월 민주항쟁까지
장준환 감독, 다큐처럼 사실적으로 담아
거리로 나선 시민·학생·달동네 아저씨…
모두가 뜨거웠던 그때,
모두가 세상을 바꾼 주인공들


단순히 이야기의 결말만은 아닐 터이다. 수많은 상징과 은유가 포함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들여다보는 이들이 스스로 그 결론을 맺어주길 바라는 ‘열린 결말’로서 갈무리하기도 한다. 한 편의 영화가 관객에게 안겨주는 진한 여운이 발원하는 또 하나의 지점, 마지막 장면, 바로 ‘라스트 씬’(Last Scene)이다. 그래서 ‘라스트 씬’은 어쩌면 한 편의 영화가 드러내려는 모든 것이 담긴, 단 하나의 장면일지 모른다. 때로는 ‘에필로그’로서 더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경우도 많아서 ‘라스트 씬’의 여운은 더욱 깊고 커지기도 한다. 표기법상 맞는 표현인 ‘라스트 신’이 아닌 ‘라스트 씬’이라 쓰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스물여덟살 오모씨와 그보다 한 살 아래인 이모씨는 토요일이었던 1987년 6월13일 오전 11시 서울 명동성당에서 혼배미사를 올리며 결혼했다. 이들의 행복한 출발을 300여명의 하객이 축하했다.

이들의 결혼식 직후인 낮 12시에도 또 한 쌍의 혼배미사가 거행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에 앞서 신랑신부와 그 가족들은 장소를 옮겼다. 관련 사항을 공지해 성당 입구에 붙여 하객을 안내했다. 공고문 옆에는 11시 오씨와 이씨의 혼배미사가 예정대로 치러진다는 또 다른 공고문이 붙었다. 하객들이 모든 결혼식이 취소된 것으로 혼동할 것을 우려한 것이었다.

성당 밖에선 피곤한 얼굴을 한 어두운 녹갈색의 방석복을 입은 검은 방석모들이 횡대와 종대로 한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 철통같은 대열 속을 결혼식 하객들만이 오갔다.

영화 ‘1987’의 한 장면. 사진제공|우정필름



# 6월, 성당의 혼배미사

오씨와 이씨의 또 다른 하객들은 성당의 본당 밖 광장에 있었다. 나흘 전 밤 성당으로 스며든 700여명의 학생들과 시민들이었다. 이들은 결혼식을 마치고 본당 밖으로 빠져 나오는 신랑 오씨와 신부 이씨의 새로운 앞날을 축복해주었다.

성당 바로 옆 계성여고 학생들은 매일 자신들의 도시락을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기꺼이 건네주었다. 서울 상계동에서 건너온 달동네 사람들은 성당에 모여든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밥을 해 먹였고 반찬을 차려주었다. 달동네 사람들은 학생들과 시민들보다 한참 먼저 성당 광장에서 이슬을 이불 삼았던 터였다.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서울의 초라하고 가난한 풍경을 내보이기 싫었던 정권의 불도저에 의해 자신들의 판잣집마저 무참히 짓밟힌 다음이었다.

학생들과 시민들과 달동네 사람들과 가톨릭 사제들과 수녀들과 성당 밖의 무수한 이들은 매일 밤 방석모들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위해 촛불을 밝혔다.

이 광경을 안타까움 속에 지켜보던 어머니들은 방석복의 대열 앞으로 당당히 나아가 방석모의 철망이나 방패에 꽃을 꽂아 주기도 했다. 혹여 학생 및 시민들과 방석모들 사이에 벌어질지도 모를 투석전에 대비하려 헬멧을 쓴, 최루가스의 매캐함을 어떻게든 최소화하려 방독면으로 ‘중무장’한, ‘보도’ 완장의 사진기자들은 눈물로 셔터를 눌러댔다.

하지만 꽃은 금세 시들곤 했다. 방석모의 철망이나 방패의 윗선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며 평화를 갈구한 어머니들은 되돌아서야 했다.

방석모의 대열 속에서도 누군가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그 뒤로 상관인 자의 욕설이 터져 나왔다. 그들 사이사이에서 ‘청청패션’들은 매서운 눈매를 버리지 않았다. ‘청청패션’들은 성당 입구는 물론 서울 도심 곳곳에서 길을 지나는 모든 시민들을 경계하고 있었다. 청재킷(그래서 이들을 ‘청카바’라 부르기도 했다)에 청바지를 입고 헬멧을 옆구리에 낀 채 방독면 주머니를 어깨에 비껴 멘 이들은 저마다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날렵해 보였다. ‘백골단’이었다.

