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건 전문기자의 아날로그 스포츠] 불판위 고기처럼 타버린 해태의 속마음…기적우승의 변곡점 신치용의 술잔 토크

입력 2018-03-20 05: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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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식은 양면의 칼이다. 잘만 하면 팀워크를 강화해주는 긍정의 효과를 주지만, 반대의 경우 팀을 모래알로 만들어버린다. 삼성화재는 2010∼2011시즌 최하위로 떨어졌지만 3라운드 뒤 브레이크 기간을 앞두고 심야회식을 통해 선수들을 하나로 뭉치게 했고, 결국 기적 같은 우승을 달성했다. 신치용 감독이 했던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배구를 하자”는 말에 성공의 비밀이 담겨 있다. 사진제공|KOVO

■ 독이 된 회식·약이 된 회식

해태, 불고기 화형식 주동자 색출 소동
배구단 고위층 격려가 피곤한 술자리로
생각 없는 선수 비교·험담 치명적 상처
신치용 “얘기 잘 들어주는 게 지도자의 일”


대한민국 프로스포츠 역사상 가장 유명했던 회식은 프로야구 해태 타이거즈의 ‘불고기 화형식’이었을 것이다. 1984년 4월 10일 해태 선수들이 박건배 구단주가 참석한 회식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불만을 드러낸 사건이다.

해태 타이거즈. 사진제공|KBO



● 1984년 해태의 불고기 화형식을 기억하나요?

1983년 해태는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다. 다음해 구단은 호주머니를 졸라맸다. 선수들에게 주던 승리수당이 절반으로 줄었다. 원정 때 사용해온 숙소가 특급호텔에서 일반호텔로 강등됐다. 연봉협상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이런저런 불만이 쌓여가던 중에 박건배 구단주는 시즌 첫 서울 원정경기에 나선 선수들을 위해 회식을 마련했다. 이 자리에서 선수들은 불판 위에 놓인 고기를 먹지 않고 일부러 태우면서 불만을 표출했다.

감히 구단주 앞에서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모락모락 퍼지는 연기 속에 구단 임직원들의 마음은 불판 위의 고기처럼 숯덩이가 됐다. 김응용 감독이 선수들에게 먹으라고 재촉했지만 요지부동. 사건 이후 구단은 주동자를 색출하려고 했다. 아직까지도 불고기 화형식의 지휘자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 선수는 몇 년 뒤 해태 유니폼을 벗고 다른 팀으로 갔지만, 아직도 자신은 주동자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회식은 선수들의 기분을 전환시키고 팀워크를 다지는 좋은 목적으로 시작하지만 때로는 예상하지 못한 반대효과도 낳는다. 최근 평창동계올림픽에서 국민들에게 감동을 줬던 모굴스키대표팀의 최재우와 김지헌이 대한스키협회로부터 영구제명 징계를 받은 것도 해외에서 경기를 마치고 선수들끼리 회식을 하다 문제가 생겼기 때문으로 보인다.


● 의미 없는 말과 생각 없는 행동으로 선수들에게 상처 주는 회식

기자가 프로배구를 취재하면서 놀란 것 가운데 하나가 회식 자리였다. 구단이 가끔 선수들을 위해 회식을 여는데, 그 자리에서 걱정스러운 광경이 자주 보였다. 주로 모기업의 임원이나 구단을 지원하는 높은 사람들이 참석하는데, 선수들을 격려하는 금일봉을 전달한 뒤 식사만으로 간단히 끝내는 경우는 없었다. 대부분은 경기 후 샤워도 못한 선수들을 두고 몇 시간씩 식사와 술자리가 이어졌다.

간혹 높으신 분들은 선수들에게 술을 권하기도 하는데 한발 더 나아가 여자선수들에게 이리 와서 술을 따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자발적으로 우러나오는 마음에서 술을 따르는 것이야 선수의 자유지만 속내는 누구도 모른다. 요즘 사회 분위기를 생각한다면 더욱 조심해야 하는 회식 자리에서의 생각 없는 행동이다.

