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력’과 ‘겸손’이 만들어낸 박항서 신화

입력 2018-12-16 17: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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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축구대표팀 박항서 감독. 스포츠동아DB

지난해 9월말 베트남축구협회는 박항서(59) 감독을 대표팀 사령탑으로 영입하면서 가장 먼저 ‘풍부한 경험’을 앞세웠다. 2002년 한일월드컵 4강 진출이라는 업적을 강조했다. 또 거스 히딩크 감독을 보좌하면서 축구철학을 공유했다는 점도 부각했다.

하지만 국내 지도자의 베트남 진출은 큰 뉴스가 되지 못했다. 현지 반응도 냉랭했다. 유럽축구에 익숙한 베트남 축구팬들은 한국 출신 감독에 대해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외국인 감독의 무덤으로 불리는 베트남에서 아시아권 출신 감독이 버텨내기는 벅찰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박 감독은 이런 우려를 모두 불식시켰다. 베트남축구협회가 강조했듯이, 풍부한 경험으로 새로운 역사를 써내고 있다. 큰 대회를 치르고, 엄청난 성과를 거둔 박 감독의 경험은 베트남축구의 르네상스를 열어젖힌 원동력이 됐다. 히딩크가 한국에서 영웅이 됐듯이, 박 감독은 베트남의 영웅이 됐다.

경남 산청이 고향인 그는 키(170㎝)는 작았지만 힘과 기동력이 좋은 선수였다. 박 감독과 함께 선수생활을 했던 한 축구인은 “평소 성격은 워낙 착했다. 하지만 운동장에만 들어가면 이상할 정도로 돌변했다”고 회상했다. 경신고와 한양대에서 미드필더로 뛰었던 그는 신체적인 불리함을 부지런함과 악바리 근성으로 버텨냈다.

하지만 선수로서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다. 대한축구협회 기록에 따르면, 국가대표팀에는 총 2번 소집됐고, A매치 출전은 단 한번이다.

선수시절 박항서 감독.


제일은행~육군축구단~럭키금성을 거치며 1988년 현역에서 은퇴한 뒤 1996년까지 LG(전 럭키금성)에서 코치로 일했다. 1994년 미국월드컵에서는 김호 감독의 국가대표팀에서 트레이너로 경험했고, 1997년 수원 삼성으로 옮겨 코치생활을 했다.

박 감독의 이름 석자가 널리 알려진 때는 2002년이다. 히딩크 감독을 보좌하는 수석코치로서 감독과 선수들의 가교 역할을 맡아 4강 신화에 큰 힘을 보탰다.

2002년 8월 부산아시안게임대표팀 지휘봉을 잡으면서 처음으로 감독 타이틀을 달았지만 홈그라운드에서 열린 대회에서 동메달에 그치며 경질의 아픔을 겪었다. 이후에는 K리그의 포항, 경남, 전남, 상주 등에서 지도자의 길을 걸었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국내에서의 마지막은 실업팀 창원시청 감독이다.

그는 지도자로서 마지막 도전이라는 생각으로 베트남으로 떠났다. 그는 “내가 가진 축구 인생의 모든 지식과 철학 그리고 열정을 쏟아 붓겠다”고 다짐했다.

첫 번째 성과물은 올해 1월 열린 아시아축구연맹(AFC) U-23 챔피언십 준우승이다. 조직력과 기동력을 앞세운 베트남은 사상 최고의 성적을 거뒀다. 이때부터 박항서 매직은 시작됐다. 자카르타-팔렘방아시안게임에서는 4강에 올랐다. 이 또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세안축구연맹(AFF) 스즈키컵에서는 10년 만에 정상에 오르며 2018년의 대미를 장식했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베트남의 국민영웅으로 떠올랐지만 박 감독은 우쭐대는 법이 없다. 줄곧 겸손했다. 그런 언행이 베트남 팬들을 감동시키고 있다. AFC U-23챔피언십이 끝나 뒤에는 “혼자만의 능력으로 이뤄낸 성과가 아니다”며 주위의 도움에 더 감사를 표했다. 아시안게임 이후에는 “내가 베트남에서 낸 작은 성적으로 히딩크 감독님과 비교하는데 부담스럽다”며 손사래를 쳤다. 스즈키컵에서 우승한 이후에도 모든 공을 선수와 열성적으로 응원한 베트남 국민들에게 돌렸다.

지도자 인생에서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는 박 감독의 신화는 어쩌면 지금부터가 시작일지도 모른다.

최현길 전문기자 choihg2@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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