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건의 아날로그 스포츠] 심판의 시그널은 어떻게 태어났나?

입력 2018-07-24 05:30:00
카카오톡 공유하기
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야구 심판은 판정을 내릴 때 소리도 지르지만 수신호를 통해 자신의 결정을 확실하게 알린다. 야구 초창기 심판 판정의 시작은 소리였지만 이후 동작으로 중심이 옮겨갔다. 사진은 KBO리그 이용혁 심판이 박력 넘치는 동작으로 스트라이크 아웃을 선언하고 있는 모습. 스포츠동아DB

최초의 심판판정 기준은 목소리
관중 많아지고 소음으로 심판 목소리 들리지 않자 자연스럽게 동작으로
콜 대신 동작으로 판정한 최초의 심판은 누구?
심판의 수신호 도입을 거부했던 초창기 심판들, 그 이유는?


그럴 리가 없겠지만 만일 심판이 콜과 동작을 달리했다면 어떤 것이 진짜 판정일까? 정답은 동작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된다. 심판의 동작은 멀리 스탠드에서도 보이지만, 콜은 들리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심판 판정의 기준은 콜이 아니라 동작이다. 하지만 초창기 심판 판정의 기준은 소리였다.


● 1870년 심판 판정에 시그널이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한 선지자

심판은 언제부터 볼, 스트라이크, 아웃, 세이프 판정에 지금과 같은 동작을 했을까? 야구팬들이 궁금해 할 스토리의 시작은 187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3월 27일 ‘뉴욕 선데이 머큐리’에는 신시내티 레드스타킹스 감독 해리 라이트의 기고문이 실렸다. 그는 “관중이 많이 모이는 큰 경기 때는 심판이 주자가 아웃일 경우 팔을 들어서 신호를 해줬으면 좋겠다. 관중들이 너무 많으면 시끄러운데다, 멋진 플레이가 나오면 심판의 목소리가 관중들의 큰 함성에 파묻힌다. 주자가 아웃인지 세이프인지 소리를 듣고 아는데, 시간도 걸려 문제를 만들 여지도 있다. 그래서 동작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몇 년 뒤 라이트의 혁신적 아이디어는 청각장애인 심판에게 도움이 됐다.

1883년부터 2년간 메이저리그에서 투수로 활약했던 에드 듄던은 1886년 심판이 됐다. 10월 20일 애시드 아이언 어스-모빌스 경기에 심판으로 나섰는데, 처음으로 손가락을 이용해 볼 스트라이크 판정을 했다. 그가 오른손가락을 들면 스트라이크, 왼손가락을 들면 볼이었다. 고개를 흔들면 세이프, 손을 흔들면 아웃이었다. 심판이 목소리를 대신해 몸동작으로 판정을 내린 최초사례다.


● 미국-스페인 전쟁 때 탄생했다는 심판 시그널 설화

심판이 언제부터 다양한 몸동작을 했는지를 놓고 많은 설이 등장한다.

최근 가장 그럴싸한 사실로 인정받는 스토리는 1890년대 후반 미국과 스페인의 전쟁 때 탄생했다는 것이다. 앤드류 세리단 버트 장군이 주인공이다. 그는 남북전쟁 때 자신이 지휘하는 부대마다 야구를 열정적으로 장려했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미스터 군대야구’였다. 그가 미국-스페인 전쟁을 앞두고 사기진작 차원에서 1898년 조지아주의 치카마우가 경기장에서 부대 대항 야구경기를 열었는데, 아들이 심판을 보면서 처음 수신호를 사용했다. 라이벌 부대 간의 경기 도중 두 팀 병사들의 열기가 과열되자 심판이 소요사태를 막고자 몸동작을 이용해 판정을 내렸다는 내용의 편지가 발견된 것이다.

후손들이 자료를 정리하다 그 편지를 발견해 명예의 전당 사무실로 보냈다.

이 편지에는 버트 장군 이전의 심판들이 그라운드에 있는 돌을 이용해 볼카운트를 체크했다는 내용도 있다. 전광판도 없고 볼, 스트라이크를 세는 기구도 없던 당시에 심판들이 주로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심판들은 스트라이크일 경우 오른손에 조약돌을 하나 들고, 볼이면 왼손에 조약돌을 들어서 볼카운트를 확인했는데 이날 심판이 손을 높이 치켜들고 스트라이크 사인을 내는 바람에 손에 든 조약돌이 떨어졌다는 내용이었다.

퇴역한 버트 장군은 나중에 청각장애가 생겼다. 이후 좋아하는 야구를 보러갔는데, 심판의 볼 스트라이크 판정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자 아메리칸리그 벤 존슨 회장에게 편지를 보냈다. 군 시절 자신이 사용했던 수신호를 심판들이 사용하게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이 편지를 받은 존슨은 “심판이 팔을 들면 스트라이크로 하고, 그렇지 않으면 볼로 하는 것으로 아이디어를 수정해 리그 심판들이 실행하라”고 지시했다는 스토리가 전해진다.

심판이 지금처럼 모든 야구팬이 아는 통일된 동작을 가지게 된 것은 1951년 빌 맥거원의 심판교과서를 통해 동작을 통일한 덕분이다. 사진은 5월22일 잠실 NC-LG전 도중 문승훈 심판(오른쪽)이 두 팔을 높이 치켜들어 파울을 선언하고 있는 모습. 왼쪽은 NC 3루수 박석민. 스포츠동아DB


● 심판의 수신호를 초창기 심판들은 거부했다?

심판의 수신호 탄생설화는 이밖에도 다양하다. 조지 W 행콕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도 있다. 그는 시카고에서 실내야구를 만들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이때 그가 낸 아이디어 가운데 하나가 다른 색깔의 토시를 이용한 판정이었다. 심판이 두 팔에 다른 색깔의 토시를 걸치고 볼 스트라이크 판정 때 팔을 치켜들어 관중들이 이를 쉽게 알아보게 만드는 것이었다. 당시 오른쪽의 붉은색 토시는 스트라이크, 왼쪽의 흰색 토시는 볼이었다.

심판의 수신호과 관련해 대중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스토리는 1888년부터 1902년까지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했던 청각장애선수 윌리엄 호이를 위한 것이라는 얘기다. 1988년 뉴욕 브로드웨이의 뮤지컬로도 만들어져 더욱 대중적 스토리가 됐다. 물론 이를 확인해줄 확실한 증거는 없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명 심판 빌 클렘은 페어, 파울과 스트라이크 판정에 팔 동작을 도입한 최초의 심판이라는 타이틀을 영원히 가지고 있다. 그는 1952년 인터뷰에서 “관중과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아서 이 동작을 고안해냈다”고 털어놓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심판의 수신호는 혁신적 생각이었지만, 당시 활약하던 대다수 심판들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이들은 소리를 지르는 대신 몸동작을 하는 것이 심판의 체신과 권위를 깎아먹는 행동이라면서 쉽사리 받아들이지 않았다. 심판들은 1907년에 들어서야 수신호를 받아들였다. 1951년 빌 맥거원의 심판교과서를 통해 비로소 모든 심판의 몸동작이 통일됐다.

김종건 기자 marc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뉴스스탠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