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호의 해피존] 시프트 페이퍼가 왜 문제인가?

입력 2019-05-30 10:30:00
카카오톡 공유하기
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삼성 김한수 감독. 사진제공|스포츠코리아

2009시즌까지 경기 중 덕아웃은 북새통이었다. 엔트리에 없는 코치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들락날락거렸다. 감독 앞에는 인터넷이 연결된 노트북이 버젓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전력분석 팀은 감독과 코치, 선수들에게 상대팀 투수, 타자, 수비와 관련된 정보를 전달했다. 관중석에는 스피드건과 영상 촬영 장비를 설치한 다른 팀이 투수의 투구 내용을 실시간으로 분석해 덕아웃 노트북에 전송했다. SK 와이번스는 이 시스템에 크게 의존했다. 반대로 롯데 자이언츠 제리 로이스터 전 감독은 덕아웃 노트북 정보를 거의 활용하지 않았다. “미국에는 덕아웃에 노트북이 없다. 사전에 준비된 자료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입장이었다.

2009년을 끝으로 KBO는 스포츠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덕아웃 전자기기 사용을 금지했다. 의미 있는 선택이었다.

10년이 지난 2019년. 경기를 앞둔 덕아웃 한쪽 벽에는 각종 전력 분석 자료가 빼곡히 붙어 있다. 투구 분석, 타구 분석이 주를 이룬다. 이미 한 차례 전력분석 미팅에서 전달받은 내용이지만 선수들은 타석에 나가기 전, 수비교대 전 종종 이를 확인한다.

포수들은 더 복잡한 자료를 제공받는다. 대부분 태블릿PC를 사용한다. 워낙 양이 방대하기 때문이다. LG 트윈스 포수 유강남은 덕아웃에도 이 정보를 활용하기 위해 직접 정리한 바인더를 챙긴다. NC 다이노스 박석민도 항상 수첩을 갖고 다닌다. 덕아웃에서 메모하고 확인한다.

유강남, 박석민 모두 매우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렇다면 메모를 그라운드로 가지고 나가 타자가 타석에 서기 전 확인하는 것은 문제가 될까? 규칙에도 어긋남이 없고 경기의 순수성을 훼손하지도 않는다. 메이저리그 선수들은 정교하게 설계된 수비 시프트를 실행하기 위해 이 같은 페이퍼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포수들도 암 밴드에 타자 정보를 붙여서 나오기도 한다.

아직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더 빠르고 정확한 판단을 위한 변화의 결과다. 관중의 입장에서는 포수가 배터리 코치의 사인을 전달받아 다시 투수에게 내는 것보다 훨씬 덜 지루하다. 삼성 라이온즈는 이 같은 시프트 페이퍼를 선보였지만 복수의 구단의 항의 속에 당분간 사용할 수 없게 됐다. 치열한 고민 끝에 선보인 새로운 아이디어였지만 KBO 단장회의에서 사용가능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KBO리그는 왜 이 같은 새로운 시도들에 제동을 걸까. 지나치게 폐쇄적인 리그는 변화와 발전에 더딜 수밖에 없다. 규칙에 어긋남이 없으면 문제점이 발견되기 전까지 무작정 금지시키는 것도 옳은 결정이 아니다.

LG 류중일 감독. 스포츠동아DB


명 유격수 출신이자 수비코치로도 잔뼈가 굵은 LG 류중일 감독은 “크게 필요성을 느끼지는 않지만 못 하게 할 이유는 없다. 미국은 이미 몇몇 팀이 활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메이저리그는 승인된 전자기기의 덕아웃 사용을 허가하고 있다. 서류철을 뒤지는 것보다 자료가 저장된 태블릿PC를 보는 것이 훨씬 시간도 절약되고 편리하기 때문이다. KBO리그 각 팀들은 종종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다. 통합 마케팅, 마켓, 영상중계를 통해 리그 산업화를 앞당길 수 있는 ‘KBO닷컴’이 아직 첫발을 내딛지 못하는 가장 큰 배경에도 변화에 대한 지나친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 ‘마지막 4할 타자’ 테드 윌리엄스는 스트라이크존을 77개의 공으로 나눠 공략했다. 그중 자신이 4할 이상 타율을 기록할 수 있는 코스의 공 3.5개를 ‘해피존’이라고 이름 지었다. 타자는 놓쳐서는 안 되는, 반대로 투수는 절대로 피해야 할 해피존은 인생의 축소판인 야구의 철학이 요약된 곳이다.

이경호 스포츠부 차장 rush@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오늘의 핫이슈

뉴스스탠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