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수의 라스트 씬] ‘가짜 왕’에 투영된 민심

입력 2018-10-08 06: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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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진짜 임금이고, 누가 가짜인가.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는 백성을 섬기는 진짜 군주에 관한 질문을 가짜 임금의 이야기를 통해 풀어냈다. 사진은 영화의 한 장면.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가짜 왕 눈에 비친 조선의 현실정치
현시대 기득권 끝없는 욕심과 닮아
백성을 섬기는 왕, 이상에 불과할까?


“서울 문밖에서 몇 십리만 떨어져도 태고처럼 원시사회가 되어 있는데 하물며 멀고먼 시골이랴?…(중략). 오직 서울의 십리 안만이 가히 살 수 있다. 만약 집안의 힘이 쇠락하여 서울 한복판으로 깊이 들어갈 수 없다면 잠시 서울 근교에 살면서 과일과 채소를 심어 생활을 유지하다가 재산이 조금 불어나면 바로 도시 복판으로 들어가도 늦지는 않다.”

예나 지금이나 ‘인(in) 서울’은 세상살이에 매우 중요한 방책인가보다. 다산 정약용마저 두 아들에게 이 같이 당부했으니 말이다. 다산은 1801년 귀양을 떠나 “죄인이 되어 너희들에게 아직은 시골에 숨어서 살게 하였다”면서 “앞으로의 계획인즉”이라며 두 아들이 서울 혹은 “서울 근교”를 떠나지 않기를 바랐다.(‘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정약용 지음·박석무 편역)

하긴, 다양한 통계는 ‘인 서울’의 욕망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국가균형발전위원회에 따르면 2015년 5100만여 총 인구 중 51.2%가 수도권에 몰려 살고 있다. 또 “2014년 1014만3000명(지방 975만6000명)”의 일자리와 “2015년 연구·개발(R&D) 투자의 67.3%”, “2014년 국내 1000대 기업 본사 중 736개”가 몰려 “2016년 월 평균 임금 315만원(지방은 280만원)”을 기록한 수도권에서 “2015년 전체 신용카드 사용액의 81%”가 쓰였고, “2017년 현재 226개 자치단체 중 34곳에는 응급의료기관이 전무”한 현실이다.(이상 2018년 9월21일자 경향신문)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한 장면.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 세금은 정치인가

그러니 사람들은 살기에 팍팍하더라도 서울로, 서울로 몰려든다. 서울과 지방의 집값 차이도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신문은 “1998년 8월 대비 2018년 8월의 아파트 매매가격 상승률은 전국이 168.32%”였지만, “서울이 237.49% 오르는 사이 6대 광역시는 159.56% 상승에 그쳤다”며 “집값이 지역에 따라 ‘악어의 입’처럼 벌어지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이렇게 벌어진 서울의 집값은 올해 여름 크게 치솟았다. 정부가 그 대책을 마련했지만 종합부동산세나 보유세 등 집값과 관련한 세금 문제는 또 다시 논란이 되어 잦아들지 않는다.

11월이면 400주기를 맞는 교산 허균은 한때 이를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일 뿐이다”고 말했다. 당파의 싸움이 끊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 권력을 장악하려는 자들에 맞서 임금인 광해를 지키려는 신하였던 그는 “하나를 주고 하나를 얻는” 현실정치를 외면할 수 없었을지 모른다.

자신을 해하려는 세력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똑같이 생긴 자를 바람막이로 내세운 광해의 계책을 허균은 따랐다. 광해군 8년이었다. 진짜를 대신해 저잣거리의 만담꾼 하선을 용상에 앉혔다. 가짜는 허균의 명을 따라 교지를 내리고, 일종의 조회인 상참을 주재했다. 그러는 사이 가짜는 백성을 멀리 두고 오로지 헛된 ‘사대의 예’만을 앞세워 당파의 이익을 취하려는 세력을 목격하는데, 그것은 누군가에겐 “정치일 뿐”인 “옳고 그름의 문제”를 명확히 구분케 하는 역설이 되었다.

허균이 정치라고 말한 것은 대동법의 처리 문제였다. 지역 특산물로 세금을 대신하던 공납의 시대에 이를 제대로 낼 수 없는 백성은 다른 곳의 물건을 사서 바쳐야 했다. 그 과정에서 이를 이용해 폭리를 취하려는 중간 상인이 등장하고 이들과 결탁한 부패한 관리도 적잖았다. 임진왜란 등 전란으로 인해 농사를 지을 만한 경작지가 크게 줄어들기도 했다. 조세 운용을 합리화하고 그 기준을 더욱 명확히 하며 균등하게 세금을 부과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공납을 대신해 토지의 소유 폭에 따라 쌀로써 세금을 내도록 하는 대동법이 광해의 아버지 선조의 시대에 맹아를 틔웠다.

