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수의 라스트 씬①] 제주의 4월…동백꽃 모가지를 꺾어도 봄은 온다

입력 2018-04-02 06: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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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지슬 - 끝나지 않은 세월2’는 제주 4·3에 휘말린 사람들이 군경 토벌대를 피해 큰 동굴에 숨었다 죽임을 당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사진은 영화 속 한 장면. 사진제공|영화사 진진

■ 영화 ‘지슬 - 끝나지 않은 세월2’

동백이 벌써 70번 피고 졌지만
4·3의 비극은 아직 끝나지 않아
산 자와 죽은 자 한날한시 모여
그 넋을 위로할 제사는 언제쯤…


목련은 하얗게 꽃으로 피어났다. 하지만 그 흰색의 우아한 아름다움을 불현듯 눈치 채며 ‘봄이 왔나보다’ 싶을 때는 이미 늦었다. 목련은 그 순간, 꽃잎을 하나둘씩 떨구어 낸다. 힘없이 떨어진 꽃잎이 봄바람에 실려 가면 벚나무가 새로운 꽃망울을 터뜨릴 것이다. 목련과 함께 동백도 붉은 꽃으로 피어났다. 목련과 동백은 남도의 섬, 제주에서도 자라난다. 아마도 지금쯤 제주 곳곳에선 동백이 한창이며, 유채도 절경을 이루고 있을 것이다. 동백과 유채의 붉고 노란 꽃은 지금, 봄, 흐드러지게 피어난다.


● 신위(神位)…영혼을 모셔 앉히다

1947년 3월1일 제주북초등학교에서 열린 3·1절 제주도 기념대회에 참가한 3만여명의 군중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거리로 나섰을 때에도, 직후 한 아이가 경찰의 말발굽에 채이고 이에 항의하는 군중을 향해 경찰이 쏜 총탄에 6명이 숨져간 순간에도 동백은 꽃을 준비했을 터이다.

꽃을 피어낸 다음 동백은 뭉텅이 째로 버려냈을 터이다. 그래서 동백은 무심했을까.

동백은 겨울이 지나고 봄이 다가오는 사이 꽃을 피어내며 계절의 변화를 말해주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제주섬 사람들에게 동백이 전하는 계절의 변화는 전혀 변하지 않는 세월일 뿐이었다. 감춰둔, 차마 드러낼 수 없었던, 감추고 숨기기를 강요당했던 ‘끝나지 않은 세월’이었다.

그렇기에 동백은 오랜 세월 잔인했다. 혹독한 겨울 추위를 이겨내고 피어난 꽃의 모가지를 쳐내고서야 한 계절이 지나고 있음을 알리는 동백의 행위야말로 오래 전 벌어졌던 참혹한 학살의 잔인한 상징이 되고 말았다. 목숨을 목숨으로 여기지 못한 채 무참하고 무고하게 불에 태워지고, 총탄에 스러지고, 한 줌의 동정도 받지 못한 채 몽둥이질을 당해야 했던 세월을, 동백은 무심하고 잔인하게 바라보며 자신의 꽃 모가지를 쳐내 버렸다.

그럼에도 그 잔인하고 비극적으로 떨어진 꽃의 모가지를 되밟지 않으면 계절의 변화는 사람의 것이 되지 못한다.

영화 ‘지슬 - 끝나지 않은 세월2’의 한 장면. 사진제공|영화사 진진


● 신묘(神廟)…영혼이 머무는 곳

붉고 노란 꽃의 계절, 수많은 이들이 제주섬을 찾을 것이다. 제주국제공항으로부터 출발한 관광의 대열은 표선과 애월과 한림과 남원과 성상과 중문과 대정과 안덕 등 곳곳의 볼거리를 누빌 것이다.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에서는 노란 유채의 정취를 축제의 이름으로 즐길 것이다. “높이 23m, 너비 8m, 깊이 5m”로 “햇빛이 비쳐 은하수 빛깔로 변하는” 물빛으로 “수묵화”의 느낌(이상 제주도 공식 관광정보 포털 ‘비짓제주’)을 주는 서귀포 정방폭포에서 물줄기의 청량함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천연기념물 429호로, ‘손바닥 선인장’으로 불리는 백년초 군락이 자리한 제주시 한림읍 월령리에도 사람의 왕래가 잦을 것이다. 올레길 곳곳에서 번잡한 일상을 치유하고 위안할 것이다.

치유와 위안은 그러나 억울한 죽임을 당한 이들의 것은 여전히 되지 못하고 있다.

숱한 관광객을 오르내리게 하는 매끈한 활주로를 둔 제주국제공항에서는 2007년 여름부터 2년 동안 모두 380여구의 유해가 발굴됐다. 월령리는 군경 토벌대의 총탄에 턱을 잃어 한평생 무명천으로 얼굴 하관을 두르고 살다 2004년 9월 세상을 떠난 ‘무명천 할머니’ 고 진아영 할머니와 마을 사람들의 아픔이 가시지 않은 곳이다. 유채꽃 만발한 가시리에선 3·1절 이듬해 음력 10월 보름(11월15일)에 30여명의 마을 주민들이 무참히 그리고 무고하게 살해당했다. 무참한 학살은 올레길 곳곳의 땅에서도 자행됐다.