이들은 대열을 벗어나와 방독면 주머니와 엇갈리게 멘 또 다른 주머니에서 꺼낸 ‘사과탄’(KM25탄·총에 장전해 쏘는 통조림 모양의 SY44탄과는 달리, 작은 사과처럼 생긴 최루탄의 일종)을 군중을 향해 내던지며 순식간의 힘으로 달려 나오곤 했다. 이들의 발차기나 날아 차기, 곤봉 휘두르기 등 실력은 뛰어났다. 이들이 대열을 벗어나 달려 나오면 나올수록 시민들은 무력해졌다.

영화 ‘1987’의 한 장면들. 사진제공|우정필름



# 밀려나고 밀려났지만…

백골단은 그해 1월26일 오후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 앞에서도 포진했다. 기독교회관에는 CBS 방송사가 입주해 있었다.

이날 CBS 라디오는 시사프로그램 ‘월요특집’을 생방송했다. 하지만 방송은 1시간여 만에 중단됐다. 한참 동안 음악만이 흘러 나왔다. 12일 전 치안본부(현 경찰청)의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한 대학생이 물고문 끝에 숨져간 비극과 관련해 ‘고문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는 내용을 방송하던 중이었다.

소식을 들은 수십여 시민들이 기독교회관 앞으로 몰려들었다. 누군가의 선창으로 시작된 구호를 시민들은 두려움 속에 따라 외쳤다. 백골단이 예의 날렵함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시민들은 서로 어깨를 걸고 스크럼을 짰다. 하지만 백골단의 무력 앞에 스크럼은 무너졌다. 시민들은 거리를 내달려 도망쳤다. 백골단은 종로3가 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 앞까지 집요하게 시민들을 쫓았다. 그리고 몇몇의 멱살을 잡고 씩씩거리며 돌아갔다.

시민들은 그렇게 늘 권력의 폭력에 밀려나고 밀려났다. 6월10일 밤 결국 학생들과 시민들은 결국 명동성당에 스며들 수밖에 없었다.

학생들과 시민들과 달동네 사람들과 성당 밖 수많은 이들은 대통령을 자신들이 직접 뽑지 못하는 것을 규탄했다. 나아가 자신들이 선택하지 않은 권력이 오히려 자신들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것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권력은 여전히 무너지지 않을 듯 굳건했지만, 학생들과 시민들과 달동네 사람들과 성당 밖 수많은 이들은 승리를 믿고 또 믿었다.

실제로 승리는 다가왔다. 그 6개월 뒤 이들은 대통령을 제 손으로 뽑게 됐다. 이제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줄 것이란 기대를 모았던 유력 정치인들은 분열했다. 직전의 부정한 권력의 후계자가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섰다. 그 치열했던 거리의 싸움과, 싸움으로부터 싹튼 희망은 허망해지고 말았다. 그래도 사람들은 쉽게 절망하지 않았다. 순간의 아픔을 딛고 일어서 다시 저항과 싸움을 이어갔다. 이미 승리의 경험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험은 신념을 낳고, 신념은 새로운 희망을 가져다준다. 결국 세상이 누구의 편인지도 경험과 신념과 희망은 알고 있는 셈이다. 영화 ‘1987’이 ‘모두가 주인공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다.


■ 영화 ‘1987’은?

19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이 치안본부의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경찰의 물고문으로 숨져 간 뒤 그해 6월 수백만의 시민과 학생이 민주화를 요구하며 거리로 나설 때까지 이야기. 경찰은 고문치사 사건을 은폐·조작하지만 기자와 검사와 교도관과 재야인사 등은 끈질기게 그 진실을 밝혀내려 애쓴다. 장준환 감독이 연출한 영화는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당시 상황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며 그 시대적 의미를 부여하고, 여기에 실존인물들의 에피소드를 적절히 버무려 드라마의 ‘재미’도 빚어냈다. 우뚝한 주인공 없이도 김윤석, 하정우, 유해진, 김태리, 이희준, 김의성, 강동원, 설경구 등 배우들의 활약도 두드러진다.

윤여수 기자 tadada@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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