토지를 많이 가진 자들의 반발은 거셌다. 허균이 바라보는 “정치”가 바로, 거기 있었다. 그는 적대적 세력에 대동법 포기라는 정략을 내어주고 대신 왕을 지키고자 했을 터이다. 하지만 세금은 결코 정치가 될 수 없음을 가짜는 말했다. 광해 대신 용상에 앉은 하선이 “땅 열 마지기 가진 이에게 쌀 열섬을 받고, 땅 한 마지기 가진 이에게 쌀 한 섬을 받겠다”며 대신들을 호통 치는 장면은 예사롭지 않은 현실을 일깨운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한 장면.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 이상을 현실로 실천하라

대동법 논쟁이 지나고 이듬해 8월 허균은 “역성 혁명을 이유로 참수”당했다는데, 이미 그 이전인 광해군 3년(1611년) 그는 귀양을 경험했다. 전라도 익산의 함라마을(옛 함열현)이 유배지였다. 함열은 호남의 8개 지역에서 세금으로 바친 백성의 곡식을 싣고 나르는 금강의 성당포구가 자리 잡은 곳이다. 백성의 고혈은 황포돛배에 실려 포구에서 들고 났다.

하선은 ‘왕 노릇’을 마치고 돛단배에 올라타 도망치듯 어디론가 떠나갔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허균은 존경의 고개를 숙였다. 허균은 하선에게 “백성을 하늘처럼 섬기는 왕, 진정 그것이 꿈꾸는 왕이라면 그 꿈, 내가 이뤄드리리다”고 말한 바 있다. 꿈은 이뤄지지 못했다. 허균의 꿈은 그저 한낱 이상에 불과했을까. 하선의 배가 나아가기 시작한 곳, 어쩌면 성당포구일까.

저 멀리 포구를 바라보는 함라마을에는 광해를 몰아낸 세력에 의해 임금이 된 인조 아래서 신하로 일한 잠곡 김육이 살아 있다. 김육은 죽음 앞에서도 유서로써 대동법 실시를 주창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호남평야의 중심에서 고혈을 짜내야 했던 백성들은 그를 기억하고자 ‘김육불망비’(金堉不忘碑)를 세웠다. 이상을 품었던 허균이 한때 유배의 생활을 보냈던 곳에서 이상을 구체화하며 현실에 치열하게 맞서려 했던 김육은 그렇게 살아 있다.

김육의 생각을 들여다보며 다산 정약용은 ‘경세유표’ 등을 통해 조세 등 다양한 개혁 정책을 꿈꿨다. 그랬던 그가 정말 ‘인 서울’의 욕망으로써 아들을 가르치려 한 것일까.

그는 현실정치가 안긴 피할 수 없는 유배의 아픔 속에서 “착한 행동을 하는 것은 복을 받을 수 있는 당연한 길이므로 군자는 애써 착하게 살아갈 뿐이다. 옛날부터 화를 당한 집안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반드시 훌쩍 먼 곳으로 도망가 살면서도 더 멀고 깊은 곳으로 들어가지 못했음을 걱정하곤 한다”고 아들에게 말했다. 그러면서 “재난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먼 시골 깊은 산속으로 몰락하여 버림받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그늘진 벼랑 깊숙한 골짜기에서는 햇볕을 볼 수가 없”으니 “마침내 노루나 산토끼처럼 문명에서 멀어진 무지렁이들이 돼버릴 뿐”이며, 그래서야 “무식하고 천한 백성으로 일생을 끝마치고 말 뿐”이기 때문이다.(정약용 위 책)

결국 그가 말한 “서울 한복판”은 각자의 처지가 마련하는 좁은 시각으로 오해할 수 없으니, 훗날 “재난당할” 현실이 닥쳐오더라도 바로 그 현실에 튼실하게 두 발을 딛고 서라는 의미가 아닐까. 정약용이 두 아들에게 가르치려 했던 그 의미를, 허균의 이상과 김육의 실천을, 집값과 그로 인해 부과되어야 할 마땅한 세금을 둘러싼 오해와 논란의 현실에 새삼 비춰보게 되는 건 왜일까.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한 장면.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는?

2012년 추창민 감독 연출작. 광해군 8년 “역모의 소문이 흉흉하니 임금께서 은밀히 이르다. ‘닮은 자를 구하라. 해가 저물면 편전에 머물게 할 것이다. 숨겨야 할 일은 조보에 남기지 말라’”고 쓴 ‘광해군일기 2월28일 자’를 모티브 삼았다. 도승지 허균이 독살 위기에 처한 광해를 대신해 그와 똑같이 생긴 만담꾼 하선을 임금의 자리에 내세우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이상적인 군주의 면모를 그리며 1200만 관객의 지지를 얻었다. 이병헌이 광해와 하선의 1인2역을 연기하며 호평받았다.

윤여수 전문기자 tadada@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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