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수의 라스트 씬] 슬픈 현실 같은 영화…“해고하면 보너스 줄게”

입력 2018-10-29 06: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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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으로 1년 가까이 휴직한 산드라(오른쪽)는 복직을 앞두고 회사가 자신을 퇴직시키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듣고 주말 이틀 동안 동료들을 찾아가 회사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사진제공|그린나래미디어

■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

산드라, 부당한 해고 위기에 사투
남은 동료들 보너스 약속한 회사
거부하면 누군가 대신 해고 압력
“우리 잘 싸웠지?” 덤덤한 미소만


‘오래된 미래.’

스웨덴의 언어학자이면서 생태환경운동가인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박사는 1970년대 중반 인도 북부의 마을 라다크를 처음 찾은 뒤 그곳에 오래 머물렀다. 그는 라다크와 마을 사람들의 아름다운 공동체를 기억했다. 하지만 라다크는 흐르는 시간과 함께 서서히 파괴되어 갔다. 공동체의 삶은 부서졌다. 무분별한 개발은 따스한 공동체였던 본래 마을을 앗아갔다.

박사는 그 과정을 목격하고 ‘오래된 미래-라다크로부터 배운다’를 펴냈다. 라다크를 통해 환경과 사람들의 공동체를 회복하기 위한, 지난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세상에 필요한 가능성을 모색하며 바로 그 속에 다가올 미래가 있음을 내다봤다.

‘오래된 미래’는 그렇게 희망인 것일까. 김승섭 고려대 보건정책관리학부 교수는 최근 현실의 한 아픔을 드러내며 “오래된 미래”를 인용했다.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의 한 장면. 사진제공|그린나래미디어


● 정리해고의 낙인

2009년 1월 쌍용자동차는 법정관리 신청 뒤 4월 2646명의 직원을 ‘구조조정’하는 계획을 내놨다. 노조는 5월 파업에 돌입했다. 공장은 ‘폐쇄’됐고, 사측은 6월 976명의 노동자를 정리해고했다. 8월5일 공권력은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진압으로 노동자들을 밀어냈다. 언론은 2009년 경기지방경찰청 자료를 인용해 그해 쌍용차 파업 노동자들에게 뿌려진 최루액이 2042L로, 그 해 총 사용량의 95.5%에 달한다고 썼다. 공장 밖의 노동자 가족들은 처절한 현장을 목격하고 말았다.

노동자들의 생존과 삶의 뿌리가 흔들렸다. 숱한 이들이 극심한 우울감에 시달렸다(2009년 한 설문조사 결과는 쌍용차 파업 노동자 208명 가운데 105명(50.5%)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고 있다고 보고했다. 2010년 쌍용차 노조는 해고자 130명 가운데 83%(88명)가 최근 1년간 우울 및 불안장애를 겪었다고 밝혔다).

그 사이 30명의 노동자와 그 가족 중 누군가가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람들은 서울 덕수궁 대한문 옆에서 이들의 서러운 목숨을 조금이나마 달래보려 했다. 그러나 ‘일각’의 따가운 시선은 그마저도 쉽게 허락하지 않았고, 이는 ‘일각’만의 것이 아니어서 아픔은 적지 않은 가족까지 괴롭혔다.

해고자의 부인들은 주변의 차갑고 따가운 시선에 시달려야 했다. 사람들은 이들을 바라보며 수군거렸다. 한때 소소한 정을 나누던 이들에게 더 이상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심지어 아이들은 학교에서조차 또래들의 따갑고 차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다. 정리해고자와 그 가족이라는 ‘낙인’ 때문이었다.

국가인권위원회와 쌍용차 해고노동자 심리치유센터 ‘와락’은 올해 4월부터 두 달 동안 그 아픔의 깊이와 크기가 얼마나 깊고 큰 것인지를 측정했다. 해고노동자 89명과 복직자 34명, 해고자의 배우자 28명, 복직자의 배우자 38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벌였다. 결과는 참담했다.

해고노동자의 배우자 70.8%가 “해고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소외감을 느낀다”고 답했다. 또 이들의 54.6%, 복직자 아내 62.5% 가 “남편이 정리해고자라는 이유로 차별을 겪었다”고 답했다. 차별은 직장과 동네, 학교 등 터를 잡고 살아가는 공간에서 벌어졌다고 말했다.

