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수의 라스트 씬] “나, 다시 돌아갈래”…순수했던 시절을 향한 처절한 몸부림

입력 2018-01-19 06: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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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설경구와 문소리를 발견한 영화 ‘박하사탕’은 김영호라는 한 남자가 보낸 1979년부터 1999년까지의 시간을 담는다. 기찻길 위에서 달려오는 기차를 향한 주인공의 외침은 따스했던 시절을 향한 처절한 몸부림이다. 사진제공|이스트필름

■ 영화 ‘박하사탕’


순임의 박하사탕 맛이 세상 최고였던
영호를 고문경찰로 만든 잔인한 현실
상처 덧날수록 떠오른 아름답던 기억
달려오는 열차 앞에서 한 마지막 절규
다시 돌아가면 그때처럼 살 수 있겠지?

2012년 겨울의 어느 날 밤, 명 칼럼니스트이기도 한 서울대 사회학과 송호근 교수는 모임에서 술을 마신 뒤 대리기사가 운전하는 차에 올랐다. “대리기사는 중견기업 부장을 끝으로 퇴직한”, 송 교수와 “거의 동년배인 베이비부머”였다. 기사는 “생활비를 보탤 겸 저녁 알바를 뛴다”고 말했다. 송 교수는 “그의 지난 얘기를 들으면서 한없는 서글픔이 몰려왔다”고 돌이켰다. 송 교수는 “대리기사와 내가 함께 겪었던 긴 세월의 공유지에는 한국의 현대사를 수놓은 중대한 사건들과 이제는 잊혀진 현상과 개념들이 잡초처럼 무성하다”고 덧붙였다.(‘그들은 소리내 울지 않는다’ 중에서)


● “공돌이와 공순이”, 순수의 시절


송호근 교수는 1956년생이다. 그는 위 책에서 “1955년∼63년 세상에 태어난 전후 세대로 약 715만 명이 존재한다”고 ‘베이비부머’를 정의했다. 이들 세대는 한국전쟁의 포연이 채 가시지 않은 시기에 세상에 나와 4·19, 5·16, 10월 유신과 긴급조치, 10·26, 12·12, 5·18 등 숫자로 상징되는 “한국의 현대사를 수놓은 중대한 사건들”을 지나쳤다. 1997년 11월 ‘IMF’라는 혹독한 경제위기와 구조조정의 암울한 터널도 통과했다.

송호근 교수의 말에 따르면 이들은 “공돌이와 공순이의 원조”다. 1970년대 “산업화의 주력부대”를 구성한 이들은 가파른 벼랑에 매달려 저임금에 시달리면서도 끊임없이 노동을 이어가야 했던 도시의 공장 노동자들이었다.

1960년생 김영호도 그랬다. 1979년 봄의 즈음, 서울 가리봉동의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야학에도 나갔다. 야학은 저임금의 고리를 끊고 비인간적 노동환경을 개선하려 애쓴 노동자들의 모임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영호는 거기서 만난 순박한 여자, 순임을 가슴에 품고 있다. 순임 역시 순수해 보이는 앳된 스무 살의 청년 영호가 싫지 않았다. 이들은 그 순수하고 순박한 곁눈질로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

순임은 자신이 공장에서 하루에 1000개씩 싸는 박하사탕을 영호에게 수줍게 건넸다. 영호에게 그 맛은 “세상 최고”였다. 순임은 영호가 입대한 뒤에도 편지와 함께 박하사탕을 보내왔다. 영호는 이를 반합에 숨겨 두지만 무참한 군홧발의 시대는 끝내 사탕을 으깨어 놓고 만다.

영호의 삶은 바로 거기서부터 무너져 내렸다. 오랜 시간 많은 이들을 쉽게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은 극심한 부채의식과 고통에 시달리게 한 광주의 1980년 5월부터였다. 순임의 환영인 듯한 여고생을 오발해 죽인 자책감은 영호의 다리에도 총상의 아픔을 남겼다.

영화 ‘박하사탕’의 한 장면. 사진제공|이스트필름



● “착한 손”, 멀어져버린 시절

영호의 손은 두툼하면서도 거칠다. 순임은 그의 그런 “착한 손”이 좋았다. 영호는 두려움과 공포 속에 그 “착한 손”으로 광주에서 M16 소총의 방아쇠를 잘못 당겼다. “삶은 아름답다”는 믿음으로 현실 속으로 뛰어든 운동권 대학생을 경찰이 되어 고문한 손도, 역시 두려움과 공포로 저도 모르게 싸버린 학생의 똥을 묻힌 손도, 그 냄새가 영원히 가시지 않을 것만 같은 손도, 그것이었다.

