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수의 라스트 씬] 혹독한 남극…오로라보다 더 간절한 ‘라멘 한 그릇’

입력 2018-01-26 06: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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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학자 모토야마(왼쪽 두 번째)의 생일을 맞아 통 크게 한 상 차린 남극기지 대원들. 혹독한 환경 아래서도 따뜻한 음식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도 작은 위안을 준다. 사진출처|영화 ‘남극의 쉐프’ 캡처

■ 영화 ‘남극의 쉐프’

펭귄도, 바다표범도 없는 혹독한 남극기지에서 생활하는 대원들
서로를 위해 만든 어설픈 요리…마음의 허기 달래는 유일한 위안

북극권에서 살아가는 ‘에스키모’ 이누이트족은 오로라가 추위 속 밤길을 헤매는 여행자들에 건네는 영혼의 선물이라 믿어 왔다. 횃불로 어둠을 밝히려는 여행자들에게 영혼은 더없는 아름다움으로써 길을 안내했다.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눈보라 속의 밤길을 여행자들은 오로라의 빛을 따라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갔을 터이다.

빛은 밤하늘을 아로 새기며 일렁여 몽환적으로 아름다웠을 것이다. 시인 민영이 ‘…/오로라가 흐느끼는 이 극한의 바다 위에서/머물 곳 없이 유랑하는 어부들에게/편히 쉴 곳을 점지해다오/…‘(시 ‘북명의 바다’ 중에서)라고 노래하며 위안과 희망을 안겨주려 했던 것도 이누이트족 사이에 오래도록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과 맞닿아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어감까지도 신비스러운 느낌을 건네는 오로라는 태양과 지구의 합작품이다. 가장 낮은 에너지 상태의 고체에 열을 가하면 액체가, 여기에 다시 열에너지를 더하면 기체가 된다. 더욱 큰 열에너지에 의해 기체는 플라스마의 상태로 변화하는데, 태양에서 방출된 플라스마는 지구 자기장의 힘으로 대기의 공기 분자와 반응해 빛을 낸다. 이것이 바로 오로라다.

파스텔 물감을 흩뿌린 듯, 빨갛고 노란…, 갖은 색깔로 밤하늘을 수놓는 오로라는 많은 이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북극권의 그린란드와 아이슬란드는 물론 핀란드를 비롯한 북유럽권이 로망의 여행지가 된 까닭이다.

하지만 북극권에서만 오로라를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이누이트족이 오랜 세월 삶의 터전으로 삼아온 것처럼, 그래도 북극은 사람들의 왕래가 가능한 덕분에 그 환경이 바깥의 세상에 널리 알려짐으로써 오로라의 전설도 여전히 살아 숨쉰다.

오로라는 남극의 밤하늘에도 나타난다. 남극은 북극처럼 그 자체로 거대한 얼음덩어리이기도 하지만, 북극의 기온과 비할 데 없는 혹독한 추위 등으로 사람이 온전히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을 이룬다. 당연히 남극의 오로라는 북극의 그것만큼 회자된 적이 없다.

영화 ‘남극의 쉐프’. 사진제공|스폰지

● 펭귄도…, 바다표범도…, 없다!

1997년 8월의 어느 날, 남극의 일본 돔 후지 기지에서 대기학자 히라바야시는 엄청난 오로라를 발견한다. 빙하 보조연구원인 대학원생 카와무라가 “저런 오로라는 처음 본다”고 할 정도다.

이들은 그해 초 이곳에 파견됐다. 이들은 대장인 기상학자 카네다 히로시를 비롯해 의사인 후쿠다, 빙하학자인 모토야마, 통신 담당인 니시히라, 차량 담당 미코시바 그리고 해상보안청에서 파견한 조리 담당 니시무라와 함께 이 곳에서 극지 연구를 하고 있다.

돔 후지 기지는 영하 50℃를 오르내리는 남극 내륙에 자리 잡았다. 후지산(3776m)보다 높은 해발 3800km, 기압은 일본보다 60%나 낮아 100℃가 아닌 85℃에서 물이 끓는 곳이다. 일본의 또 다른 남극기지인 연안의 쇼와 기지에서 무려 1000km가 떨어진 이 곳에선 펭귄과 바다표범은커녕 바이러스도 자라나지 못해 감기를 앓을 수도 없다.

이런 혹독한 환경 속에서도 일상은 이어진다. 딸기시럽을 얼음벌판 위에 뿌려 단맛을 보고, 베이스라인을 그려 야구를 하기도 한다. 명절에는 액운을 물리치는 전통놀이도 즐긴다. 마작과 비디오 보기도 매 한가지이다.

영화 ‘남극의 쉐프’의 한 장면. 사진출처|영화 ‘남극의 쉐프’ 캡처

그 가운데 음식은 이들에게 커다란 위안을 안겨준다.

