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호의 해피존] 엔포서의 가치와 빈볼의 역할

입력 2019-05-23 0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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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동아DB

1988년 캐나다 아이스하키 팬들은 발칵 뒤집혔다. 에드먼턴 오일러스가 빙판의 황제 웨인 그레츠키(58)를 LA 킹스로 트레이드한다고 발표하자 정치권에서까지 반대 목소리가 나왔다. 그레츠키의 LA 입성은 북미아이스하키리그(NHL)의 인기를 미국 서부까지 확장시킨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당시 그레츠키의 이적 조건에는 매우 특별한 항목이 하나 있었다. ‘마티 맥솔리가 꼭 함께 LA로 가야한다’고 그레츠키가 직접 요청한 내용이었다.

마티 맥솔리는 NHL에만 존재하는 ‘엔포서(enforce)’였다. 맥솔리가 없었다면 그레츠키는 부상으로 훨씬 빨리 은퇴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공통된 평가다. 맥솔리는 그레츠키에게 교묘한 반칙을 하거나 거칠게 보디체크를 하는 상대 선수에게 달려가 주먹다짐을 벌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맥솔리가 벤치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 그레츠키는 날렵하게 빙판을 질주했고 퍽을 골문으로 날릴 수 있었다.

엔포서. 수십년간 NHL에서 논란이 이어지고 있는 단어다. NHL 엔포서들은 하키 선수지만 복싱훈련을 한다. 그중에는 아무리 높게 평가해도 하키 실력은 NHL레벨에 못 미치는 경우도 있다. 공통점은 최고의 싸움 실력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은 거구에 날렵하고 투지로 똘똘 뭉쳐 있다.

팀원들은 모두 엔포서를 믿고 의지한다. 아이스하키는 무기로 둔갑할 수 있는 스틱을 손에 쥐고 경기한다. 스케이트 날은 날카롭다. 모든 구기 종목 중 가장 속도가 빠르다. 심판의 눈을 피해 스틱으로 후려치거나, 스케이트로 걷어 찰 수도 있다. 과한 충돌은 큰 부상으로 이어진다.

엔포서는 이런 경기 특성 속에서 보이지 않은 하나의 기준을 세운다. 선을 넘어서는 순간, 최고의 파이터와 격투를 벌어야 하기 때문에 더 신중히 수비를 할 수밖에 없다.

덕분에 슈퍼스타들은 더 빠르고 화려한 플레이를 할 수 있게 됐다. 부상도 크게 감소했다. 엔포서가 있는 NHL이 유럽리그보다 공격수들의 부상 비율이 훨씬 낮은 것이 이를 증명한다.

야구에서 NHL의 엔포서와 가까운 단어는 빈볼이다. 어원은 ‘머리를 향해 던지는 위협구’다. 그러나 대부분 빈볼은 부상 위험이 적은 엉덩이가 목표다. 빈볼은 경기시간의 제약이 없는 야구 특성이 많은 영향을 미친다. 또한 야구는 아이스하키 이상 위험한 도구를 이용한다. 시속 140㎞의 공은 생명을 뺏을 수도 있다.

빈볼 역시 하나의 기준선을 넘는 순간 날아온다. 무관심 도루 등 욕심을 부리다 상대의 자존심을 짓밟았을 때, 사인 훔치기 등 매너 없는 플레이, 수비수를 다치게 하는 격한 슬라이딩이 나오면 빈볼을 각오해야 한다. 서로 지키기만 하면 야구경기는 훨씬 더 매끄럽고 품격 있게 진행될 수 있다. 물론 공에 맞아 부상을 당한 타자가 없어야 한다는 큰 전제가 필요하다.

빈볼도 야구의 일부며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최근 현장에서 만난 투수들은 고민을 털어 놓는다. “상대 주축 타자한테 몸쪽 승부도 못 하겠다. 빠지기라도 하면 일년 내내 욕을 먹는다”, “우리 타자들이 다치면 서로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달라진 환경 속 과거 엔포서처럼 용감하게 마운드에 올라 깔끔하게 타자 엉덩이에 공을 던질 배짱 있는 투수들은 사라지고 있다. 그만큼 KBO리그에서 빈볼이 갖고 있는 기준점은 옅어졌고 역할도 작아지고 있다. 올바른 변화인지는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

# ‘마지막 4할 타자’ 테드 윌리엄스는 스트라이크존을 77개의 공으로 나눠 공략했다. 그중 자신이 4할 이상 타율을 기록할 수 있는 코스의 공3.5개를 ‘해피존’이라고 이름 지었다. 타자는 놓쳐서는 안 되는, 반대로 투수는 절대로 피해야 할 해피존은 인생의 축소판인 야구의 철학이 요약된 곳이다.

이경호 스포츠부 차장 rush@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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