하지만 영호는 “착한 손”을 애써 외면했다. 삶이 안겨주는 고통 앞에서 그는 자신의 두툼한 “착한 손” 대신 스스로를 나락으로 몰고 갔다.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순임은 나타났다. 총상의 아픔은 순간적인 절룩거림의 고통이 되곤 했다. 심지어 IMF의 직격탄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채 생을 마감하려 하는 순간에도 순임은 기어이 영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무려 20년의 세월은 두 사람의 끊어지지 않는 인연으로써 영호의 총상을 덧나게 했다.

상처가 덧날수록 드러나는 것은 어이없게도, 눈부시게 희도록 따스하고 순박했던,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이후의 선택은 온전히 그의 몫이었다. 영호는 선택의 갈림길 앞에서 다소 주춤거렸지만 발걸음은 늘 더럽고 속물스러운 현실로만 향했다. 스스로를 그렇게 몰고 나아갔다.

“착한 손”의 아름다웠던 삶과 시절을 애써 부정한 탓이다. 선택이 남긴 자책을 자학하기 위함이었다.

이를 쉽게 알아채지 못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삶은 아름답”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이기도 하다. 눈부시게 희도록 따스했던, 순박했던 한 시절은 이미 지나버렸다고 믿음으로써 더욱 그렇다. 이미 경험한 가차 없는 폭력적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안타까운 믿음이야말로 또 한쪽의 본질이기도 하다.

그래서 영호는 훨씬 더 깊은 자학의 늪을 파놓고야 말았다. 그토록 순수했던 시절이었다면 왜 또 그토록 잔인하고 가혹한 현실을 거부하지 못했겠느냐는, 이미 그 전제가 틀려버린 자문자답의 쓰린 오답도 바로 거기에서 나온다.

영화 ‘박하사탕’ 포스터. 사진제공|신도필름



● “나, 다시 돌아갈래!”

그래도 영호는 순임에게 돌아갈 수 있을까.

영호는 삶의 벼랑 끝에서 다시 순임을 맞닥뜨린 채 서럽게 운다. 눈물은 회한이 된다. 지독한 자학의 깊은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할 때, 아니 이미 알면서도 애써 “착한 손”을 거부하고 부정했음을 뒤늦게 인정하고서야 영호는 회한의 설움을 운다.

다행스럽게도 눈물은 위안의 여지를 남겨준다. 사진기로 꽃을 찍는 것을 좋아했던 스무 살의 앳된 시절로 돌아가 맑은 햇살을 받으며 영호가 흘리는 한 줄기 눈물은 비로소 박하사탕의 콕 찌르는 소박한 자극의 위안으로 남는다.

영호는 끝내 달려오는 열차 앞에서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절규했다. 하지만 영호는 바로 그 열차를 타고 이미 “착한 손”의 시절로 되돌아간 것이나 마찬가지일 터이다.

위안의 눈물은 바로 그 증거이다. 속물적 자책과 자학의 짧지 않은 세월은 비록 회한으로 남았을지언정, 수줍게 웃는 영호의 눈물과 절규는 “다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착한 손”과 “삶은 아름답다”고 믿었던 따스했던 한 시절을 향한 처절한 몸부림이다. 그래서 정말 또 다행스럽게도 눈물과 절규는 그를 바로 그 시절로 데려갔을 게다.

그런 영호를 바라보는 모든 이들에게도 이 같은 믿음이 또 다행스런 독해가 되기를!

P.S. 송호근 교수는 가수 조용필의 제안으로 노래 ‘어느 날 귀로(歸路)에서’의 노랫말을 이렇게 썼다.

“…/나는 왜 귀로를 맴돌고 있나/아직 꿈이 가득해/그 자리에/나는 왜 귀로를 서성거리나/돌이킬 순 없지만/이제는 알 것 같은데.”


■ 영화 ‘박하사탕’은?

새로운 세기가 시작된다고 믿었던 2000년 1월1일 개봉작. 소설가 출신 이창동 감독의 두 번째 연출작이다. 1979년 봄부터 1999년까지 20년의 세월을 살아온 남자 김영호가 1980년 5월 광주 등 한국 현대사의 굴곡진 시간을 통과하며 무너져가는, 회한의 기록이다. 배우 설경구와 문소리를 충무로의 또 다른 주역으로 각인시킨 무대이기도 하다. 두 배우는 2002년 ‘오아시스’에서도 이창동 감독과 힘을 모았다.

윤여수 기자 tadada@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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