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길의 스포츠에세이] 고(故) 장덕진 축구협회장의 남다른 열정을 아시나요

입력 2017-12-22 0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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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축구협회(KFA)는 19일 ‘2017 KFA 시상식’에서 장덕진 전 대한축구협회장에게 공헌상을 수여했다. 장 회장은 4월에 세상을 떠났다. 1970년 7월 메르데카대회에서 우승한 뒤 한국대표팀 선수들과 함께 카퍼레이드에 나선 고(故) 장덕진(사진 왼쪽) 회장의 모습. 사진제공 | 축구수집가 이재형 씨

대한축구협회(KFA)는 19일 열린 ‘2017 KFA 시상식’에서 특별한 분에게 공헌상을 수여했다. 주인공은 지난 4월 세상을 떠난 고(故) 장덕진 회장이다(향년 83세). 그는 1970년대 초반 축구협회장을 맡아 한국 축구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장 회장을 아는 축구인들은 “엄청난 열정을 가지신 분”이라고 기억한다.

축구협회가 발간한 ‘한국축구 100년사’에 장 회장을 소개한 첫 문단은 이렇다. ‘1968년 재무부 이재국에는 축구 붐이 일었다. 사법, 행정, 외무고시 3과에 합격한 소장 관료의 선두주자로 나선 장덕진 국장이 부임하면서부터다. 장 국장이 축구를 장려하면서 축구에 대한 열기가 일어난 것이다. 축구경기를 통해 이재국은 단결하고 업무추진능률은 무섭게 상승했다.’

천재 소리를 듣던 그는 고려대학교 재학 시절 축구부원들의 훈련 모습을 보면서 축구의 매력에 빠진 것으로 전해진다.

故 장덕진


그가 축구협회와 인연을 맺은 건 1969년 재무이사에 위촉되면서부터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실업축구팀 창단이었다. 당시만 해도 제일모직, 대한중석, 금성방직 정도가 실업팀의 전부여서 선수들 일자리가 턱없이 부족했다.

재무부 관료로 재직하면서 알게 된 시중 은행장들을 설득했고, 1969년 한해에만 은행 축구팀 7개가 생겼다. 축구인들이 그토록 바랐던 선수생활 연장의 길을 터준 것이다. 1970년 1월 대한축구협회장에 추대된 그는 금융권 축구팀 창단에 속도를 붙여 총 13개팀을 탄생시켰다. 당시 은행팀에서 선수로 뛰었던 원로들은 “장덕진 회장이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들을 다 먹여 살린 것이다”라고 전했다.

동아일보에 따르면(1970년 4월 30일자), 1억원 기금 마련과 합리적인 협회 운영, 축구인의 집 개설, 국내 스포츠 사상 첫 축구선수 보험가입, 지방축구 육성을 위한 기금 지원, 전문지 발간 등을 장 회장 취임 100일의 성과로 꼽았다. 축구장 건립 등 공약이 추진되지 못한 부분도 있었지만, 장 회장이 이룬 성과는 한국축구의 토양을 바꿀 정도로 큰 변화를 불러 일으켰다.

특히 그가 한 달 만에 마련한 기금 1억원은 당시 남서울아파트(반포주공아파트) 분양가가 600만원(32평형)인 걸 감안하면 엄청난 액수였는데, 항상 쪼들렸던 축구협회가 비로소 어깨를 편 계기가 됐다.

1970년대 축구팬들을 열광시켰던 국내 첫 국제축구대회 박스컵도 그의 재임시절 만들어졌다. 그는 동남아시아에서 인기를 끌었던 메르데카컵이나 킹스컵을 능가하는 대회를 만들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박스컵에서 시축하는 박정희 전 대통령. 사진제공|대한축구협회


북한과의 대결을 의식해 대표팀 1진 청룡과 2진 백호로 나눠 선의의 경쟁을 벌이도록 했고, 이후엔 상비군 시스템도 도입했다. 포르투갈의 벤피카, 브라질의 산토스, 플라멩고 같은 유명 클럽팀을 초청해 대표팀과 평가전을 가진 것도 그 무렵이다. 상상도 못했던 대표팀의 장기간 해외전지훈련도 시행됐다. 1972년에는 한국과 일본의 정기전도 시작됐다.

축구 저변과 축구 붐 조성에도 앞장섰다. 어린이축구를 장려하기 위해 학교는 물론, 시군구 단위로 어린이축구팀을 만들었다. 전국의 초등학교에 축구공 3만개 보내기 캠페인을 벌여 큰 호응을 얻었다. 1972년에는 지금의 조기축구대회에 해당하는 새마을축구대회를 시도대항전으로 처음 열었다.

장 회장은 3년7개월간의 재임기간 동안 엄청난 일들을 해냈다. 이는 당시의 성숙되지 못했던 축구 환경이나 문화 등을 감안하면 결코 이루기 쉽지 않은 업적이라고 평가할만하다.

축구협회장이자 국회의원이었던 그는 1973년 8월 농수산부 차관에 임명되면서 회장에서 물러났다. 안타까운 건 그가 추진했던 많은 일들이 그의 사임 이후 동력을 잃고 대부분 흐지부지됐다는 점이다. 축구협회는 그의 공적을 높이 평가해 지난 2005년 명예의 전당 헌액자로 추천했지만, 본인이 극구 사양한 것으로 전해진다.

1970년대 한국축구의 패러다임을 바꾼 장 회장의 남다른 축구열정과 추진력은 한 단계 도약을 꿈꾸는 오늘날 한국축구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최현길 전문기자 choihg2@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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