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수의 라스트 씬①] ‘꿀처럼 달콤하게’ 재회한 사랑 ‘첨밀밀’…볼 때마다 설레죠

입력 2018-05-15 06: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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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첨밀밀’ 속에서 ‘홍콩 드림’과 ‘아메리칸 드림’을 상징하는 다양한 소품과 설정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중국 본토 출신 젊은이들의 혼돈을 말해준다. 사진제공|골든 하베스트

■ 영화 ‘첨밀밀’

‘첨밀밀’ 가수 덩리쥔 매개로 인연
‘홍콩드림’ 꿈꾸다 사랑하고 이별
10년 세월 돌고 돌아 뉴욕서 재회
환한 미소로 엔딩 ‘최고의 명장면’


1995년 5월8일 미국 뉴욕의 맨해튼 거리. 중국인 중고 전파상의 쇼윈도 속 TV는 한 여가수의 부음을 전하고 있었다. 창밖에서 이를 유심히 바라보는 두 남녀. ‘꿀처럼 달콤한’(甛蜜蜜·첨밀밀)이라는 의미의 제목을 지닌 여가수의 노래가 흐른다. 노래는 서로에 대한 사랑을 잊지 못한 채 10년의 세월을 돌고 돌아 다시 만난 두 사람의 얼굴에 깊은 회한을 새겨 놓는다.

그날, TV뉴스는 이렇게 말했다. “중국의 유명한 팝송 여왕 테레사 덩이 천식과의 고투 끝에 오늘 태국 파타야의 호텔 객실에서 숨을 거두었다. 테레사는 산둥 지방 출신으로, 1953년 군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대만에서 가장 인기 있는 팝가수가 되었다. 무대를 위해 항상 대만과 홍콩, 동남아시아를 오갔다. 달콤하고 여성스러운 목소리는 팬들을 매료시켰다. 전성기는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까지였다. 그의 노래는 중국 본토를 폭풍처럼 쓸고 지나갔다. 경이로운 현상이었다. 대도시든 소도시든 언제 어디서나 그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천언만어(千言萬語)’, ‘월량대표아적심(月亮代表我的心)’, ‘재견, 아적애인(再見, 我的愛人)’ 같은 곡은 크게 히트를 쳤다.”

영화 ‘첨밀밀’의 한 장면. 사진제공|골든 하베스트


● ‘꿀처럼 달콤한’ 노래의 힘

테레사 덩, 대만 출신의 덩리쥔(등려군·鄧麗君)은 뉴욕의 두 남녀, 이소군과 이교에게 큰 위안으로 다가온 가수였다. 물론 그들에게만은 아니었다. “중국인이 있는 곳에선 어디든 그녀의 노래가 울려 퍼진다는 말이 있었다. 중국인 수십억명의 마음을 얻은 가수는 그녀뿐일 것이다”고 TV뉴스는 말했다. 왜일까.

노래 ‘월량대표아적심’의 제목을 부제 삼은 덩리쥔의 평전 ‘등려군: 달빛이 내 마음을 대신하죠’(이하 인용)에서 저자 장제는 “중국에서 건너온 국민당 군대의 노병과 그 가족 그리고 그들의 후손”을 그의 첫 번째 팬으로 꼽았다. 이들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 정신적인 아픔과 생활 속의 괴로움 등”을 덩리쥔의 노래를 통해 “파도가 가라앉듯 위로를 받게 된다”고 장제는 썼다. 이는 “일본 점령기의 타이완 원주민 가요”가 지닌 “비참한 슬픔의 느낌”을 덩리쥔이 “부드러운 위로의 색채”로 채색한 힘이기도 했다.

또 다른 팬, “순수한 사랑을 동경하는 젊은이”들이었다. “막 사랑에 눈뜨고 성적 욕망에 자유로운 풍조 속에서 개방적이며 용감하게 애정을 표현하는 가치관”과 “진정한 사랑을 바라는 마음”을 지닌 이들은 “유미주의 영화의 바람”을 타고 그 많은 삽입곡을 부른 덩리쥔의 노래에 빠져들었다.

그처럼 덩리쥔은 이소군과 이교를 연결해주는 중요한 매개가 되었다. 두 사람은 1987년 설 전야에 덩리쥔의 노래를 담은 테이프를 함께 팔았다. 찬비 내리는 거리에서 가난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으로 덩리쥔을 앞세웠다. 이들에게 덩리쥔은 이미 고향 땅, 중국에서부터 친숙하고 또 정다웠던 존재였다.