회식의 근본적 위험성은 그 자리에서 오가는 말에 있다. 칼보다 말에 베인 상처가 더 깊고 오래간다고 했다. 회식 자리에서 주고받은 의미 없는 말이 가끔은 선수들에게 깊은 상처를 준다. 스포츠에 문외한인 이들은 깊은 생각 없이 선수들을 비교하고 때로는 험담도 한다.

안 듣는 것 같아도 선수들은 그 말을 다 듣고 가슴에 담아둔다. 그리고 상처를 받는다. 자신을 볼 때마다 맞트레이드 상대와 비교하는 말에 1년 이상 가슴앓이를 한 여자선수도 있다. 어느 구단은 회식 자리에 선수 가족도 불렀다. 겉으로는 선수들을 키우고 응원해온 가족에게도 감사를 표시하는 자리지만 역효과가 났다. 누가 뭐래도 가족의 피붙이 사랑은 맹목적이다. 우승의 공을 놓고 서로 내 자식과 남편이 잘했다고 주장하다 팀워크가 깨졌다.

어느 구단은 회식 자리에서 구단주가 주는 술잔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우승 감독을 내쳤다. 사실 그 감독은 챔피언 결정전에서 우승하고 기쁘게 술을 마시겠다고 선수들에게 약속한 상태였다. 그런 의지를 격려하고 감사해도 모자랄 마당에 재계약을 포기해 구설수에 올랐다. 물론 외부인은 절대로 모르는 다른 사정도 복합적으로 얽혀서 그랬을 테지만 대중의 판단은 달랐다.

2010~2011 시즌 삼성화재. 스포츠동아DB



● 꼴찌를 우승으로 바꾼 삼성화재의 심야회식

최근 프로농구 원주DB는 두경민과 관련한 사건으로 한동안 팀이 흔들렸지만 잘 수습했다. 마무리는 문제의 당사자들인 선수들끼리의 회식이었다. 이 자리에서 선수들은 허심탄회하게 서로에게 하고픈 속 깊은 얘기를 하며 오해를 풀었다. 그 회식 이후 두경민은 동료선수들의 품으로 다시 돌아왔다.

프로배구의 역사를 바꾼 회식도 있다. 꼴찌로 추락한 삼성화재가 정상으로 올라서는 기적을 만든 2010∼2011시즌이었다. 당시 삼성화재는 3라운드까지 최하위였다. 신치용 감독은 광저우아시안게임 남자대표팀 사령탑으로 팀을 오랫동안 비웠다. 그 후유증이 경기에 나타났다. 주전 석진욱도 부상으로 빠진 상태였다. 선수들은 내심 감독이 시즌을 포기하고 신인드래프트에서 우선순위를 차지하는 전략적 판단을 할 것이라고 짐작했다. 3라운드 뒤 열흘간의 브레이크 타임을 앞두고 신 감독은 선수들과 회식을 했다.

그 자리에서 신 감독은 선수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를 마음껏 하라고 했다. 술잔이 여러 차례 도는 동안 감독은 선수들의 얘기를 듣기만 했다. “중요한 것은 선수들을 뭉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럴 때 감독은 간을 빼놓아야 한다”고 기억했다. 신 감독은 심야까지 이어진 2차 회식을 앞두고 “회식이 끝나면 새벽 6시부터 운동한다. 마음을 모으자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머리로만 배구를 해서는 못 이긴다. 가슴으로 배구해야 이긴다”고 한마디를 했다.

그는 약속대로 새벽 6시 눈이 쌓인 운동장을 선수들과 함께 뛰었다. 시즌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고, 꼭 이기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며 선수들을 하나의 마음으로 뭉치게 했다. 결국 삼성화재는 3위로 시즌을 마친 뒤 준플레이오프∼플레이오프∼챔피언 결정전을 통과하는 기적의 우승을 차지했다.

이제 야인으로 물러난 그에게 당시 회식을 상기시키자 이런 말이 나왔다. “팀워크보다 중요한 작전은 없다. 지도자는 말 대신 솔선수범하는 행동과 헌신으로 다스려야 한다. 회식은 팀워크를 다지는 중요한 계기지만, 그 자리에서 감독이 할 일은 얘기를 잘 들어주는 것이다. 자신이 선수들을 장악하겠다고 먼저 떠들면 팀은 무조건 깨진다”고 말했다.

김종건 전문기자 marc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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