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건의 아날로그 스포츠] 세살 버릇 여든까지…이치로의 롱런 비결

입력 2018-04-06 05: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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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열정으로 똘똘 뭉친 이치로는 다양한 루틴으로도 유명하다. 경기 당일 아침은 항상 같은 메뉴를 먹고, 경기시작 5시간 전에 경기장에 도착해 같은 방식으로 스트레칭을 하고, 타석에 들어갈 때도 일관된 패턴을 유지하고, 덕아웃에서는 나무막대기로 발을 문지르고, TV를 볼 때는 시력보호를 위해 선글라스를 끼는 루틴을 언제나 지킨다. 이치로의 많은 루틴은 어린시절 아버지와 함께 했던 훈련으로 만든 좋은 버릇이 몸에 밴 것이다. 이번 시즌 다시 시애틀로 돌아온 이치로가 루틴을 마치고 타석에 들어서고 있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 ML 최고령 타자를 만든 건 8할이 ‘루틴’이었다

45세불구 친정 시애틀서 현역선수
3살때 아버지에게 글러브 기름칠 배워
리틀야구팀에선 매일 반복훈련 습관
방과후 집 근처 배팅센터서 타격연습

초교때 키운 루틴, 타격기계로 진화
슬럼프때도 폼 유지…정신력도 한 몫
왜소한 체격조건 딛고 日·美 전설로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한다. 그만큼 습관이 중요하다. 스포츠도 마찬가지다. 루틴이 중요하다. 운동선수가 경기를 위해 꾸준하게 준비해야 하는 과정이 루틴이다. 영화 ‘킹스맨’에는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는 명대사가 나온다. 스포츠에 적용하면 ‘좋은 루틴이 좋은 선수를 만든다’로 바뀐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상징이 스즈키 이치로다. 45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현역으로 뛰면서 야구역사를 새로 쓰는 이치로가 보여주는 루틴은 여전하다. 빅리그 선수생활 동안 단 한 차례도 변하지 않고 어긴 적도 없다는 이치로의 루틴은 다양하다. 그 루틴은 어떻게 시작됐을까. 로버트 화이팅이 쓴 ‘The samurai way of baseball’을 보면 그 단초가 나온다.

스즈키 이치로.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 아버지의 선택과 아들과의 약속

고교시절 투수로 활동했던 스즈키 노부유키는 아들 이치로가 세 살 때 프로선수용 고급 글러브를 선물로 사줬다. 나고야 인근의 소도시 도요야마에서 조그만 공장에 다니는 그의 월급 절반이 넘는 고가의 제품이었다.

아내는 아이에게 주는 장난감으로는 과하다고 했다. 노부유키는 “장난감이 아니라 아들에게 사물의 가치를 알려주는 도구”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는 다음날부터 아들과 이 글러브를 가지고 캐치볼을 했다. 놀이가 끝나면 글러브를 기름칠하고 손질하도록 가르쳤다. 이 습관은 이치로가 선수시절 내내 야구장비를 다루는 루틴이 됐다.

일곱 살 때 리틀야구팀에 들어간 이치로는 아버지에게 “야구를 하는 방법을 알려 달라”고 했다. 노부유키는 “앞으로 매일 놀지 않고 훈련을 한다고 약속할 수 있겠냐”고 물었고, 약속을 받아냈다. 다음날부터 노부유키는 공장의 일이 끝나는 매일 오후 3시30분부터 아들과 함께 훈련했다. 가벼운 달리기로 시작해 캐치볼 50개, 피칭 200개, 토스 배팅, 내야와 외야에서의 각각 50개 펑고가 매일 반복되는 훈련 루틴이었다. 아버지는 오른손잡이인 아들에게 왼손으로 타격하도록 했다. 좋은 습관은 그때부터 만들어졌다.

스즈키 이치로.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 7년간 변하지 않은 루틴과 3시30분의 남자

훈련을 마치고 오후 7시에 집으로 돌아오면 두 사람은 저녁식사와 아들의 학교 숙제를 함께한 뒤 타격훈련장으로 갔다. 공항 근처의 ‘공항 배팅센터’라는 곳에서 아들은 피칭머신을 상대로 매일 250∼300개의 공을 때렸다. 비행기의 엄청난 소음 속에서 두 사람은 진지하게 타격훈련을 했다. 아버지는 주니치의 교타자 야스시 다오의 부드러운 스윙을 모델로 삼았다. 네트 뒤에서 지켜보며 강조한 것은 스트라이크존에 들어오는 공만 때리라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배팅센터가 문을 닫는 밤 11시까지 매일 훈련했다. 집으로 돌아오면 아들이 잠자기 전까지 발을 마사지해줬다. 아버지는 발에 모든 신경이 몰려있어 발이 건강해야 몸이 건강해진다고 믿었다. 이 습관은 지금도 이어져 이치로의 경기 도중 덕아웃 루틴 가운데 하나가 됐다.

