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수의 라스트 씬] 잔인한 봄날 그후…아직도 웃지 못하는 영혼들

입력 2019-02-21 06: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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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화려한 휴가’는 1980년 5월 광주를 그려냈다. 곤봉과 총칼로 시민들을 “분노와 죽음의 공포”에 치떨게 한 폭력은 여전히 씻겨내지 못하는 현재적 고통이 되고 있다.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 영화 ‘화려한 휴가’

눈앞에서 친구·가족 잃은 그날의 악몽
잇단 왜곡·망언, 살아남은 자 슬픔 더해


하필 학과 동기생의 생일이었다. 이른 저녁부터 값싼 안주에 몇 병의 소주를 사이에 두고 동기생들은 낄낄거리고 있었다. 한 친구가 술집으로 뛰어 들어왔다.

“야! OOO 형이 끌려갔어!”

동기생들은 ‘그래서 뭘 어쩌라는 거냐’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친구들의 무심한 반응에 분을 삭이지 못한 녀석은 이내 자리에 한 바가지 욕설을 퍼붓고는 다시 뛰쳐나갔다.

학과 선배인 OOO 형이 너른 잔디광장에 자리 잡고 앉은 그날, 햇살은 맑았다. 선배는 ‘예비역’으로 불린 복학생이었다. 한쪽 다리가 다소 불편한 장애인이었던 그는 여느 복학생들처럼 도서관과 강의실만을 오갈 뿐 다른 곳에는 눈을 돌리지 않는, 평범한 대학 2년생이었다. 그런 그가 잔디광장에 모여든 400여 명의 무리들 사이에서 착잡한 표정으로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 어느 봄날의 싸움

무리들은 집회를 마치고 이내 교문 밖으로 향했다. 선배도 그 틈에 섞였다. 교문 밖에서는 대기하고 있던 경찰들이 대열을 재정비하고 있었다. 교문을 사이에 둔 치열한 투석전을 예고했다. 아직 최루탄이 터지기 전인데도 어떤 여학생들은 두꺼운 파일을 품에 안고 한 손으로는 코를 막은 채 급하게 교문을 빠져나가기도 했다.

무리들은 평소처럼 캠퍼스 바닥에 깔린 보도블록을 깨지 않았다. 깨어진 보도블록 조각은 늘 교문 투석전에 쓰였다. 하지만 이날 무리들은 그것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저 구호만을 외치며 교문 밖으로 나아갔다.

그때였다. 경찰은 최루탄을 쐈다. 펑! 펑! 눈 맵도록 희뿌연 분말이 쏟아져 내렸다. 경찰은 이내 무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교문 안으로까지 진입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아나던 무리들 가운데 일부가 넘어지기 시작했다. 다리 불편한 복학생 선배가 휘청거리며 연행됐다. 소식을 들은 또 다른 무리들이 새롭게 전열을 구축했고, 숫자는 1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결국 학교 측이 나서서 경찰에 석방을 요청했다. 몇 시간이 지나 끌려갔던 선배는 풀려났다. 돌아온 선배는 소주를 들이켜며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눈물을 흘렸다.

그가 무리들과 함께 잔디광장에 자리 잡고 앉았던 것은 한때 자신의 고향에서 벌어졌던 참혹한 현장을 도저히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웃에 살던 누군가가, 친구 중 어떤 이가 세상을 떠났거나 상처를 입었거나 아님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 아픔을 아무에게도 드러내지 않았던 그가 남도의 어느 한 도시 출신이었음을 안 것은 바로 그날이었다.

영화 ‘화려한 휴가’의 한 장면.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 ‘살아남은 자의 슬픔’

그의 고향에서는 한 청년이 택시를 몰며 살아가고 있었다. 흉흉했던 시절, 그는 고교생인 동생을 찾으러 거리로 나섰다. 동생은 군중 속에 섞여 있었다. 부모를 일찍 여읜 그는 우등생인 동생에게서 살아가는 힘을 얻곤 했다. 그런 동생이 무참한 폭력 앞에 그대로 노출되는 위험을 그는 두고 볼 수 없었다.

하지만 폭력 앞에서 그 누구도 무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청년은 도청으로 나아갔다. 인간으로서 지닌 최소한의 존엄성 아니 양심을 저버릴 수 없었다. 숱한 사람들은 양심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것은 목숨을 내건 것이기도 했다.