● 소지(燒紙)…신위를 태우며 드리는 염원

억울한 죽음과 무참한 피살은 1947년 3·1절로부터 전쟁이 끝난 뒤인 1954년 9월21일까지 7년 7개월 동안 이어졌다. 죽임의 수는 당시 제주 인구의 10%에 해당하는 3만여명으로 추산된다.

무자비함은 1948년 5·10 남한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소수의 무장대가 그해 4월3일 봉기한 이후부터 더해졌다. 이승만 정부는 10월 제주도의 해안선 5km 이상 내륙지역 통행자를 폭도로 간주하는 포고령을 내린 데 이어 11월 계엄령을 선포했다. 무장대를 차단하기 위해 중산간 마을 주민들을 해안마을로 소개했다. 군경 토벌대는 마을을 불태웠고, 무고한 젊은 남자들은 폭도와 무장대로 의심받으며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처형당했다. 젊은 남자들이 산으로 도망치고, 남은 부녀자들은 ‘도피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희생됐다. 전쟁의 와중에도 인민군을 도울 우려가 있다는 명분으로 많은 이들이 ‘예비검속’돼 살해되기도 했다.

영화 ‘지슬 - 끝나지 않은 세월2’의 한 장면. 사진제공|영화사 진진


안덕면 동광리 마을 사람들은 난리를 피하기 위해 ‘큰넓궤’(큰 동굴)로 숨어들었다. 컴컴한 굴 속에서 이들은 미처 함께 도망치지 못한 가족과 키우던 발정난 돼지를 걱정했다. 장가 못한 총각의 앞날을 농담으로 걱정하며 이웃의 정감어리고 순박한 웃음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난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몇몇 남정네는 큰넓궤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나마 식량으로 가져온 말린 고추를 태우며 그 숨 막힐 듯 매캐한 연기로 토벌대의 접근을 애써 막으려 했다. 헛일이었다. 아이를 낳아야 할 때를 맞은 생이 엄마도 부른 배 때문에 굴에서 끝내 빠져나오지 못했다. ‘낮은 포복’으로서야 간신히 기어 나올 수 있는 굴의 입구에서 아이는 엄마를 놔주지 않았다. 굴에서 빠져 나온 생이 아빠와 사람들은 정방폭포로 끌려가 총을 맞았다. “잿빛 바다 위로 흐린 하늘이 담요처럼 칙칙하게 걸려 있던 그날, 폭포 맨 꼭대기의 풀밭으로 한꺼번에 끌려나와 세워진 백여명의 사람들. 젊은이부터 노인까지, 남자와 여자들, 그리고 열 살도 안 된 아이들”(소설 ‘백년여관’, 임철우)이었다.

“제주도는 지옥이었고 지옥이 바로 그 섬이었다”는 임철우는 “이십육만여명의 섬 주민들은 한날한시, 그 지옥 속으로 한 사람도 빠짐없이 초대되었다”(위 소설)고 썼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가 6만5000여명의 병력을 앞세워 군사기지화하고, 제주국제공항 자리에 ‘정뜨르 비행장’을 세우면서 친일경찰을 키워냈던 곳. 그 경찰이 “일본기 히노마루 붉은 원의 반쪽에다 검은 먹칠 바르고 네 귀엔 윷짝을 그려 넣어 만든 헐어빠진 기”(소설 ‘도령마루의 까마귀’, 현기영)를 든 토벌대가 됐던 곳, “육지 중앙정부가 돌보지 않던 머나먼 벽지, 귀양을 떠난 적객들이 수륙 이천리를 가며 천신만고 끝에 도착하던 유배지, 목민(牧民)에는 뜻이 전혀 없고 오로지 국마(國馬)를 살찌우는 목마에만 신경 썼던 역대 육지 목사(牧使)들, 가뭄이 들어 목장의 초지가 마르면 지체 없이 말을 보리밭으로 몰아 백성의 일년 양식을 먹어치우게 하던”…“천더기의 땅, 저주받은 땅, 천형의 땅”.(소설 ‘해룡 이야기’, 현기영) 어쩌면 제주섬이 지나온 오랜 세월의 비극성이야말로 “지옥이었고, 결국 지옥이 바로 그 섬”이 되어 버린 무참하고 무고한 죽음의 근원이 아닐까.

많은 제주섬의 마을에서, 숱한 이들이 “한날한시”에 제사를 지낼 것이다. 그들이 신위를 태우며 빌 염원을, 70년이 지난 지금에도 구천을 떠돌며 떠나가지 못하고 있을 수많은 영혼은 들을 수 있을까.

윤여수 기자 tadada@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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