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리 기자의 여기는 칸] 英 거장 켄 로치 “삶의 방식에 대한 관심이 곧 드라마”

입력 2019-05-22 08: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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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회 칸 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서 새 영화 ‘쏘리 위 미스드 유’를 선보인 켄 로치 감독(왼쪽)과 각본가인 폴 래버티. 이들은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년)과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년)를 통해 두 번이나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칸(프랑스)|이해리 기자 gofl1024@donga.com

영국의 켄 로치 감독은(83) 흔히 ‘블루칼라의 시인’으로 불린다. 영국 BBC 다큐멘터리 연출자로 출발해 50여 년간 소외받는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에 시선을 둔 작품 활동을 해오면서 얻은 값진 명칭이다.

영국을 넘어 유럽을 대표하는 감독인 그는 ‘거장’이란 수식어가 전혀 부족하지 않은 연출자이기도 하다. 2006년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2016년 ‘나, 다니엘 블레이크’로 두 차례나 칸 국제영화제 최고 영예인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올해 칸 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서 새 연출작 ‘쏘리 위 미스드 유’(Sorry We Missed You)를 선보이고 있는 켄 로치 감독을 19일(이하 한국시간) 칸에서 만났다.

평생 천착해온 주제의식을 이번 영화에서도 변함 없이 이어간 감독은 “사람들이 점점 개인주의자가 되어 간다”며 “삶을 더 힘들게 만들고, 함께 활동하기 어려운 부분이 자꾸만 생긴다”고 말했다.


● “노동 문제에 있어서 정권의 몫, 정책 전혀 바뀌지 않았다”

‘쏘리 위 미스드 유’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의 여파로 빚더미에 앉은 가족의 이야기를 그린다. 임시직 택배기사로 생계를 꾸리는 가장의 모습을 통해 밤낮없이 일해도 나아지지 않는 노동자의 고단한 삶을 보여주고, 불안정한 고용의 여파가 한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담는다.

사회보장제도의 맹점을 파고든 앞선 작품인 ‘나, 다니엘 블레이크’와도 맥이 닿는다.

켄 로치는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통해 (노동)이슈에 대한 생각을 변화시키고, 많은 이들이 (노동문제를)토론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 토론과 논의가 긍정적인 개선책으로 이어졌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그는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사실은, 권력이 해야 할 몫이나 정책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며 “약자를 위한 정부의 입장 역시 달라지지 않았다. 1인치도 움직이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켄 로치 감독은 한때 영화 작업을 멈추겠다는 은퇴의 뜻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쉽게 결단하지 못했다.

자본주의와 노동문제에 대해 여전히 할 이야기가 남은듯 2016년 ‘나, 다니엘 블레이크’로 돌아왔다. 심장질환으로 일을 할 수 없게 된 목수가 실업수당을 신청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사회보장제도의 허점과 그 각박한 삶에서도 존엄성을 잃지 않는 사람들을 그린 감독은 이번 ‘쏘리 위 미스드 유’에서는 이른바 ‘긱 이코노미’(gig econommy·기업이 근로자를 정규 채용하지 않고 필요할 때만 임시로 일을 맡기는 고용 형태)에 관한 화두를 꺼낸다.

영화는 영국 중소도시 뉴캐슬이 배경이지만 그대로 한국사회에 대입해도 될 만큼 기시감이 크다. 감독은 시대에 따라 경제적인 고용모델이 변화하고 그로부터 노동자의 삶도 영향을 받지만 “고용주와 노동자의 갈등은 예전과 지금이나 같다”고 짚었다.

“과거 공장에 줄서서 일하는 대부분의 노동자를 향해 고용주는 ‘더 열심히 일해!’라고 얘기했다면, 지금은 어디에도 고용되지 않는 비임금 근로자(self-employed)가 많다보니 ‘내일부터 일하러 나오지 못하게 하겠다’고 말하는 식이다. 같은 방식의 착취가 시대에 따라 변화했을 뿐이다. 개발과 기술은 늘 착취자(고용자)가 갖고 있다.”

켄 로치 감독이 연출한 ‘쏘리 위 미스드 유’의 한 장면. 사진제공|칸 국제영화제


● “칸의 전통 방식 고수, 잘한 일”

켄 로치는 꾸준히 목소리를 내온 덕분에 ‘사회파 감독’으로도 통한다. 최근 활동을 시작한 창작자들, 특히 젊은 한국 감독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데 주저하고 있다는 질문을 받은 그는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국뿐 아니라)유럽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관심을 두면 하루하루의 드라마를 완성할 수 있다. 문학이나 미술에서는 우리의 인생을 바라보면서 작품을 만드는 일은 전통이 되고 있다. 영화에 투자하는 이들도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또한 그런 영화를 잘 만드는 감독도 찾을 수 있다.”

켄 로치는 한국은 물론 유럽에서도 일상의 드라마에 주목하는 감독,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연출자가 드문 이유가 “투자하는 이들에게 있다”고 했다. 왜 그런 상황이 벌어졌는지, 투자자들로부터 시작된 영향은 없는지 살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칸 국제영화제와 각별한 인연을 이어가는 그는 칸이 고수하고 있는 ‘전통’을 긍정적으로 바라봤다. 특히 넷플릭스, 아마존TV 등 OTT(인터넷 동영상) 플랫폼 다변화 속에 영화의 극장 상영 방식에 변화가 일어나는 상황을 두고 “극장에서 관객과 영화를 보는 일은 특별하고 색다른 경험”이라고 강조했다.

“개인주의 사회에서 많은 이들이 이어폰을 꽂고 교류하지 않지만, 극장에서는 서로 소통하고 관객과 대화하는 굉장한 가치가 있다. 극장 안에서 함께하는 경험은 나에게 소중하다. 칸 국제영화제가 그런 전통을 지키려는 것에 대해 아주 잘했다(well done)고 말해줬다.”

칸(프랑스)|이해리 기자 gofl1024@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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