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은6, 꿈의 무대에서 마음껏 울었다

입력 2019-06-04 0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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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녀의 눈물’이다. 이정은6이 3일(한국시간)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컨트리클럽 오브 찰스턴에서 열린 제74회 US여자오픈에서 짜릿한 역전 우승을 차지했다. 어려운 가정환경을 딛고 한국인 통산 10번째로 이 대회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린 이정은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짧게는 2년 전, 길게는 21년 전 그때 그 순간이 떠오른 하루였다. 누구는 새벽잠을 쫓아가며, 또 다른 누구는 졸인 가슴을 달래가며 TV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렇게 애간장을 태우던 모두는 우승이 확정된 뒤에야 주먹을 불끈 쥐며 “해냈다!”라고 외칠 수 있었다.

‘핫식스’ 이정은6(23·대방건설)이 마침내 세계무대 정상을 밟는 쾌거를 이뤄냈다. 세계여자골프 ‘꿈의 무대’로 불리는 US여자오픈(총상금 550만 달러·약 66억6000만 원)에서 통쾌한 역전 우승을 거두고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데뷔 시즌 첫 축포를 쏘아 올렸다.

이정은은 3일(한국시간)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컨트리클럽 오브 찰스턴(파71·6535야드)에서 열린 대회 최종라운드에서 1타를 줄여 합계 6언더파 278타로 우승 트로피와 입을 맞췄다. 선두권 경쟁자들 대부분이 타수를 잃는 상황에서 홀로 언더파 활약을 펼치며 ‘메이저 퀸’이라는 값진 타이틀을 얻었다. 우승상금 100만 달러(약 12억 원)를 품으면서 US여자오픈 통산 한국인 10승 합작이라는 대업을 이룬 ‘겁 없는 신예’는 “그동안 골프를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 걱정 많던 소녀

1996년 전남 순천에서 태어난 이정은은 유복한 집안에서 자란 많은 프로골퍼들과 달리 넉넉치 않은 가정환경 속에서 자랐다. 덤프트럭 기사로 일하던 아버지 이정호 씨(55)가 교통사고로 하반신 마비 판정을 받았던 때가 4살 무렵. 다른 종목보다 많은 돈이 드는 골프는 생각하기도 어려운 처지였다.

그러나 모든 세상사가 그렇듯 계기는 우연처럼 갑작스레 찾아왔다. 9살 때, 당시 티칭 프로로 일하던 아버지의 후배가 무료 레슨을 해주기로 하면서 처음 클럽을 잡았다. 골프가 어떤 종목인지도 잘 몰랐던 소녀는 점차 재미를 붙이면서 꿈을 키웠지만, 형편상 골프를 계속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으로 결국 초등학교 5학년 때 클럽을 놓고 말았다.

그러나 꿈을 향한 미련을 쉽게 버리지 못했다. 훌륭한 선수로 성장하지 못하더라도 레슨 프로로서 가족들의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다는 주위의 조언을 듣고 중학교 3학년으로 올라가면서 다시 채를 잡았다.

누구보다 굳게 마음먹은 이정은은 누구보다 빠른 성장 속도를 보였다. 고등학교 2학년이던 2013년 권위있는 아마추어 선수권 베어크리크배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2015년 국가대표로 발탁돼 광주하계유니버시아드 개인전과 단체전 금메달 휩쓸며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2016년 KLPGA 시상식에서 신인왕을 차지한 뒤 아버지 이정호 씨(가운데), 어머니 주은진 씨(오른쪽)와 기쁨을 나누고 있는 이정은. 동아일보DB


● 도전 택한 여왕

2016년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로 입성한 이정은은 데뷔와 함께 지금까지 떼려야 뗄 수 없는 숫자와 인연을 맺게 된다. 바로 숫자 ‘6’이다. 앞서 데뷔한 5명의 ‘동명이인’ 이정은이 있는 바람에 이정은은 이들과 구분을 짓기 위해 자신의 이름 뒤에 6을 붙였다. 미국은 물론 여러 외신들이 주목하는 ‘핫식스’와 ‘럭키식스’의 탄생은 이렇게 이뤄졌다.

데뷔 시즌 우승은 없었지만 꾸준한 성적을 바탕으로 신인왕을 차지한 이정은은 이듬해부터 본격적인 여왕으로서의 행보를 시작했다. 2017년 4승을 거두면서 대상과 상금왕, 평균타수상 등 6관왕을 거머쥐었고, 2018년 메이저 2연승을 앞세워 상금왕와 평균타수상 타이틀을 지켰다.

도전은 멈추지 않았다. 이정은은 지난해 11월 LPGA 투어 진출을 깜짝 선언했다. 본인조차 기대하지 않았던 Q시리즈에서 수석통과라는 열매를 맺었고, 길지 않은 고민 끝에 미국행을 택했다.


● 대업 이룬 신예


올해 2월 데뷔전으로 치른 ISPS 한다 위민스 호주 오픈에서 공동 10위를 차지하며 경쟁력을 확인한 이정은은 이후 컷 탈락 없이 꾸준하게 상위권 성적을 이어갔다. 지난달 메디힐 챔피언십에선 연장 승부를 펼치면서 우승 가능성도 키웠다.

그토록 기다리던 결실은 예상보다 더 빠르게 다가왔다. 외환위기로 온 나라가 신음하던 1998년 박세리(42·은퇴)가 ‘맨발의 투혼’을 펼치며 감격의 첫 우승을 맛본 뒤 태극낭자들이 20년간 명맥을 이어온 US여자오픈에서였다. 이정은은 이 무대에서 한국인 통산 10승 대업을 이루면서 당당하게 태극낭자 우승자 반열에 이름을 올렸다. 2017년 박성현(26·솔레어)처럼 신예의 당찬 첫 메이저대회 제패였다.

이제 한국인 5년 연속 LPGA 투어 신인왕 수상이라는 목표를 향해 달려갈 이정은은 “오늘 우승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노력을 통해 더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고봉준 기자 shutout@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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