훈련은 7년 동안 매일 반복됐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날씨가 춥건 덥건 관계없었다. 이 때문에 노부유키는 동네사람들로부터 오후 3시30분의 남자로 불렸다. 아들은 훈련을 좋아했다. 아버지가 피치 못할 약속으로 훈련을 쉬려고 하면 아들은 그라운드에 주저앉아 훈련을 요구했다. 노부유키는 “아들의 고집이 셌다. 이 때문에 가끔 화도 났지만 뭔가 특별한 아이라는 생각을 했다. 무엇보다 아들은 천부적 재질이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차츰 이치로는 야구재능을 드러냈다. 깡마르고 작은 체격 탓에 힘은 없었지만, 초등학교 6학년 때 고등학생 수준의 야구기술을 가졌다. 부자(父子)는 배팅훈련장에서의 타격훈련을 하루 4차례로 늘렸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시속 100km 정도 스피드의 피칭머신을 상대로 타격훈련을 시작해 6학년 때는 120km로 높였다. 이것으로도 성이 안차자 130km로 올렸다. 기계가 낼 수 있는 최고 스피드였다. 중학생 무렵 이 스피드를 압도하자, 타격훈련장 측은 두 사람을 위해 피칭머신을 타석 쪽으로 당겨줬다. 이렇게 해서 이치로는 일본프로야구 투수들의 최고 스피드에 몸과 눈을 적응시켰다.

당시 타격훈련장에서 공 25개를 때리는 비용이 1000원 정도였기에 만만치 않았지만, 아버지는 기꺼이 투자했다. 아버지는 아들의 배트 컨트롤을 향상시키려고 무시무시한 훈련도 했다. 마운드에서 직접 공을 던져주며 그라운드의 오른쪽, 왼쪽으로 공을 치라고 했다. 무방비 상태의 아버지를 맞히는 것은 피해야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이치로는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타구를 보내는 기술을 완성했다.

마이애미 시절 이치로.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 아버지는 아들의 시계추 타법과 강인한 멘탈을 완성시키다

골프를 좋아했던 아버지는 골프의 스윙이론을 야구에 응용했다. 완벽한 체중이동을 위해 고심한 끝에 탄생한 것이 시계추 타법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의 정신력도 강화시켰다. 노력과 근성, 인내와 조화를 강조했다. 리틀야구 시절부터 아들에게 “절대로 경기 결과나 멋진 플레이에 흥분하지도, 감정을 드러내지도 말라”고 가르쳤다. 이때부터 이치로는 홈런이나 끝내기안타를 쳐도 마치 남의 일인 듯 평소처럼 행동했다.

1985년 노부유키는 아들이 프로선수가 될 자질이 있다고 확신하자, 중학교 야구팀 감독에게 2가지를 당부했다. “아들을 데리고 무엇을 해도 좋지만 타격 폼은 절대로 손대지 말라. 또 아들이 아무리 야구를 잘해도 절대 칭찬하지 말라. 아들을 정신적으로 단련시키고 싶다”고 했다.

중학교 선수가 된 뒤에도 아버지의 생활패턴은 달라지지 않았다. 매일 오후 3시30분이면 직장을 마치고 학교 운동장 백스톱 뒤에서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지켜만 볼 뿐이었다. 아들이 그라운드에서 훈련하는 동안 아버지는 아들과의 공감을 위해 앉지도 않았다. 팀 훈련이 끝나면 아들을 차에 태워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고 숙제를 한 뒤 다시 배팅훈련장으로 가서 밤늦도록 타격훈련을 반복했다. 타격훈련 2시간 동안 여전히 서 있었고, 다시 집에 돌아오면 아들의 발을 마사지해준 뒤에야 잠에 들었다. 그의 이야기를 보면서 겹쳐진 얼굴이 있다. 바로 고(故) 최동원을 만든 부친 고(故) 최윤식 씨다.

스즈키 이치로.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 팀의 51번째 선수, 비주전의 설움을 훈련으로 이겨내다

이치로는 입이 짧았다. 유난히 채소를 싫어했다. 대신 비싼 고베 소고기와 참치 회를 좋아했다. 아버지는 아들의 체격을 불리기 위해 이치로가 매일 마시는 우유의 양만큼 고베 소고기와 참치를 사준다고 약속했고 이를 지켰다.

