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수의 라스트 씬] 한평생 ‘꼰대’, 생의 끝에서 ‘삶’을 찾다

입력 2019-01-17 06: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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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랜 토리노’의 주인공인 노년 남성은 자신의 과거에 스스로를 경멸한다. 하지만 그 안에서 피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맞서 위안을 찾는다. 사진은 주인공을 연기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모습. 사진제공|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 영화 ‘그랜 토리노’

한국전 참전 이후 괴로움 시달린 월트
자동차공장 은퇴 후에도 무료한 일상
갱단으로부터 이웃집소년 구한 뒤 반전
진정성 있는 삶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저 역시 후회가 있습니다.”

지난해 8월 존 매케인 미 공화당 상원의원이 그토록 사랑한 자신의 삶과 영원히 이별하기에 앞서 세상에 남긴 말 중 일부다. “때로는 실수도 했지만”이라며 “부디 미국에 대한 제 사랑이 그보다 더 높게 평가받기를 바란다”고도 했다.

후회는 실수 때문에 갖게 된 것이었을까. 82년의 짧지 않은 삶을 살았던, 정치인 이전에 한 사람의 노인으로서 생의 깊은 회한을 드러내 보이고자 했던 것일까.

그는 부연하며 말했다.

“저는 제가 세상에서 가장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종종 느꼈습니다. 삶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렇습니다. 저는 제 삶의 모든 것을 사랑했습니다.(중략)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저 역시 후회가 있습니다. 하지만 좋든 나쁘든, 제 인생의 하루라도 다른 사람의 최고의 날과 바꾸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는 정치인으로서 적대적 언어를 쓰지 않았다. 2008년 대선에서 버락 오바마에게 패한 뒤 이를 받아들이며 “오늘 미국인들은 지구상 가장 위대한 국민이 됐다”고 말한 바, 그는 가치관과 생각이 다른 상대에 대한 존중의 가치를 놓을 수 없었다. 많은 이들이 그를 바라보며 건강한 보수와 품격의 정치를 떠올리곤 하는 까닭이다.

영화 ‘그랜 토리노’의 한 장면. 사진제공|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 자기 경멸은 꼰대를 낳는가

하지만 닥쳐온 죽음 앞에서 지나온 삶의 자락을 담담하게 들여다보려는 시선의 여운이 그보다 더욱 더 진하게 다가오는 건 왜일까. 새해 또 한 살의 나이를 먹으며 늙어가는 탓일까. 그는 결코 잊거나 놓아버려서는 안 될 소중한 가치라며 “우리 자신보다 더 큰 선의”를 말했다.

“우리의 정체성과 가치관은 우리 자신보다 더 큰 선의를 위해 살아갈 때 더욱 확대됩니다. 애국심을 증오와 폭력을 낳은 대립과 혼동할 때, 장벽을 허무는 대신 그 뒤에 숨어 있을 때, 이상의 힘이 변화의 커다란 동력이 될 것임을 의심할 때, 우리의 위대함은 약화합니다.”

그는 베트남전쟁 포로라는 아픈 기억을 지니고 살았다. 전쟁은 처절했고, 포로로 갇혔던 한 시절은 참혹했으리라. 그러나 그는 그런 자신의 아픈 과거에 결코 얽매이지 않았다. 그가 삶의 자락을 돌아보며 세상에 남긴 메시지는 바로 그 방증이다.

아내를 떠나보내고 홀로 남은 노인 월트 코왈스키. 그는 50년 동안 포드사에서 일한 자신과 달리 일본산 자동차를 판매하며 직접 이를 타고 다니는 아들이 영 고깝지 않다. 바라보기에 ‘요즘 젊은 것들’이 못마땅해 보이기는 매 한 가지다. 옆집으로 이사 온 몽족 남매 수와 타오를 향해 드러내는 동양인에 대한 편견도 그렇다.

‘꼰대의 전형성’이 있다면 바로 그일까. 그를 ‘꼰대스러움’으로 몰고 간 것은 무엇일까.

