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수의 라스트 씬] 봄동 된장국 한 그릇에 청춘의 상처는 아물고…

입력 2018-08-27 06: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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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갓진 고향의 여름 무더위를 선풍기의 잔잔한 바람으로 이겨내는 와중에 콩국수의 진한 맛은 더없는 청량감을 준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한 장면. 사진제공|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 영화 ‘리틀 포레스트’

헬조선·N포세대로 대변되는 청춘들
배고파서 고향으로 내려왔다는 혜원
그를 달래준 건 한 끼 식사 치유의 힘


기상청에 따르면 제19회 태풍 솔릭은 25일 새벽 3시 독도 북북동쪽 약 480km 부근 해상을 통과하며 온대저기압으로 변질돼 생명을 다했다. 16일 오전 괌 주변 해상에서 발생한 뒤 올해 처음으로 한반도를 관통한 솔릭은 당초 2010년 큰 피해를 안겼던 제7호 태풍 곤파스의 위력을 예상케 했다.

솔릭은 제주 등 일부 남부지방에 인명 등 안타까운 상처를 남겼지만, 당초 우려했던 재해의 상황만큼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태풍이 지난 뒤 폭염도 한층 수그러들 모양이다. 그러잖아도 올해는 111년 만에 최악의 폭염을 몰고 왔다. 폭염의 피해도 온열질환 관련 집계가 시작된 2012년 이후 최악이었다면서 이달 12일자 한겨레는 “9일까지 질병관리본부가 접수한 온열질환 사망자는 45명이며, 온열질환으로 응급실을 찾은 환자도 3644명이었다”고 썼다.

때문에 올해 폭염은 ‘사회적 재난’이다. 노인을 비롯한 저소득층 등 취약계층의 피해가 컸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미국 사회학자 에릭 클라이넨버그는 ‘폭염사회’에서 1995년 여름 섭씨 40도가 넘는 폭염 속에서 700여명이 숨진 시카고의 상황을 전하며 “노인, 빈곤층, 고립된 이 등 대개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 폭염의 희생자였다고 밝혔다. “주로 저소득층이 많은 의료급여 1·2종 수급권자 가운데 온열환자가 많고, 홀몸노인이 많거나 고령인구 비중이 높은 지역에서 온열질환자가 많이 발생했다”(8월6일자 한겨레)는 우리 상황과도 다르지 않다. 에릭 클라이넨버그는 “부분적으로 새롭게 나타난 고립과 민영화, 극단적인 사회적·경제적 불평등, 현대도시 여기저기에 퍼져 있는 부와 가난이 집중된 구역 등이 취약한 주민에게 사계절 내내 위험을 초래”한다고 봤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한 장면. 사진제공|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 컵밥의 팍팍함…양극화한 짬뽕값

그 같은 위험에 노출된 또 다른 ‘취약계층’ 가운데 이 시대 청춘이 있다고 말하면 지나친 억측일까. ‘N포세대’ ‘헬조선’ ‘금수저와 흙수저’ 등 신조어가 대변하는 청춘의 현실을 실업률 등 경제적 수치로 표현하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 보인다. 부모의 능력 여부에 따라 이미 다양한 사회적 기회가 정해지면서 ‘계층이동 사다리’를 잃은 수많은 청춘은 노점의 천막 아래서 컵밥 속 팍팍한 밥을 목 안으로 욱여넣을 뿐이다.

김유진 푸드칼럼니스트는 ‘공시생’들의 바빠 보이는 발걸음이 수두룩한 서울 노량진의 거리에서 컵밥의 서글픔을 봤다. 그는 “새하얀 스티로폼 그릇에 밥을 담고 햄, 소시지, 볶은 김치에 프라이” 혹은 “제육을 올리기도 하고, 마요네즈에 버무린 김치를 담아주는” 컵밥을 들고 “모두 고개를 숙인 채 밥만 쳐다보다가 아주 가끔 고개를 돌려 밖을 응시한다. 식사가 이어지는 내내 단 한 명도 웃지 않”는 청춘을 보았다. “어깨에 메고 있는 무거운 가방 탓이었는지도 모르겠다”지만, 실상은 “불확실한 미래”(이상 2017년 6월25일자 시사저널) 때문일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만큼 이 시대 청춘의 허기는 쉽게 달래지는 것이 아닐지 모른다. 비어버린 속을 빠른 시간 안에 채워줄 청춘의 값싼 한 끼 식사는 그래서 또 다시 서글퍼진다.

3000원과 8000원의 각기 다른 가격의 짬뽕 한 그릇을 앞에 놓고, 작가 김훈은 ‘라면을 끓이며’에서 이렇게 말했다.