그는 최후의 순간에 환하게 웃었다. 그만이 아니었다. 동료 택시기사와 ‘잘 나가던 제비족’과 예비역 대령 등 수많은 소시민들…, 모두가 환한 웃음을 지었다.

대체 목숨을 내걸고서야 비로소 웃을 수 있는 그 잔혹한 역설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제는 신랑이 될 청년을 옆에 두고 선 신부는 웃지 않았다. 아니 웃을 수 없었다.

목숨을 내걸고서 웃었던 자들은 결코 원하지 않았던 죽음을 맞았다. 살려고, 살아내려고 몸부림쳤지만 끝내 무력할 수밖에 없었던 떼죽음이었다. 그 수많은 죽음들 앞에서 신부는 웃어서는 안 되었다. 신부는 그렇게 떼려야 떼어낼 수 없는 굵은 생채기의 딱지를 오래도록 가슴에 품은 채 아파했을 것이다.

앞서 독일 시인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 남”은 자신에게 바로 그 친구들이 꿈에 찾아와 “강한 자는 살아 남는다”고 되레 위로를 건넬 때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고 털어 놓았다. 하지만 떼죽음은 강하지 못했던 탓이 아니었다. 더 없이 강했던 때문에 죽음은 찾아오고 말았다. 그렇기에 떼죽음은 스스로를 미워할 수 없다. 오히려 스스로를 미워하는 것은 슬픔을 안고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수없는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 되어 버렸을지 모르겠다.

영화 ‘화려한 휴가’의 한 장면.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 “인간의 존엄성, 그것은 착각인가?”

이 같은 짐작은 그저 ‘살아남’기는커녕 그 실상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의 어렴풋한 정서적 공감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다.

“한 사람의 생애에서 더러는, 저 혼자 힘으로는 결코 건널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거대한 강물과 맞닥뜨리기도 하는 법이다”고 말한 작가 임철우는 “그 도시에서 바로 그 강과 마주쳤을 때 스물여섯살의 대학 4년생”이었다. 그는 “분노와 죽음의 공포에 치떨며, 그 버려진 도시에서 그들만의 힘으로 홀로 견뎌내야 했던 봄날 열흘의 낮과 밤”을 힘겹게 돌아보며 그곳에 있었던 세 형제의 이야기를 대하소설 ‘봄날’에 담아냈다.

무려 10년의 세월을 문학적 기록으로 써내려간 그는 이미 1980년대 초반부터 “운명과도 같은 강물”을 건너려다 실제로 주저앉곤 했나보다. 숱한 비유와 은유로써 “그 도시”에서 벌어졌던 참혹했던 일들을 소설로 진술했던 작가는 때마다 “책꽂이 절반을 채울 분량의 자료들을 뒤적여가다가 나도 모르게 울분에 차올라 혼자 책상에 앉아 컥컥 울음을 터뜨린 적도 많았다”고 고백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고통은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의 몫일 수밖에 없다”는 어쩔 수 없는 무참함을 그는 한 시도 잊지 않았을 것이다.(이상 ‘봄날’ 인용)

작가 한강도 열다섯 소년 동호와 그 주변인물들이 겪었던 “봄날 열흘의 낮과 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역시 “당신들을 잃은 뒤, 우리들의 시간은 저녁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집과 거리가 저녁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어두워지지도, 다시 밝아지지도 않는 저녁 속에서 우리들은 밥을 먹고, 걸음을 걷고 잠을 잡니다”면서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며 아파했다.

무심코 살아가는 혹은 애써 잊으려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찾아오는 그 고통스런 기억 탓이다. 그러면서 한강은 물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이상 소설 ‘소년이 온다’ 인용)

39년 전 5월, 남도의 땅 광주에서 벌어졌던 참혹한 일들과 관련해 난무하는 왜곡과 부정의 망언은 최소한으로 존엄해지려는 ‘살아남은 자’들을 비웃고 있음을, 한강은 그렇게 뼈아픈 물음으로 가리키고 있다.

영화 ‘화려한 휴가’의 한 장면.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 영화 ‘화려한 휴가’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드라마로 구성한 작품. 부모를 일찍 여의고 고교생인 동생과 살아가는 택시기사 민우, 그가 짝사랑하는 간호사 박신애와 그 아버지인 예비역 대령 박흥수 등 소시민들이 겪어야 했던 1980년 5월 광주의 이야기다. 2007년 김지훈 감독은 광주 시민들을 향한 진압군의 발포 장면 등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 김상경, 안성기, 이요원, 이준기가 주연했다.

윤여수 전문기자 tadada@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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