월트는 자신의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일상을 산다. “죽을 때까지 못 잊을 과거와 끔찍하지만 안고 살아야 할 기억들”은 한국전쟁의 참혹한 전장에서 “항복하려는 아이”를 쏴 죽여 훈장을 받은 자신, 그리고 자신의 손 어딘가에서 여전히 씻겨내지 못한 핏자국이다. 그 때문에 스스로를 언뜻언뜻 채찍질하는 모습은 자기 경멸에 가깝다. “삶이 행복하지 않고 마음이 평안하지 않다”며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몽족 주술사의 말은 그나마 작은 위안이었을지 모른다.

영화 ‘그랜 토리노’의 한 장면. 사진제공|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 과거, 그러나 이타적 현재와 미래

그에게 또 하나의 위안거리가 있다면 포드사에서 일하던 1972년 직접 조향축을 끼우며 만든 자동차 그랜토리노이다. 월트는 이를 몰아 내달리지는 않는 채 닦고 조이고 기름 치며 소중히 여긴다.

어쩌면 그랜토리노는 월트 그 자신이었을까. 그랜토리노의 키를 타오에게 빌려주기로 작정한 때로부터 월트는 자신을 버렸던 것일까.

아니다. 월트는 그랜토리노를 타오에게 유산으로 남김으로써, 그렇게 하기로 결심하고 모종의 행동에 나섬으로써 자신을 위로하려 했을 것이다.

다만 위로는 삶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모르지 않았다. 그러니 월트는 뚜벅뚜벅 걸어 나아갔다. 자신의 새로운 현재와 여전히 세상을 살아나갈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그는 과거와 당당히 결별키로 선언했다. 그저 자신의 아픔, 가해의 비극을 자처하지 않으면 안됐던 과거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길을 선택했다. 선택은 또 타오와 그 가족의 안위를 살피는 이타적 행위가 됐음에 틀림없다.

마사 누스바움 교수는 ‘지혜롭게 나이 드는 것’에서 “기본적으로 자기를 먼저 생각”하는 인간은 유아기에 “순전히 자기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만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지만, “교육을 정말 잘 받으면서 자랄 경우 자신과 아주 가까운 가족 및 친구의 범위를 넘어서는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기울이고, 사회 전반의 대의에 대한 생각도 하면서 일련의 귀중한 책임감”을 갖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두 번째 아동기”에 들어서면 “자아의 절박한 요구와 육체의 본능적 요구가 그동안 형성했던 좋은 습관들을 방해하고, 우리를 넓은 세상의 가치와 멀어지게 만든다”고 했다.

“질병, 통증, 죽음의 가능성 등 진짜로 나쁜 일들이 닥치기 때문”이다. “사고의 폭이 좁아지고 우리 자신의 입장만 생각하게 되는 탓에 남의 입장에 서기”도, “긍정적인 시각”을 갖기도 더욱 어려워진다.

월트의 ‘꼰대스러움’은 그런 “나쁜 일들” 때문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의 자녀와 손자녀들, 그리고 우리보다 젊거나 나이가 많은 벗들이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원하는가를 기억하려는 노력은 우리가 날마다 하면 좋은 운동과도 같다”는 마사 누스바움 교수의 말이 결코 학자로서 내놓은 추상적 설명이 아니라는 것을 월트는 말해주었다.

“날마다 하면 좋은 운동과도 같”은 것, 바로 이타성이지만 “(임박한 죽음에 대한 공포와)두려움이 이타성을 방해한다”는 마사 누스바움 교수는 그것이야말로 ‘꼰대’의 “도덕적 위험”이니, “최선을 다해 그 위험과 맞서”라고 강조했다.

“최선을 다해 그 위험과 맞서”려는 자, 월트였다. 그가 바로 노인이었다.

영화 ‘그랜 토리노’의 한 장면. 사진제공|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 영화 ‘그랜 토리노’는?

한국전쟁 참전의 아픔이 남긴 상처에 시달리는 노인 월트 코왈스키. 옆집으로 이사 온 몽족 남매 수와 그 동생 타오에게 마음의 문을 열게 된 그는 이들이 처한 위태로움에 목숨을 내걸고 맞선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완고한 노인 월트 코왈스키 역을 연기하며 ‘명장’의 이름에 값하는 연출력의 성취를 보여준다. 2008년 연출작이다. 엔딩 크레딧과 함께 그가 인생의 회한을 담아내는듯 직접 부른 노래도 깊은 잔향을 안겨준다.

윤여수 기자 tadada@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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