중학시절 팀의 주전 타자이자 투수로 활약한 이치로는 기량을 인정받아 야구명문 아이코다이 메이덴 고교에 51번째 선수로 입학했다. 고시엔대회 단골 출전학교였던 메이덴 고교는 1학년 때부터 합숙을 시켰다. 야구부는 매일 오후 3시30분부터 8시까지 그라운드에서 훈련하고 야간훈련도 따로 했다. 훈련은 50여명의 선수 가운데 17명만이 참가할 수 있었다. 나머지는 선배와 주전들의 훈련을 지켜볼 뿐 야구공을 만질 권리가 없었다. 야간훈련 때도 마찬가지. 주전들이 개인훈련을 하면 나머지 선수들은 숙소를 청소하고 유니폼을 세탁하는 일을 도맡았다. “이때가 야구선수로서 가장 힘들었다”는 이치로는 결국 새벽에 남몰래 숙소 주변의 테니스 코트에서 혼자 스윙훈련을 하고나서야 잠에 들었다.

3학년이 되자 이치로는 주전으로 뛰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훈련장을 찾았다. 자신의 신분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아 감독조차 그를 다른 팀의 스파이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이치로는 고교시절 엄청난 기록을 냈다. 통산 타율은 무려 0.502였고, 19홈런 211타점을 기록했다. 131도루에 삼진은 536타석에서 고작 19개였다. 그가 휘두른 배트에 공이 맞은 비율은 무려 97%였다.

이치로는 면도날 선구안과 유연한 스윙, 침착한 성격 덕분에 동료들로부터 ‘우주인’이라는 별명을 들었다. 냉정하고 침착한 이치로의 성격을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어느 대학교가 고시엔대회에 출전하는 선수들을 대상으로 2년간 긴장상태에서의 능력을 발휘하는 유연성 심리테스트를 했다. 대부분의 선수가 60점대 점수를 받았지만, 이치로는 유일하게 무려 91점을 받았다. 1990년 여름 고시엔대회에서 팀이 중도에 탈락했을 때도 모든 선수들이 눈물을 흘렸지만 이치로만은 예외였다.

지난 2004년 조지 시슬러의 단일 시즌 최다 안타(257 안타)기록을 넘어선 뒤 팬들의 환호에 답례하는 이치로.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 고집으로 루틴을 지킨 이치로, 마침내 신화를 만들다

1991년 일본프로야구 신인드래프트에서 이치로는 오릭스의 마지막 순번인 4번째 선수, 퍼시픽리그의 36번째 선수로 입단했다. 왜소한 체격 탓에 많은 스카우트들은 그의 능력을 확신하지 못했다. 계약금은 초등학교 6학년 때 이치로가 일기에 썼던 목표 1억엔이 아니라 430만엔이었다.

입단 당시 오릭스 감독은 도이 쇼죠였다. 요미우리 시절 오 사다하루와 함께 전설의 9연속 우승 신화를 썼던 2루수 출신이다. 이치로는 입단 첫해 2군 58경기에서 0.366의 고타율을 기록했고, 1군에서도 40경기에 출전해 0.253을 기록했지만 다음 시즌에도 출발은 2군이었다. 도이는 이치로의 특이한 타격 폼을 싫어했다. “그런 자세로는 성공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럴수록 이치로는 훈련에 매달렸다. 누구보다 오래 그라운드에 남아 훈련했고 타격의 완성도를 높이려고 땀을 흘렸다. 겨울에는 구단의 허락을 받아 하와이에서 벌어지는 루키리그에도 참가했다. 이치로도 한때는 감독의 눈에 들기 위해 타격 폼을 바꾸기도 했다. 결과는 실망이었다. 43경기에서 고작 0.188의 한심한 타율을 기록했다. 결국 ‘타격자세를 바꿀 바에는 차라리 내 폼을 유지하면서 2군에 있는 것이 낫겠다’고 결정했다.

“고교시절부터 해온 폼이다. 이를 수정할 바에는 2군에 있겠다”는 이치로의 말에 도이는 “그럼 네 마음대로 하라”면서 2군으로 돌려보냈다. 1994년 기회가 왔다. 도이가 부진한 팀 성적으로 물러났다. 새 감독으로 오기 아키라가 왔다. 오기는 도이와는 정반대 스타일이었다. 선수들의 통금시간을 없애버렸다. 다음날 훈련에서 열심히만 한다면 무엇을 하건 상관하지 않았다. “열심히 마시고 그라운드에서는 열심히 훈련하자”가 그의 모토였다.

오기의 열린 마음과 눈에는 이치로의 독특한 타격폼이 문제되지 않았다. 왜 저런 선수를 아직 쓰지 않았냐고 했다. 감독 오기의 첫 번째 선택은 이치로를 주전 1번타자로 기용한 것이었다. 그는 이치로에게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모든 야구팬이 아는 이치로의 전설이 탄생했다.

김종건 전문기자 marc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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