결국 해고자의 배우자 82.6%와 복직자의 배우자 49.4%가 “지난 1주일간 우울 증상을 겪었다”(해고자 배우자의 경우 2017 년 한국복지패널의 조사에 참여한 일반 인구보다 8.27배나 높은 수치다)면서 기어이 “지난 1년간 진지하게 자살을 생각해본 적 있다”는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전체 응답 배우자의 32.2%)에까지 이른 아픔을 털어놓았다(2013년∼2015년 국민건강영양조사에 참여한 일반 여성이 자살을 생각한 비율(5.7%)보다 8배나 높다). 해고 노동자들은 이미 파업 당시 자신의 주변 동료들 가운데 일부와 부딪친 경험을 겪기도 했다.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의 한 장면. 사진제공|그린나래미디어


● 오래된 현재 그리고 오래된 미래

이들을 차갑고 따가운 시선으로 바라본 동료와 이웃은 ‘그들만의 사정’이 있는 것이었을까. 적어도 우울증에 시달려 휴직을 했다 일터로 돌아가려는 산드라의 동료들에게는 그랬다. 식당의 요리사로 일하는 남편과 함께 두 아이를 키우고 대출금을 갚아 가야 하는 산드라는 어느 토요일과 일요일, 주말의 이틀 동안 ‘그들만의 사정’을 확인해야 했다.

산드라는 앞서 금요일 오후 자신이 해고의 위기에 맞닥뜨렸음을 알았다. 경영상 어려움에 처한 회사는 산드라를 해고하는 대신 그 인건비로 산드라의 동료들에게 고액의 보너스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회사의 중간간부들은 동료들에게 보너스를 선택하지 않으면 또 다른 누군가가 대신 해고될 수 있음을 경고했다. 산드라는 그 과정의 부당함을 역설하고, 결국 자신에 대한 해고와 보너스를 내건 월요일 아침 재투표를 이끌어낸다. 그래서 주말의 이틀은 재투표를 위한, 아니 자신의 사회적 생존을 위한 준비의 시간이 됐다.

산드라만큼이나 16명의 동료들에게는 제각각 ‘그들만의 사정’이 있었다. 적지 않은 액수의 보너스를 포기할 수 없어 동료의 해고라는 아픔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절박한 사정. 산드라가 이들에게 선택을 강요할 수 없는 까닭이다. 자,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선택이 끝나고 회사는 산드라에게 대안을 제시한다. 또 다른 선택의 기로에 놓이지만, 산드라의 선택은 오히려 단호하다. 단호함은 아마도 자신이 맞닥뜨린 절박했던 주말 이틀 동안, 그만큼 절박한 동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터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 잘 싸웠지? 나 행복해”라며 비로소 덤덤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어쩌면 ‘오래된 미래’ 역시 산드라와 그 동료들 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쌍용차 노동자들과 그 배우자들을 심층 인터뷰해 위 조사 결과를 내놓은 김승섭 교수는 “고용불안과 정리해고는 한국사회에 상수처럼 남을 수 있다. 그동안 쌍용차 해고자와 가족이 겪은 고통은 우리 모두에게 어느 시점에는 노출될 수 있는, 우리의 오래된 미래일 수 있다”고 말했다. ‘오래된 미래’ 안에서 ‘내일을 위한 시간’을 예비해야 하는 현실. “나 행복해”라고 말할 수 없는 ‘오래된 현재’일 수 있지만, 그로부터 한 걸음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공동체를 꿈꾸는 건 또 그렇게 절박한 일이다. 고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는 “산천의 봄은 분명 흙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시작된다. 흙살 속들이 박힌 얼음이 빠지고 제 힘으로 일어서는 들풀들의 합창 속에서 온다”며 “세상의 봄”도 그와 다르지 않아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박힌 경멸과 불신이 사라질 때” 그리고 “무성한 들풀의 아우성 속에서 온다. 모든 것을 넉넉히 포용하면서 기어코 온다”(유고집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고 말했다.

위 조사 결과가 세상에 나오고 일주일 뒤인 9월13일 쌍용자동차 노조와 사측은 해고자 119명의 단계적 복직에 합의했다.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 산드라 역을 맡은 마리옹 꼬띠아르. 사진제공|그린나래미디어


■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은?

2010년 제58회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더 차일드) 수상 등 세계적 명성을 지닌 장 피에르 다르덴·뤽 다르덴 형제 감독의 2014 년 작품. 작은 공장에 다니던 산드라가 우울증으로 인해 휴직했다 복직하려다 오히려 해고의 위기에 처하면서 동료들과 겪는 주말 이틀의 이야기. 그에 대한 해고와 보너스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당하는 동료들의 모습, 산드라의 절박한 일상이 현실적인 낯익음을 안긴다. 그해 전미비평가협회와 뉴욕비평가협회가 주는 여우주연상을 받은 마리옹 꼬띠아르의 연기 덕분이기도 하다.

윤여수 전문기자 tadada@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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