대만을 넘어 홍콩과 동남아시아, 일본에서 수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린 덩리쥔은 그러나 중국에서는 ‘금지’당했다. 중국 당국이 “퇴폐적이며 가사의 남녀상열지사가 심각한 정신적 요염을 야기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화대혁명의 정신적 긴장”에서 이제 막 벗어난 중국인들은 “사랑에 대한 갈망과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를 대변”한 덩리쥔의 선율로 “오랜 시간 억눌린 감정을 해방시켰다”. 덩리쥔은 “권력으로 짓누를 수 없는 것”이었다. 그의 노래는 끊임없이 퍼져나갔다.

이소군과 이교는 어쩌면 홍콩의 밤거리에서 테이프를 파는 것으로 덩리쥔을 추억하려 했을 것이다.

영화 ‘첨밀밀’의 한 장면. 사진제공|골든 하베스트


● 가난과 외로움…덩리쥔의 위로

그날 밤, 이소군과 이교는 격정적인 사랑을 나누었다. 홍콩의 젊음은 이미 알란 탐 등 새로운 기운을 원하고 있었지만, 그래서 이소군과 이교는 덩리쥔의 노래를 팔기 위해 모아두었던 투자금을 모두 날려 버리고 말았지만, 낯선 땅에서 느껴야만 했던 지독한 외로움과 자본주의 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자신들의 힘겨움을 서로 위로했고 서로 위안받았다.

앞서 1986년 3월1일 이소군과 이교는 제각각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중국 텐진과 광저우에서 홍콩으로 건너와 카오룽역에 당도했다. 이소군은 생닭을 배달하며, 이교는 맥도날드의 점원과 영어학원 청소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벌고자 했다.

홍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광둥어와 영어를 배워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중국 본토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도 홍콩인들에게 천대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니, 아직은 가난했던 중국인으로서 삶을 내보이고 싶지 않았으리라.

“가사를 외우긴 해?” “광둥어 알아들을 수 있나?”

1970년대 초반, 일부 술에 취한 홍콩의 관객은 덩리쥔을 그렇게 조롱했다. 그는 이에 당당함으로 맞서며 자신의 무대를 채워 박수를 이끌어냈다. 덩리쥔은 그리 넉넉하지 않은 집안 살림 속에서 자라났다. 그의 어머니는 콜라 한 병을 마시고 싶다는 어린 딸의 바람을 외면하고는 괴로움에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그렇게 자라나며 덩리쥔은 6살 때 처음 무대에 나섰다. 그 후로 오로지 노래와 음악만을 생각했다. 딸이 벌어온 돈을 아버지는 함부로 쓰지 않았고, 나름 엄격한 원칙으로 자식들을 키워냈다.

영화 ‘첨밀밀’의 한 장면. 사진제공|골든 하베스트


언론을 비롯한 세상은 이를 비뚤어진 시선으로 바라보았지만 덩리쥔은 자신의 갈 길을 헤매지 않았다. 몇 차례 연애 스캔들이 괴롭히기도 했다. 실제 청룽(성룡) 등 몇몇 남자들과 연애의 감정을 느끼기도 했고, 한때 결혼을 약속한 남자도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오로지 무대와 노래만이 전부였다고 위 평전은 쓰고 있다.

그렇게 노래하는 덩리쥔을 이소군과 이교는 잊지 않았다. ‘홍콩 드림’을 이루기 위해 팍팍한 현실 속으로 뛰어든 채 다가올 운명을 미처 예감하지 못했던 두 남녀. 기어이 덩리쥔의 부음 앞에서야 서로를 향해 환하게 짓는 미소. 덩리쥔은 세상을 떠나면서 아련한 추억을 간직한 세상의 수많은 이들에게 그렇게 또 다른 위안의 손길을 건네주었다.

그를 떠나보낸 사람들은 그래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아름다운 꽃은 영원히 피어 있지 못하고 / 멋진 경치도 영원히 머물러 있지 못하네 / … / 오늘 밤 떠난 뒤에 / 그대 언제 돌아오실까.’(노래 ‘何日君再來’·하일군재래)

윤여수 기자 tadada@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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