“짬뽕 값의 양극화는 시장의 자유로운 질서이며 보이지 않는 손의 조화라고, 다들 알고 있다. 그렇게 말하게끔 되어 있다. 강제로, 채찍을 휘두르지 않아도, 보이지 않는 손의 인도를 받아서, 없는 자들은 스스로 3500원짜리 짬뽕을 먹고, 아직도 견딜 만한 자들은 8000원짜리를 먹게 된다. 음식을 파는 쪽에서도 값을 올리고 또 내려서 양극화된 격차 안에 양쪽 모두를 편안하게 수용함으로써 시장의 질서는 자유롭고 조화롭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한 장면. 사진제공|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 한 끼 한 끼가 소중한 까닭은

모든 이의 한 끼 식사는 그래서 더욱 현실적인 의미를 지닐 터이다. 임용고시에서 탈락한 혜원이 고향을 찾아 내려온 뒤 끓여먹는 봄동 된장국은 바로 그것을 말해준다.

혜원은 아르바이트로 등록금을 마련해야 했던 대학 시절을 지나 고시 준비 등으로 고단했던 도시의 번잡함에서 쫓겨나듯 밀려나 고향집에 내려왔다. 그리고는 된장국을 끓였다. 꽁꽁 얼어붙은 텃밭에서 캐낸 봄동의 밑뿌리를 잘라낸 뒤 된장을 풀어놓은 국물에 넣고 그 위에 고추를 어슷하게 썰어 넣으면 그만인 국 한 숟가락으로 배고픔을 달랬다.

“왜 내려왔냐”는 친구의 질문에 “배고파서”라고 답한 혜원의 말은 거짓도, 엄살도 아니었다. 이를 지켜보는 이들에게 그대로 전해지는 한 그릇의 된장국은 고단하고 추운 현실을 녹여낼 만한 따스함과 구수함을 품고 있었다.

엄마는 이미 자신의 새로운 인생을 찾아 나섰고, 잠시 머물고자 했던 고향집은 어느새 혜원의 또 달리 새로운 터전이 될 모양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변화하는 1년의 계절을 온전히 함께하며 고향 마을의 너르고 아름다운 들길을 자전거로 누비는 그의 얼굴에는 비로소 생기가 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한 장면. 사진제공|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그에게 생기를 되찾아준 것도 한 끼 한 끼의 식사였다. 엄마와 나눈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크렘 브륄레와 시루떡, 떡볶이, 파스타, 콩국수 등이 그것이다.

그 속에는 한 잎 한 잎 떨어내 밀가루 옷을 입혀 기름에 지져내는 배추전도 있다. 부침옷은 살짝살짝 지져낸 만큼 바삭거리고, 배추의 잎은 따스하게 사각거리며 입맛을 다시게 한다. 혜원이 사계절의 변화처럼 자신을 익혀가며 튀기고, 버무리고, 지지고, 끓이고, 삭혀낸 먹을거리 가운데 배추전은 단연 일품처럼 보였다. 혜원의 친구라면 그가 손수 걸러낸 막걸리에 이 배추전 한 잎 오물거릴 수 있는 맛깔스러움을 맛볼 수 있을 텐데.

그 상상의 바람은 혜원이, 또 수많은 청춘이 한 끼 식사의 따스함을 맛보며 스스로를 찾아나가기를 고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서글플지언정, 가장 현실적인 세상살이의 중요한 방편으로 한 끼 식사가 여전히 소중한 까닭이다. TV를 켜면 이 채널 저 채널 사이로 넘쳐나는 이른바 ‘먹방’이 결코 먹음직스럽게 보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산에 진달래가 필 텐데 말예요. 그 꽃 따 화전을 만들어 당신께 드리고 싶어요. 당신께 드리고 싶어요, 당신께 드리고 싶어요. 당신께, 당신께, 싶어요, 싶어요, 싶어요, 싶어요.”

신분과 계급을 결코 뛰어넘어서는 안 되는 세상에 그 경계를 벗어나 비극적인 사랑에 빠져든 여인은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주인공 최서희의 어머니 별당아씨였다. 별당아씨는 자신의 집에 스며든 환이와 도망간 지리산의 골짜기에서 숨을 거두며 화전(花煎)을 떠올렸다. 위험한 세상에 홀로 남겨질 사랑하는 이를 위해 여인은 왜 봄꽃으로 피어난 진달래의 붉은 빛으로 부침을 만들어 먹이고 싶었던 것일까.

작가 권여선은 음식 산문집 ‘오늘 뭐 먹지?’에서 바로 그 화전을 “연인이 보내온 엽서처럼 오래도록 보존해야 하는 이미지”라고 말했다. 모름지기, 음식이란 그런 것이리라.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한 장면. 사진제공|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2017년 1월 개봉해 관객의 지지를 얻은 임순례 감독의 연출작. 동명의 일본만화를 원작 삼아 고단한 현실에 놓인 청춘이 음식을 매개로 관계를 이어가며 치유와 위안의 손짓을 서로에게 내민다. 김태리와 류준열, 진기주가 주연해 아름다운 사계절 풍광의 변화를 고스란히 담아내는 한편 극중 혜원 역의 김태리가 빚어내는 다양한 요리와 음식이 맛깔스러움을 더한다.

윤여수 전문기자 tadada@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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