조리사 니시무라는 냉동 건조캔, 싹이 난 무순과 콩나물 등을 기본 식재료 삼아 정성 가득 식탁을 채운다. 그 위로는 튀기고 볶고 지진 참치와 연어 등 갖은 생선이 오른다. 장조림과 명란젓 주먹밥도 사내들의 입맛을 다시게 한다. 딤섬에 볶음밤, 칸쇼새우 등 중국요리도 맛나 보인다. 동지축제 때에는 거위 간인 푸아그라와 무화과 퓌레, 발사믹 소스를 곁들인 농어 등 일품요리가 정장을 그럴 듯하게 차려 입은 사내들의 엄숙한 식사가 된다.

하지만 끝내 마음의 허기는 가시지 않는 것일까. “지긋지긋하다”며 기지에서 탈출하는 꿈을 꾸고, “뭐 하러 이런 델 왔을까” 후회하면서도 “하고 싶은 일이 여기서만 할 수 있는 일인데 어쩌냐”며 애써 스스로를 위안하지만 가슴의 한 조각 헛헛함은 어쩔 수 없다. 카네다 대장이 매일 밤 주방에서 몰래 라멘을 끓여 먹는 것도 그 헛헛함을 애써 채워보려 한 것일지 모른다.

결국 라멘은 얼마 가지 못해 바닥을 드러내고 만다. 그러는 사이 사내들의 허기진 마음 역시 바닥을 내보인다.

영화 ‘남극의 쉐프’의 한 장면. 사진제공|스폰지

● 정말 남극엔 아무것도 없을까

그래서일까. 돔 후지 기지의 사내들은 남극엔 “아무것도 없다”고 단언한다. 위안이 되어주어야 할 가족과 연인에게서조차 멀어진 탓이다.

조리사 니시무라는 남극으로 떠나오기 전 “펭귄도, 바다표범도 없어. 아무 것도 없어”라며 “아빠가 이런 하얗고 이상한 데 가면 쓸쓸하지?”라고 파견의 억울함을 애써 하소연하기도 했다. 하지만 딸에게서 돌아온 답은 “별로”라는 시큰둥함 뿐이었다. 보조 연구원 카와무라의 여자친구는 무심한 전화통화조차 버거워 하며 끝내 떠나가 버렸다. 결국 사내들의 마음은 얼어간다.

그래도 사내들은 서로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내려 주방을 찾는다. 어설픈 요리를 차려내 서로의 옆자리를 지키려 애쓴다. 비록 어설프긴 하여도 사내들의 마음과 마음은 음식으로 서로에게 더욱 따뜻한 존재가 되어줄 수 있다. 남극의 식탁은 그렇게 또 위안으로 배를 채우게 한다. 기지 주변에선 결코 찾아볼 수 없지만 남극 어딘가에서 여전히 삶을 이어가는 펭귄들처럼. 휘몰아치는 칼바람의 눈보라와 그 혹독함의 정도를 상상할 수 없는 추위를 이겨내려 서로의 몸과 몸을 이어 붙이는 펭귄들의, “…가슴에 새끼들을 품은 채 바위처럼 붙박여 눈보라를 맞는 장면들이 장엄하기 이를 데 없”(이시영, 시 ‘극지’ 중에서)는 ‘허들링’처럼.

그래서 “남극에는 아무것도 없”지 않다. 바로, 사람이 있다!

P.S. 라멘을 찾는 카네다 대장의 그것처럼 세상 가장 간절한 눈빛을 본 적이 없다. 카네다는 라멘을 먹을 수 있을까. 돔 후지 기지의 연구원들은 대부분 과학자 아닌가. 빙하학자 모토야마는 간수가 없어 반죽을 할 수 없다는 니시무라에게 “간수는 탄산가스가 든 물이고, 베이킹파우더는 부풀리는 것, 즉 탄산나트륨이니 여기에 물을 섞으면 탄산가스가 나온다. 거기에 소금만 부으면 간수와 흡사하지 않을까?”라고 말한다. 물론 “이론상”이다. 눈빛을 빛내는 니시무라. 오로라가 문제가 아니다. 가슴을 데워주는 라멘에 비할 바가 아니니까.

영화 ‘남극의 쉐프’에서 조리사 니시무라 역을 맡은 배우 사카이 마사토. 사진제공|스폰지

■ 영화 ‘남극의 쉐프’

극한의 환경 속에서 극지 연구에 나선 일본 남극기지 대원들의 이야기. 거창한 줄거리나 스펙터클한 영상은 없다. 8명의 대원들이 극지의 외로운 일상을 조리사 니시무라의 음식으로 위안을 받고 서로 위로하는 모습을 잔잔한 휴먼코미디로 담아냈다. 실제 남극기지에서 일한 니시무라 준 대원의 에세이 ‘재미있는 남극 요리인’을 영화화했다. 드라마 ‘아츠히메’ 등에 출연한 사카이 마사토가 니시무라 역을 맡아 주연했다. 영화 ‘카모메 식당’ ‘안경’ 등에 참여한 푸드스타일리스트 이이지마 나오미의 솜씨가 돋보인다. 2009년 오키타 슈이치 감독의 데뷔작이다.

윤여수 기자 tadada@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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